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강제규
주연 : 장동건, 원빈, 이은주
개봉 : 2004년 2월 5일
관람 : 2004년 2월 14일
최단기간 전국 300만 돌파라는 [태극기 휘날리며]의 흥행 신기록 소식을 듣고 전 은근히 불안해 졌습니다. 그것은 흥행 신기록을 달성하는 한국 영화는 왠일인지 극장에서 볼 수 없었다는 지금까지의 징크스때문입니다. [공동경비구역 JSA]도 그랬고, [친구]도 그랬습니다. 최근에는 전국 관객 1000만 돌파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달성중인 [실미도]까지도 아직 극장에서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같이 볼 사람이 없어서 극장에서 보지 못한 경우이지만, [친구]와 [실미도]는 왠지 보고 싶지 않아서 극장에서 보지 않은 경우입니다. 우리 영화라면 헐리우드 영화보다 더 자주 극장에서 보는 편이지만 [친구]와 [실미도]같은 대형 흥행작은 왠지 극장에서 보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정말 특이하죠?
솔직히 [태극기 휘날리며]도 그리 극장에서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워낙 전쟁 영화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은주라는 제가 좋아하는 배우의 출연과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 보아왔던 헐리우드의 영웅주의식 전쟁 영화가 아닌 전쟁의 비정함과 아픔을 다룬 진정한 전쟁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결국 오랜 징크스를 깨고 절 극장으로 인도했습니다.
토요일 아침... 늦잠을 자야 마땅할 휴일에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요즘 구피는 극장비 아낀다며 조조로 영화표를 끊는 답니다. ^^;) 극장으로 향하는 제 마음은 여전히 반신반의였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어느사이 제 뺨에 흘러내리는 굵은 눈물을 느끼며 드디어 제게도 좋아하는 전쟁 영화 한편이 생겼다는 묘한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전 전쟁 영화를 싫어합니다. 매번 전쟁 영화를 보고 똑같은 소릴 하지만 전쟁 영화는 정말로 뻔뻔합니다. 전쟁이라는 상황을 이용해서 나쁜편과 좋은편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편을 가르고는 좋은편이 나쁜편을 죽이는 것에 재미를 느끼라고 관객들에게 강요합니다. 전쟁 그 자체가 나쁜 것임을 이들 영화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정의를 위해서라면 전쟁은 어쩔수없는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를 내세웁니다. 그리고 그 위에 관객이 좋아할만한 영웅이라는 존재를 세워놓고 관객들의 환호를 기다립니다. 도대체 좋은편과 나쁜편은 어떤 기준에서 갈라 놓은 것인지, 나쁜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의 엄격한 한사람의 생명을 그렇게 무차별하게 죽여놓고 영웅이되는 그들 영화를 저는 혐오합니다. 액션 영화라면 차라리 '그냥 영화니까'라고 생각하고 말테지만 전쟁 영화는 다릅니다. 전쟁 영화는 엄연하게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저는 전쟁 영화를 싫어합니다. 그것도 끔찍히...
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는 헐리우드의 전쟁 영화와는 전혀 틀립니다. 어쩌면 6.25 전쟁이라는 형제끼리의 비극적인 전쟁을 경험한 우리나라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영화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분단된 조국에 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오랜 세월동안 인류를 두편으로 갈라놓았던 사상이라는 장벽이 무너진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우린 아직도 분단된 조국위에서 서로를 애증이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냉전 시절... 우린 군사정권 아래에서 북한 사람들은 밤낮으로 매맞으며 일을 하는줄 알고 있었으며 모두들 굶주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산당은 사람의 모습이 아닌 늑대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똘이장군]이 제겐 가장 재미있는 만화 영화였습니다. 그렇게 커온 제게 [태극기 휘날리며]는 정말 대단한 영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6.25 전쟁을 흑과 백의 이분법적 접근이 아닌 전쟁으로 인하여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던 일반인들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엔 헐리우드 전쟁 영화가 만들어낸 흥행 조건인 영웅도 없고, 스펙타클도 없으며, 그로인한 영화적 재미도 없습니다. 그 점이 제가 이 영화를 지지하는 이유입니다.
