감독 : 곽경택
주연 : 권상우, 정려원, 마동석
개봉 : 2011년 9월 7일
관람 : 2011년 9월 8일
등급 : 15세 이상
진정 아픈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닌 마음의 고통이다.
고백하건데 저는 참 눈물이 많은 아이였습니다.(아니 지금도 눈물은 많습니다. ^^) 남자는 태어나서 딱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사회적 통념을 강요받은터라 대놓고 울지는 못했지만 혼자 숨어서 참 많이 울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 눈물의 원인을 보면 몸아 아파서 운 적은 단 한번도 없더라는 겁니다. 친구들과 장난치다가 이빨이 부러졌을 때도 울지 않았고, 이발소에서 이발사의 실수로 제 귀가 잘려져 나갔을 때도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그 이후로 저는 이발소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부러진 손가락을 방치하는 바람에 엉덩이 뼈를 잘라 손에 붙이는 수술을 했지만 수술 부위가 아물지 않아 살이 썩어갈 때도 울지 않았고, 왼쪽 발에 찌개를 엎질러 화상을 입고, 화상 치료를 위해 마취도 없이 수술 칼로 화상 부위를 바둑판 모양으로 칼집을 낼 때도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지나고보면 저도 참 사건 사고가 많았고, 육체의 고통을 꽤 많이 느껴봤지만 그러한 고통들은 제게 눈물을 흘리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이를 악물고 두 주먹을 움켜 잡으면 충분히 참을 수 있는 고통들이었죠.
그런 제가 눈물을 흘린 것은 대부분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혼자 많이 울었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힘도 없었고, 억울한 일에 항의조차 할 수 없었던 저는 억울함을 눈물로 풀어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제가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은 사랑하던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았을 때였습니다. 그땐 정말 가만히 누워 있다가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컥 하며 눈물이 올라왔었습니다. 한 달 정도는 그렇게 숨어서 울었나봅니다.
이렇듯 제 경험으로 비춰본다면 진정 아픈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아직 좀 더 큰 육체의 고통을 당해보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그러한 고통들은 충분히 참고 넘길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고통 만큼은 그럴 수가 없더군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세월이지만 단기적으로는 눈물이었습니다. 한바탕의 눈물은 마음에 상처를 조금이라도 아물게 해주었습니다.
무엇이 진정 아픈 것인지 아는 영화
[통증]은 진정 아픈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남순(권상우)은 어렸을 적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고, 그 후유증으로 통증을 느낄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육체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남순. 영화 [통증]은 그런 남순을 보여주기 위해서 참 많이도 남순을 때립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인 저도 남순에게 가해지는 폭력으로 인한 묵직한 육체의 고통이 느껴지는데 남순은 무표정한 얼굴로 전혀 아프지 않다는 듯이 그 폭력을 묵묵히 견뎌냅니다.
그런 그가 한 여자를 만납니다. 자신과는 다르게 작은 통증조차도 치명적인 혈우병을 앓고 있는 동현(정려원). 삶에 대한 그 어떤 희망도 없어 보이지만 얼굴 가득 웃음을 띄고, 작은 상처에도 치명적인 주제에 오히려 세상에 당당한 그녀. 남순은 그만 동현을 사랑하고 맙니다.
통증을 느낄 수 없는 남순과 작은 통증조차도 치명적인 동현의 사랑. 서로 너무나도 다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서로 너무나도 닮은 이 두 사람의 사랑으로 인하여 남순은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별이 다가오며 그러한 행복은 아픔이 됩니다. 육체적 아픔 따위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사랑으로 인한 아픔.
사랑의 이별이 왜 견딜 수 없이 아픈지 아시나요? 그것은 너무나도 행복했던 사랑에 의한 기억 때문입니다. 너무나 행복했기에 그러한 행복이 깨졌을 때의 아픔은 상대적으로 더 크게 느껴지는 겁니다.
남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의 죽음으로 인하여 무미건조하고 삭막한 삶을 살던 남순이었기에 동현과의 사랑은 가족의 죽음 이후 처음 느끼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습니다.
가족에 대한 추억과 죄책감만이 오래된 먼저들과 함께 가득 묻어나던 그의 집엔 동현의 손길로 하나둘씩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집니다. 그렇게 오랜만에 찾아온 행복. 남순은 그 행복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고, 그럴 수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땐 그 어떤 아픔과도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아픔이 남순에게 닥친 것입니다.
그렇게 통증을 느낄 수 없는 남자 남순은 진정한 아픔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소한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그는 선택을 합니다. 육체의 아픔을 느낄 수 없기에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던 그는 눈물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이 낯선 통증을 해결하려 하고 그렇게 비극은 찾아오는 것입니다.
더 큰 아픔을 놓쳤다.
강풀의 원안을 영화화한 [통증]은 강풀의 원작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랑스러우면서 안타까운 캐릭터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소한 웃음, 행복.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하지만 곧 드러날 아픔과 눈물. 이 영화는 그러한 것들을 관객 앞에 충실하게 펼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것은 지금보다 더 큰 통증을 관객에게 안겨 줄 수 있을텐데 그러지 못하고 겉도는 영화의 전개 때문입니다.
