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팀 버튼
주연 : 이완 맥그리거, 알버트 피니, 빌리 크루덥, 제시카 랭
개봉 : 2004년 3월 5일
관람 : 2004년 3월 5일
전 팀 버튼 감독을 좋아합니다. 그의 상상력이 좋고, 그의 재기발랄함이 좋습니다. 우연히 비디오로 보게된 [유령수업]에서부터 그를 좋아하기 시작해서 [배트맨], [가위손], [배트맨 2]를 거치며 그의 매니아가 되었고, [에드우드], [화성침공], [슬리피 할로우]를 보며 그의 영화에 점점 빠져들었습니다. 물론 그의 영화중에서도 재미없었던 영화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혹성탈출]입니다. 기대가 컸던만큼 실망도 컸었죠. 하지만 [빅 피쉬]는 [혹성탈출]의 아쉬움을 단번에 날릴만한 영화이며, '역시 팀 버튼이다'라는 찬사가 나올만한 영화입니다.
솔직히 [빅 피쉬]는 팀 버튼답지않은 영화입니다. 팀 버튼 감독하면 독특한 상상력과 어두컴컴한 화면, 그리고 현실을 비꼬는 유쾌한 냉소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도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그의 대표작인 [배트맨]은 헐리우드의 블럭버스터를 완벽하게 비꼬는 영화였습니다. 밝고 당당하게 악당을 쳐부수던 다른 블럭버스터의 영웅들과는 달리 자신만의 공간에 숨어 과거의 기억에 괴로워하며 고담시라는 암울한 도시에서 악당들과 힘겹게 맞서던 배트맨의 모습은 팀 버튼의 영화 스타일을 관객의 뇌리속에 깊게 박아 놓았습니다. 물론 그러한 [배트맨]의 모습은 3편과 4편에서 조엘 슈마허 감독의 손을 거치며 다른 블럭버스터의 영웅들과 비슷한 모양새로 바뀌어 갔지만 관객들은 조엘 슈마허의 동화적인 [배트맨]보다는 팀 버튼의 암울한 [배트맨]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팀 버튼의 매력을 인정해 주었죠.
[배트맨]으로 헐리우드의 블럭버스터 영웅들을 냉소적인 자세로 비꼬았던 팀 버튼 감독은 [가위손]으로 이번엔 헐리우드의 동화적인 멜로 영화를 비꼬았습니다. 완벽한 외모를 지닌 선남선녀의 연애담을 배척하고 가위손을 가진 흉칙한 에드워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외모지상주의로 흐르던 헐리우드의 멜로 영화에 대한 완벽에 가깝게 반기를 들은 영화였던 셈입니다.
그에 비해서 [빅 피쉬]는 유쾌하고도 날카로운 팀 버튼식 냉소가 전혀 없습니다. 이 영화엔 냉소보다는 온화한 미소가 느껴지기까지합니다. '뭐야! 팀 버튼도 이젠 변해버린거야? 시시해!'라고 투덜거리시는 분이 계시다면 팀 버튼의 필모그래피를 다시한번 꼼꼼히 살펴봐야 합니다. 그는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고 이미 10년전부터 변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그런 근거없는 말을 하는 이유는 바로 [에드우드]때문입니다. 팀 버튼의 영화중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이 영화는 그러나 팀 버튼의 영화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수작입니다. [에드우드]는 헐리우드 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꼽히는 실존 인물인 에드우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계 최고의 영화 감독을 꿈꾸었던 에드우드는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을 가진 몽상가였으며, 여성복장을 몰래 입고 다녔던 복장도착증 환자였습니다. 그는 평생 B급 호러 영화를 만들며 미국 비평가들에게 세계 최악의 감독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에드우드]에서 팀 버튼 감독은 지금까지의 그 유쾌한 냉소를 버리고 에드우드에게 따스한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물론 에드우드가 헐리우드 영화 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손꼽히는 오손 웰즈와 만나는 장면을 통해서 영화에 대한 사랑과 순수한 열정을 가진 감독들을 자신만의 잣대로 최고와 최악의 감독으로 순위를 메기는 비평가들을 날카롭게 비꼬았지만 이역시도 그의 이전 영화같지는 않게 점잖고 우아했습니다. 그리고 에드우드 감독에게 경의를 바치듯이 자신의 차기작도 마치 에드우드의 B급 호러 영화같은 [화성침공]을 감독한 것입니다.
