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숀 엘리스
주연 : 숀 비거스테프, 에밀리아 폭스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능력으로 나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다.
1997년 쯤으로 기억됩니다. [캐쉬백]이라는 18분짜리 영국의 단편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대형 마트에서 일하는 벤(숀 비거스테프)이 힘들고 지루한 근무시간을 극복하기 위해서 시간이 멈추는 상상을 하게 된다는 설정을 지닌 이 영화는, 화가가 꿈인 벤이 멈춰진 시간동안 마트의 여성 손님들의 옷을 벗기고 그녀들의 나체를 그리는 장면으로 제 말초신경을 마구 자극했었습니다.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은 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남성들에게 성적 판타지를 제공했던 소재이고 [캐쉬백]은 그러한 성적 판타지를 짧은 시간 동안 강렬하게 표현해 냄으로써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러한 단편 영화의 성공으로 [캐쉬백]은 장편영화로 만들어져 국내에 개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스타가 출연하지 않는 영국 영화인 [캐쉬백]은 몇몇 마니아들의 호평을 뒤로 한채 쓸쓸히 개봉관에서 내려지게 되었고, 이 영화의 개봉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저도 집 근처 멀티플렉스에서 이 영화가 상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국 이 영화를 잊게 되었습니다.
알고보니 벤의 이야기는 섹스 코미디가 아니더라.
그렇게 4년이라는 세월동안 제게 잊혀졌던 [캐쉬백]을 뒤늦게 봤습니다. 3일 간의 연휴 동안 지치고 지친 내 심신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고르고 고른 영화인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단편 영화의 그 성적 판타지가 이 영화를 선택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를 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상 [캐쉬백]은 성적 판타지가 아닌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18분에서 1시간 40분이라는 거의 5배 이상으로 러닝타임이 늘어난 만큼 시간을 멈추는 능력(혹은 상상력)으로 좀 더 많은 성적 판타지를 제공해 줄 것이라 믿었는데 이 영화는 그러한 성적 판타지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아! 물론 그렇다고해서 이 영화에 실망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는 벤의 심리상태를 쫓아가며 그에게 시간이 멈춘다는 것에 대한 의미의 변화를 세심하게 잡아낸 아름다운 멜로 영화임과 동시에 바보같은 조연 캐릭터를 동원한 웃기는 코미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1시간 40분 동안 저는 유쾌하게 웃으며 벤의 마법같은 사랑으로 심신의 휴식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시간을 멈추는 것에 대한 의미의 변화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벤의 심리 변화였습니다. 연인인 수지와의 이별 이후 불면증에 시달리는 벤은 잠을 못 이루는 시간을 활용하고자 대형 마트의 야간 타임에 일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지루한 근무 시간은 벤에게 수지를 잊기 위한 시간을 제공하기 보다는 오히려 수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를 더욱 괴롭힙니다.
마트에서 직원들이 이 지루한 근무 시간을 빨리 보낼 각자의 방법을 강구하는 것과 같이 벤 역시 시간이 멈춘다는 상상으로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법을 찾아냅니다. 이렇게 초반 벤에게 있어서 시간이 멈춘다는 것은 수지가 없는 무의미한 시간에 대한 은유입니다.
하지만 그가 직장 동료인 샤론(에밀리아 폭스)에게 새로운 감정을 느끼며 모든 것이 변합니다. 샤론이 벤과 수지의 사이를 의심하는 그 순간 벤은 시간을 멈추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을 멈출 뿐,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죠.
무의미한 시간을 은유했던 시간을 멈추는 능력은 그 순간부터 2초라는 아주 짧은 순간에 벌어진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는 아주 긴 아픔의 시간이 되어 버립니다.
마법같은 사랑,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이 되면 시간을 멈추는 능력은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환희의 순간이 됩니다. 눈이 내리는 거리에서 멈춘 시간 속에 단 둘이 거리를 걷는 벤과 샤론의 모습은 그 어떤 로맨틱 영화보다 아름다운 마법같은 장면이었습니다.
이별의 앞에선 벤에게 시간을 멈추는 것은 무의미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새로운 사랑을 만났지만 오해로 인하여 짧은 이별을 맞이한 순간에는 아픈 후회의 시간이었으며,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그 순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환희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시간이 멈추는 능력을 성적 판타지로 활용했던 단편 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는 벤의 감정 변화를 통해 같은 능력이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 순간을 마법과 같은 영상미로 잡아냅니다.
그러한 숀 엘리스 감독의 섬세한 상상력은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이라는 소재로 성적 판타지만 상상했던 저를 상당히 창피하게 만들더군요. 뭐 변명을 하자면 이건 모두 성적 판타지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단편 영화와 멈춰진 시간 속에 마트에서 옷이 벗겨진 한 여성의 모습을 담은 야한 포스터 탓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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