[통증]은 강풀의 원작 만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단순하게 원작과 영화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통증]이 강풀 원작의 만화로 나온다면 지금까지 강풀의 만화가 그러했듯이 남순과 동현의 과거, 그리고 주변 인물들, 특히 범노(마동석)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시간적 제한이 없는 만화와 영화는 다릅니다. 그래서 곽경택 감독은 곁가지를 모두 쳐버리는 작업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남순의 과거는 짧은 플래쉬백으로 처리되고, 동현의 과거 역시 비중 낮은 고백으로 처리되었으며, 범노는 주연급 캐릭터였음에도 캐릭터 자체가 통째로 생략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강풀의 원작 만화를 소재로한 영화들이 기대만큼의 흥행을 거두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그 이유는 원작 만화의 재미를 영화가 제대로 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강풀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이 저지르는 최대 실수는 스토리에 집중을 하기 위해 스토리 전개와 상관없는 에피소드들을 대부분 생략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략된 에피소드들은 캐릭터를 완성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들입니다. 결국 에피소드들을 생략하면서 캐릭터는 부실해지는 악순환이 계속된 것이죠. 시간적 제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강풀의 만화가 재미있는 것은 내용보다는 캐릭터에 있다는 것을 영화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강풀 원작의 영화 중에서 흥행에서 가장 성공한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별다른 내용이 없는 대신 에피소드와 캐릭터들을 잘 살려낸 경우입니다. 죽음을 앞둔 노인의 사랑이라는 단순하면서도 젊은 관객에게 전혀 어필할 수 없을 것 같은 내용을 가졌지만 그러한 노인들의 에피소드와 캐릭터를 원작 그대로 가져와 영화 속에서 꼼꼼하게 표현해내며 기대이상의 흥행을 거둔 것이죠.
안타깝게도 [통증]은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아닌 [바보], [순정만화]의 길을 따릅니다.([아파트]는 영화를 보지 못했기에 제외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남순과 동현의 사랑이라는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은 충실히 따라가지만 강풀 특유의 캐릭터는 많이 훼손된 듯하기 때문입니다.
난 그들의 과거가 더 아플 것 같다.
원작 자체가 없는 영화에서 원작과 비교해서 아쉽다는 하는 것은 굉장히 우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강풀의 원안을 토대로 한 영화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분명 강풀의 원안에는 자신이 음료수를 쏟는 바람에 가족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남순의 죄책감을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세세하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남순의 죄책감은 영화에서도 어느 정도 표현이 되는데, 자신을 챙겨주던 누나를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누나의 이름을 갖고 살아가는 남순의 모습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러닝타임을 위해 남순의 과거는 최소화됩니다. 통증을 느낄 수 없었기에 사회에서 괴물 취급을 받았을 것이며, 고아가 된 그를 챙겨준다면서 그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가게를 하면서도, '난 할만큼 했다'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친척들에 의해 그의 삶은 무미건조해졌을 것입니다. 그러한 남순의 과거만으로도 수 많은 에피소드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에피소드들은 남순의 캐릭터에 완성도를 가져옴과 동시에 동현과의 사랑에 집착하는 남순의 마지막 선택에 좀 더 관객의 눈물을 뽑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남순은 나은 편입니다. 플래쉬백으로 가족의 죽음 장면도 짧지만 등장했고, 고등학교 시절 괴물 취급을 받았고, 문제 학생을 찍혀 소년원에 간 것도 과거도 남순의 고백으로 표현되었으며, 친척들의 뻔뻔스러움도 늦게나마 보여줬으니 말입니다.
아쉬운 것은 동현의 과거입니다. 선천적인 혈우병으로 정상적인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없었고, 어린 시절 부모를 병으로 잃었고, 병원비로 인하여 빚더미에 앉은 그녀는 병원에 가면 모두 죽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혈우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병원가기를 거부합니다.
결코 남순과 비교해서도 적지 않은 과거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을텐데, 그런 과거는 그녀의 짧은 고백으로 처리되고, 너무 짧고 비중없게 처리된 탓에 이유없이 낙천적이고, 이유없이 세상에 당당한 그녀의 엉뚱한 캐릭터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어 아쉬웠습니다.
마지막 장면의 슬픔이 좀 더 강렬하려면 범노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사정도 넣었어야 했습니다. 범노는 그저 모든 캐릭터가 생략당한채 남순을 이용하기만 하는 이기적인 캐릭터로 그려지는데 조연 캐릭터도 세세하게 배려하는 강풀의 특성대로라면 남겨진 범노의 후회와 죄책감으로 후반부는 장식되어야 했습니다.
[통증]은 개인적으로 꽤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강풀의 원작을 영화화한 이전 영화들이 했던 실수를 반복하면서 더 재미있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어쩌면 곽경택 감독의 마초적 감성은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TV 드라마 '거친 인생'에 더 어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통증]은 '거친 인생'이 아니다.
마초 남순이 아닌 이별로 인한 통증에 어쩔줄 모르는 남순을 그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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