1. 이 영화엔 영웅이 없다.
헐리우드 전쟁 영화를 보면 꼭 등장하는 것이 바로 영웅입니다.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며 동료를 구하고, 일당백의 정신으로 적군을 죽이고 조국의 위기를 구해내는 이들 전쟁 영웅은 헐리우드 전쟁 영화에서 꼭 등장하는 흥행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엔 전쟁 영웅 따위는 없습니다. 아니 있긴 하지만 그 영웅을 보며 관객들은 환호를 하기 보다는 오히려 안타까움만을 느낍니다. 동생인 진석(원빈)이 의용군으로 끌려가자 동생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 진태(장동건)는 태극훈장을 받으면 진석을 제대시켜준다는 대대장의 말을 믿고 훈장을 타기위해 스스로 전쟁의 영웅이 됩니다. 적군에 의해 고립된 아군의 위기를 용감하게 헤쳐나가고 적군의 대장을 목숨을 걸고 잡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진태의 모습을 보며 통쾌해하는 관객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진태는 영웅의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관객들은 헐리우드의 전쟁 영화속 영웅들을 보며 느꼈을 재미를 전혀 진태에게 느끼지 못한다는 겁니다.
강제규 감독은 전쟁 영화속의 영웅의 모습을 진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헐리우드의 전쟁 영화를 보며 환호했던 그 영웅들의 실상을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보여준 겁니다. 영웅이 되기위해 사람의 모습이 아닌 인간 백정이 모습이 되어버린 진태의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그동안 환호했던 영웅의 참모습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엔 영웅이 등장하지만 결코 그 영웅은 관객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적군이지만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죽인 그들을 우린 영웅이라 불러선 안되는 겁니다. 강제규 감독은 어쩌면 전쟁 영화속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적 재미를 스스로 잃어버리면서까지 진정한 전쟁 영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2. 이 영화엔 스펙타클이 없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제작비가 100억이 넘게 들어간 한국형 블럭버스터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어마어마한 제작비에 걸맞게 꽤 스텍타클한 전쟁씬으로 그동안 낙후했던 우리나라의 특수효과가 많은 발전을 했음을 입증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스펙타클은 다른 블럭버스터 영화와는 달리 스펙타클 그 자체에서 묻어나는 영화적 재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이 영화가 스펙타클하지만 진정한 스펙타클은 없는 이유입니다.
헐리우드가 전쟁 영화를 꾸준하게 만드는 이유는 전쟁 그 자체가 스펙타클하기 때문입니다. 대규모 전투씬 하나만으로도 관객들은 블럭버스터 영화의 묘미를 충분히 느끼고 환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연 전쟁 영화에서의 스펙타클에서 영화적 재미를 느낀다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우린 단지 극장에 앉아 그 스펙타클을 보고 즐기면 되지만, 실제로 그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전쟁의 스펙타클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수많은 전투기들이 폭탄을 투하하는 모습에서 우린 '우와~'하며 탄성을 지르면 되는 것이지만, 실제로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폭탄을 피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하는 겁니다.
그러한 이유로 저는 [태극기 휘날리며]의 스펙타클에서 전혀 영화적 재미를 느낄 수 없다는 사실에 만족합니다. 이 영화속 대규모 전투씬은 스펙타클에서 묻어나는 영화적 재미보다는 전쟁의 처참한 실상만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영화를 이 영화속 스펙타클을 즐기기 보다는 차라리 눈을 가려버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스펙타클로 인한 영화적 재미는 느끼지 못했지만 스펙타클로 인한 전쟁의 처참함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쟁 영화에서 스펙타클이 해야할 진정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영화적 재미가 없는 이 영화속 스펙타클을 저는 지지합니다.
3. 이 영화엔 나쁜편 착한편이 없다.
전쟁 영화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이 바로 적군과 아군의 이분법적인 분류입니다. 액션 영화엔 좋은편 나쁜편이 확실하게 가려지고 좋은편이 나쁜편을 때려부술때 관객들은 환호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전쟁 영화에서는 이런 이분법적인 분류가 가능한 것일까요?
