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천녀유혼] - 영채신을 버리고 연적하를 선택하다.

쭈니-1 2011. 5. 18. 12:49

 

 

감독 : 엽위신

주연 : 유역비, 고천락, 여소군

개봉 : 2011년 5월 12일

관람 : 2011년 5월 17일

등급 : 12세 이상

 

 

내게 [천녀유혼]은 최고의 판타지였다.

 

제가 중학생이었던 1980년대 후반은 홍콩 영화가 대세였습니다. 그땐 모두들 주윤발의 쌍권총에 환호했고, 장국영의 우수에 찬 표정에 가슴앓이를 했었습니다. 저 역시 그 대열에 합류하였는데, 한양대학교 후반에 자리잡은 한양극장이라는 3류 극장에서 동시 상영되는 홍콩 영화들을 보는 것이 제겐 커다란 즐거움이었습니다. 

그 시절 봤던 영화들은 지금도 전설이 된 [영웅본색], [첩혈쌍웅], [지존무상] 등 홍콩 느와르 영화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제겐 역시 [천녀유혼]이 최고의 영화였습니다. 왕조현과 장국영의 매력이 빛났던 [천녀유혼]은 사나이들의 의리를 강조하던 홍콩 느와르 영화들 사이에서 고전적인 분위기와 귀신과 사람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가슴 아픈 소재로 제 사춘기 감수성을 마구 자극했었습니다.

그렇게 제 사춘기 시절 최고의 판타지였던 [천녀유혼]이 리메이크되었습니다. 물론 [천녀유혼]의 대히트로 [천녀유혼]은 3편까지 제작되었고, 수 많은 아류작이 범람했으며, 급기야는 서극 감독에 의해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원작의 리메이크를 선언한 영화는 없었기에 기대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왕조현과 장국영은 당시 대세였다.

 

연적하의 캐릭터가 강화되었다.

 

추억의 영화가 다시 리메이크된다는 것에 대한 기대와 걱정으로 보게 된 [천녀유혼]은 원작의 단순한 리메이크가 아닌 원작의 재구성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물로 연적하라는 캐릭터가 강화되었습니다.

연적하는 원작에서도 퇴마사로 등장하여 어리버리한 영채신을 도와 주며 영채신과 섭소천의 사랑을 지켜주는 중요한 조연 캐릭터였습니다. 하지만 [천녀유혼]에서는 아예 그를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그렇게 주연으로 격상된 연적하는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섭소천과의 이룰 수 없었던 아픈 사랑을 통해 원작을 기억하는 제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일단 저는 그러한 변화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며 영화의 초반을 감상하였습니다. 주연 캐릭터를 다양화하며 영채신과 섭소천의 사랑이라는 단순한 스토리 라인을 영채신과 연적하, 그리고 섭소천의 삼각관계라는 원작에 비해 조금은 복잡해진 관계로 만들어 냈다는 것은 이 영화가 단순히 추억의 영화를 읅어 먹을 심보가 아님을 증명한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엽위신 감독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연적하... 용됐다.

 

 

영채신의 등장부터 기대는 걱정으로 바뀌고...

 

하지만 [천녀유혼]에 대한 제 박수는 그리 길게 가지 못했습니다. 영채신이 등장하며 불안감이 엄습했던 것입니다.

분명 원작에서도 영채신은 약간은 어리버리한 캐릭터였습니다. 수금을 받으러 다니는 처지이면서 수금 장부가 비에 젖어 수금을 받기는 커녕 숙박할 곳도 찾지 못하고 결국 마을 장의사가 알려준 난약사에 오게 됩니다. 그는 겁이 많고 허약하지만,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선량했습니다.

[천녀유혼]의 영채신도 얼핏 보면 원작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의 위상은 원작에 비해 높아졌습니다. 정부의 관리라는 어엿한 직업도 있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대인이라며 아부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원작의 영채신이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다시피해서 난약사에 간 것과는 달리 [천녀유혼]의 영채신은 마을 사람들의 환호에 영웅심이 발동하여 '물줄기를 찾지 못하면 산에서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허영심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영채신의 허영심은 원작의 영채신과의 차별점인데... 문제는 바뀐 영채신이 영 제 마음에 와닿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배우의 매력이야 당연히 여소군이 장국영을 따라올 수 없는 것은 예견한 일이었지만 캐릭터마저 원작에 비해 매력적이지 못하니 정말 실망스럽더군요.

 

   같은 듯 다른 영채신... 장국영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차라리 프리퀼로 만들지 그랬냐?

