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정소동
주연 : 스티븐 시걸, 바이런 만
개봉 : 2004년 2월 20일
관람 : 2004년 2월 19일
'씨네통'이라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다른 영화 사이트와 비슷한 분위기의 '씨네통'은 그러나 한가지 색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게릴라 시사회입니다. 게릴라 시사회는 시사회 당첨을 다른 영화 사이트의 랜덤 추첨 방식이 아닌 선착순입니다. 시사회에 당첨되려면 게릴라 시사회 신청 예정일날 아침부터 '씨네통'에 접속하여 계속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며 시사회 신청하는 순간을 끈질기게 기다렸다가 시사회 신청이 시작하자마자 신청버튼을 재빠르게 눌러야 합니다. 전 이 게릴라 시사회로 [베이직]을 봤지만 단 십분동안 딴청하다가 정말로 보고 싶었던 [안녕! 유에프오]와 [빅피쉬]의 게릴라 시사회는 놓쳐버렸었죠.
그날도 [스쿨 오브 락]의 게릴라 시사회에 응모하려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씨네통'에 접속하여 일하는 중간중간 새로고침 버트을 누르며 게릴라 시사회 신청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기다리는 [스쿨 오브 락]의 게릴라 시사회는 안하고 [사무라이]의 게릴라 시사회만이 아침일찍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왠만한 게릴라 시사회는 그야말로 몇분 몇초만에 마감되는 것이 다반사인데 [사무라이]는 인기가 없는지 몇시간이 흐르도록 마감될 기미가 보이지 않더군요. 충동적으로 [사무라이]의 게릴라 시사회 신청 버튼을 누르고 싶었지만 [사무라이]의 게릴라 시사회날은 [붙어야산다]의 시사회날이었기에 일찌감치 포기했었죠.
기다림이 서서히 지칠때쯤 저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스쿨 오브 락]의 게릴라 시사회 시간이 글쎄 오후 1시였던 겁니다. 백수가 아닌다음에야 참석할 수 없는 시간이죠. 전 시간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게릴라 시사회 신청을 하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또다시 [스쿨 오브 락]을 포기해야햇던 그 순간 [벨리 오브 비스트]의 게릴라 시사회가 오픈이 되었습니다. 스티븐 시걸의 영화를 극장에서 본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저는 [벨리 오브 비스트]가 그리 끌리지는 않았지만 [천녀유혼], [동방불패]의 정소동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점과 [스쿨 오브 락]을 볼 수 없다는 허탈감이 결국 [벨리 오브 비스트]라도 보자는 마음에 그만 시사회 신청 버튼을 누르고 말았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제 행동에 후회를 하기까지는 정확히 하루하고 반나절이 걸렸죠. ^^;
[벨리 오브 비스트]는 스티븐 시걸의 영화입니다. [형사 니코]에서부터 시작한 스티븐 시걸의 영화는 한결같이 규모가 작은 B급 액션 영화였습니다. 그는 연기 변신을 한다며 갑자기 진지한 영화에 출연을 한적도 없고, B급 액션 영화가 아닌 다른 장르의 영화에 출연한적도 없습니다. 그저 한결같이 B급 액션 영화의 길만을 걸어왔죠. 그런 그에게 B급 액션 영화 이상의 영화적 재미를 요구하는 것은 정말로 불합리합니다. 극장 좌석에 앉았건, 거실의 쇼파에 앉았건간에 그의 영화를 보기로 결심을 했다면 정확히 B급 액션 영화만큼의 기대를 해야만 하는 겁니다.
[벨리 오브 비스트] 역시 정확하게 B급 액션 영화입니다. 여전히 스토리 라인은 부실하고, 스티븐 시걸의 시원시원한 액션으로 90여분을 채우는 것으로 이 영화는 만족합니다. 하지만 [벨리 오브 비스트]가 B급 액션 영화임을 알고 딱 그만큼의 기대치를 안고온 저같은 관객들에게조차 이 영화는 꽤 곤욕스러운 영화입니다. 정소동 감독의 영화 스타일과 스티븐 시걸의 이미지가 영화내내 불협화음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정소동 감독... [천녀유혼], [동방불패]로 유명한 그는 제게도 홍콩 영화의 감독중 가장 좋아하는 감독으로 다섯손가락안에 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홍콩의 선배 감독들의 뒤를 이어 헐리우드에 데뷔하며 이전 감독들이 그러했듯이 B급 액션 영화로 헐리우드 신고식을 치뤘습니다. 하지만 장 끌로드 반담을 선택했던 오우삼([하드 타겟]), 임영동([맥시멈 리스크], [리플리컨트], [헬]), 서극([더블팀], [넉 오프])과는 달리 정소동 감독은 스티븐 시걸을 파트너로 선정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벨리 오브 비스트]는 홍콩 감독 특유의 동양적 액션과 스티븐 시걸 특유의 서구적 액션이 시종일관 부딪히며 관객들에게 실소만을 안겨줍니다.
솔직히 액션 스타일만 놓고 본다면 스티븐 시걸의 액션이야말로 동양적입니다. 가라데, 합기도등 동양 무술에 능통한 그의 액션은 정소동 감독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하지만 문제는 액션이 아니고 스티븐 시걸의 이미지입니다. 그의 액션은 동양적이지만 그의 이미지는 다분히 서양적입니다.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사건을 해결하는 그는 냉정하고 개인주의적입니다. 그러나 [벨리 오브 비스트]는 그렇지 않습니다. 딸의 납치사건을 해결하기위해 태국까지 날아온 전직 특수요원 제이크 후크는 전혀 스티븐 시걸의 이미지와 부합되지 않습니다. 스티븐 시걸의 무표정한 얼굴은 딸을 걱정하는 가정적인 중년 남성의 모습이 아닌 여전히 냉정한 특수요원의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영화 중간엔 태국 여성 룰루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시티븐 시걸의 키스 장면은 위험한 모험속에 핀 아름다운 사랑이라기 보다는 관객들에게 어이없는 실소만을 안겨주는 해프닝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소동 감독은 스티븐 시걸이 아닌 장 끌로드 반담을 캐스팅했어야 합니다. 그의 선배 감독들처럼 말입니다. 장 끌로드 반담의 액션은 스티븐 시걸에 비해 동양적이지 못하지만 그의 이미지는 다분히 가정적이며 다정다감한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스티븐 시걸이 악당에게 한대도 맞지 않고 거의 초인적인 힘으로 사건을 처리한다면 반담은 온갖 고생을 하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가까스로 사건을 해결합니다. 만약 이 영화에서 반담이 후크 역을 맡아 낯선 땅 태국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딸의 목숨을 구했다면 어쩌면 이 영화는 B급 액션 영화로 즐기기에 좋았을 겁니다. 영화 후반에 갑자기 튀어나와 많은 관객들을 웃겼던 주술 대결 장면도 차라리 반담이 주인공이었다면 이토록 웃기지는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무표정한 얼굴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스티븐 시걸은 헐리우드의 액션 영화에는 걸맞을지 모르지만 서양 감독들에 비해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양 감독의 영화엔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겁니다. 그렇기에 [벨리 오브 비스트]는 B급 액션 영화만큼의 기대치를 안고 갔던 제게도 그 기대치마저 채워주지 못한 아쉬운 영화였습니다.
IP Address : 218.237.133.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