물론 [슬리피 할로우]에서는 [화성침공]과는 달리 세련된 호러 영화의 진수를 보여줬으며, [혹성탈출]에서는 마치 헐리우드의 제도권에 진입하려는 가장 팀 버튼답지않은 터무니없는 연출력을 보여줘 관객을 실망시켰지만, [빅 피쉬]에 와서는 [에드우드]에서부터 준비했던 따뜻함이 느껴지는 진정한 팀 버튼식 휴먼 드라마로 복귀한 것입니다.
헬레나 본햄 카터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팀 버튼 감독은 이제 [빅 피쉬]를 통해 '헐리우드의 악동'이라는 수식어를 벗어던지고 가슴에서부터 우러나는 가슴 따뜻한 감동을 관객에게 선사할 수 있는 진정한 거장으로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팀 버튼 감독이 변해버려서 시시하다고요? 아니 팀 버튼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성숙해진 것입니다.
[빅 피쉬]에서 팀 버튼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던 냉소와 암울한 영상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가 변한 것이 아니고 성숙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빅 피쉬]가 팀 버튼의 능력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여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독특한 상상력입니다. 물론 [빅 피쉬]의 상상력은 그의 이전 영화들과는 달리 다니엘 웰리스의 원작 소설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팀 버튼은 이 원작 소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벽하게 재탄생시킵니다.
사실 애초에 이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서 영화화될 운명이었다는 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어쩌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게 더 잘 어울렸을 영화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면 [빅 피쉬]는 좀 더 밝아졌을 것이며, 좀 더 유쾌해졌을 것이고, 좀 더 거대해졌을 겁니다. 어쩌면 [빅 피쉬]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 블럭버스터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팀 버튼 감독은 이 영화를 블럭버스터와 같은 거대한 영화로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영화의 규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영화의 진실함이라고 믿는 듯이 보입니다. 그가 캐스팅한 배우들을 살펴보면 그러한 팀 버튼 감독의 의지가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빅 피쉬]에는 스타급 배우보다도 연기를 정말 잘하는 배우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주연급 배우는 이완 맥그리거뿐입니다. 하지만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의 순으로 나열을 해본다면 이완 맥그리거는 오히려 뒤에 쳐질 정도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스타일을 완벽하게 연기할 배우들을 불러모은 팀 버튼 감독은 그만의 놀라운 상상력을 맘껏 발휘하며 [빅 피쉬]를 놀라운 영화로 만들어 냈습니다.
이 영화의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화면이 밝아졌을뿐 캐릭터는 팀 버튼의 이전 영화와 동일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검은 안대로 감춰진 유리눈알을 통해 상대방의 죽는 순간을 보여주는 마녀, 어마어마한 거인과의 여행, 천국과도 같은 유령 마을과 말못할 비밀을 감추고 있는 한 남자가 거느리고 있는 서커스단, 그리고 하체가 하나로 붙은 샴쌍둥이 동양계 미녀 여가수 등등... 하나같이 비정상적인 이 영화속 캐릭터들은 팀 버튼의 독특한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재탄생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상적인 캐릭터들이 팀 버튼의 이전 영화들과 다른 것은 현실에 대한 냉소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닌 진정한 감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라는 사실입니다. 아들 앞에서 진정 영웅으로 보이고 싶었던 아버지의 심정을 팀 버튼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비정상적인 캐릭터와 함께 [빅 피쉬]속에 그려 넣은 것입니다. 저도 아버지의 입장이기에 윌리엄이 아버지의 거짓말을 이해하는 후반부 장면에선 정말 가슴 깊은 곳에서 미묘한 울림이 퍼져 나왔습니다. 어쩌면 저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아버지의 슬픈 자화상일지도 모른다고... 진정한 영웅이 없는 현실 세게에서 아들에게 만큼은 영웅의 모습으로 보이고 싶은 우리 시대 아버지의 슬픈 자화상...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의 거짓말속 인물들이 하나둘씩 장례식장에 몰려오는 장면에선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훈훈함이 느껴졌습니다.
팀 버튼... 저는 아직도 그를 좋아합니다. 비록 그의 악동적인 상상력에 매료되어 처음 그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진정한 감동을 그려낼줄아는 거장의 모습으로 그를 좋아합니다. 이제 몇년있으면 저 역시도 제 아들에게서 그의 영웅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쉽진 않겠죠. 힘든 샐러리맨의 빠듯한 생활로는... 어쩌면 그것이 우리 시대 아버지의 슬픈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꿋꿋이 짊어지고 나갈렵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운명이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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