 

원작의 가장 큰 매력은 섭소천과 영채신의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천녀유혼]은 연적하의 캐릭터를 강화하면서 오히려 영채신의 캐릭터를 둿전으로 내몹니다. 영화의 초반부는 연적하와 섭소천의 사랑으로 열었지만 중반까지 원작 그대로 영채신과 섭소천의 사랑을 그려나가던 이 영화는 후반부에 가서는 애초에 그리고 싶어 했던 연적하와 섭소천의 사랑으로 급선회합니다.

그러한 이 영화의 선택은 영채신의 사랑도, 연적하의 사랑도, 저를 공감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후반부가 되면 될수록 점점 캐릭터가 약해지는 영채신은 그렇다쳐도 리메이크를 하며 새롭게 부각시킨 연적하의 사랑마저 저를 공감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지닌 가장 커다란 문제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연적하와 섭소천의 사랑이 부각되던 후반부를 보며 저는 차라리 이 영화가 [천녀유혼]의 프리퀼로 만들어졌어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연적하와 섭소천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한 편의 영화로 만들고, 그 이후에 [천녀유혼]의 리메이크를 만들었다면 최소한 연적하와 섭소천의 사랑에 공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프닝에서 잠깐의 장면만으로 연적하와 섭소천의 사랑을 표현하고 끝내기엔 그들의 사랑은 이 영화 전체에서 너무 중요한 부분이었기에 영화 자체가 공감되지 않고 어정쩡하게 느껴졌습니다.

 

영채신의 사랑보다 중요한 연적하의 사랑.

주객이 전도되었지만 그 전도된 주객도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원작 팬에 대한 배려가 아쉽다.

 

[천녀유혼]이 원작을 리메이크한 것에 그치지 않고 원작을 새롭게 구성한 점은 높이 살 만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새롭게 구성된 것들이 그다지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영채신을 버리고 연적하를 사랑의 주인공으로 선택했지만 짧은 러닝타임 동안 연적하와 섭소천의 사랑은 충분히 설명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이 영화에 대한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데... 저와 같은 원작의 팬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원작을 새롭게 구성한 만큼 원작의 열혈 팬들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학창 시절의 추억을 안고 극장을 찾은 저와 같은 관객층도 어느 정도는 포용했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배려는 원작을 새롭게 구성했어도 충분히 이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 경우는 원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이 섭소천이 영채신을 숨겨주는 장면입니다. 목욕통에 숨어 있던 영채신이 숨을 쉬기 위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 때, 섭소천은 영채신의 존재를 들킬까봐 키스(인공호흡)를 하며 영채신을 다시 목욕통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 명장면은 리메이크에서는 영채신이 죽은 척하고 파리가 그의 얼굴을 왔다갔다하는 장면으로 우스꽝스럽게 재현되었는데 영화를 보며 추억의 명장면이 어떻게 해서든 나올 것이라 기대했던 제게 실망감만 안겨줬습니다.  

 

이 장면은 당시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원작의 팬을 조금만 배려했다면 충분히 재현될 수 있었을텐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역비의 재발견이다.

 

텅빈 극장에서 저 혼자 영화를 봤습니다. '장국영을 영원히 기억하며...'라는 마지막 자막과 함께 원작의 주제곡이 장국영의 목소리로 흘러 나왔습니다. 솔직히 이 영화의 원작 팬에 대한 배려는 딱 그것 뿐입니다. 장국영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천녀유혼]의 음원은 다음 뮤직에 없더군요. 꼭 배경음악으로 깔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그래도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점은 섭소천을 연기한 유역비입니다. 원작의 섭소천과는 달리 밝고 신세대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새로운 섭소천의 모습은 이 영화가 원작을 리메이크하며 유일하게 잘한 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원작의 섭소천은 양가집 규수였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일가족이 죽음을 당했고, 섭소천의 유골은 천년 묵은 나무에 묻히는 바람에 천년 묵은 나무 요괴에 잡히고 맙니다. 그렇기에 왕조현이 연기한 원작의 섭소천은 비록 남자를 유혹하는 요괴이지만 청초하고 정숙한 여인의 향기가 풍겼습니다.

하지만 [천녀유혼]의 섭소천은 여우 요괴입니다. 한편으로는 사탕을 좋아하는 아기 여우처럼 귀엽고, 한편으로는 여우답게 요염하며, 한편으로는 신세대답게 당찹니다. 왕조현과는 사뭇 다른 매력을 풍기는 유역비는 그런 신세대적 섭소천을 잘 표현해냈습니다. 그런 유역비를 보는 재미로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왕조현이 그리운 것은 어쩔수 없지만,

유역비는 왕조현과는 다른 매력의 섭소천을 창조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