지금까지 제가 봐온 수많은 전쟁 영화중에서 가장 나쁜편으로 많이 등장했던 세계 2차 대전의 독일군을 예로 들어보죠. 세계를 전쟁의 화염속에 몰고 가고 유태인을 무차별하게 학살한 나찌군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봐도 나쁜편일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나쁘다고해서 시대적 상황에 밀려 어쩔수없이 전쟁에 참가한 수많은 독일인들을 나쁜편으로 몰수는 없습니다. 그들도 엄연하게 전쟁의 피해자이며 시대의 피해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2차 세계 대전을 영화화한 전쟁 영화에서 독일군을 인간적으로 그린 영화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독일군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어 마땅할 나쁜편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멀리 갈것도 없이 이라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위해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이라크의 평범한 국민들입니다.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 정의를 위해서라며 전쟁을 일으키고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킨 미군을 과연 좋은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미국이 후세인을 축출하기 위해 벌인 전쟁에서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은 죽음을 당해야 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라크전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미군은 이라크를 구한 영웅이 되어 있을 것이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던 이라크인들은 나쁜편이 되어 있겠죠.
[태극기 휘날리며]에는 바로 이러한 이분법적인 극단적 분류가 없습니다. 북한군이라고 할지라도 전쟁에 희생된 가엾은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하고, 남한군들은 때때로 무고한 일반인들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악인이 되기도 합니다. 6.25 전쟁에 희생된 그 수많은 분들에게 나쁜편은 바로 북한군이 아닌 전쟁일 따름입니다. 이 영화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4. 이 영화에 대한 몇가지 변명들.
이 영화를 보고 실망을 하신 분들중에서 진태에겐 모든 총알이 살짝 살짝 피해간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과연 전쟁에서 살아남은 그 수많은 분들은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요? 그 분들은 전투가 벌어지면 안전한 곳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살아 남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들도 다른 분들과 똑같이 죽음과 삶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였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죽었고 어떤 분들은 살아 남으셨죠. 결국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천운이 따라야 하는 겁니다. 진태가 그 수많은 위기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비난하시는 분들은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분들을 비난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진태도 그분들처럼 천운이 따랐기 때문일 따름이니까요.(마지막엔 그 천운이 다해버렸지만...)
이 영화를 싫어하시는 분들중에서 재미가 없다고 투덜거리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재미가 없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헐리우드의 전쟁 영화처럼 영화적인 재미를 담보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기에 이 영화를 보고 재미를 느낀다는 것은 영화를 잘못 보는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며 재미보다는 안타까움을 느껴야 합니다. 차라리 고개를 돌리고 싶어버릴 듯한 안타까움... 생각하는 것조차 가슴이 아파 외면을 하고 싶은 안타까움... 6.25 전쟁이 재미거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이 영화도 재미있는 영화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한다고해도 우린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6.25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분들에게 이 영화의 안타까움을 느끼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6.25 전쟁을 경험하지 못해도 이 영화를 보며 한줄기 굵은 눈물과 안타까움을 느꼈다면 그것은 분명 옳바르게 이 영화를 본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영화의 형제애가 너무 오버스럽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동생을 위해 죽음을 무릎쓰고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진태의 모습이 오버스럽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 가족이라는 매개체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던 것임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가 그리 오버스럽지 않습니다. 확실히 가족보다는 개개인의 가치관이 중요한 지금과는 다른 시절이었으니까요. 진태의 형제애는 그러한 시대적 상황과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이 맞물려 비정상적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유일한 희망이 사라진후의 진태의 상황이 그렇기에 제겐 오버스럽다기 보다는 이해가 되었습니다.
글을 다쓰고나니 제 글이 조금은 공격적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마치 [태극기 휘날리며]를 싫어하시는 분들을 공격하는 듯한... 원래는 이런 식으로 글을 안쓰는데... 영화에 푹 빠져 지낸지 20여년동안 처음으로 제가 좋아하는 전쟁 영화를 만나게 된 기쁨으로 약간 오버한 것이니 [태극기 휘날리며]를 싫어하시는 분들의 오해가 없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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