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박훈정
주연 : 박희순, 진구, 고창석
난 박훈정 감독이 굉장히 순진한 사람같다.
사극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혈투]는 은근한 기대작이었습니다. 하지만 감독이 박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박훈정... 그는 작년에 [부당거래]와 [악마를 보았다]의 시나리오를 통해 스타 시나리오 작가로 등극했습니다. 특히 [악마를 보았다]는 인간의 악마적인 본성을 잘 표현했다는 극찬을 받았고, 결국 그는 [혈투]의 메가폰을 잡으며 단번에 감독이 되는 행운까지 거머 쥐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부당거래]는 꽤 재미있게 봤지만 [악마를 보았다]를 보면서 시나리오가 잘 되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거든요.저는 박훈정 감독이 인간의 악마적 본능를 표현하고 싶어서 몸부림을 쳤지만 막상 영화에는 잘 표현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복수를 하겠다는 수현(이병헌)이 복수의 대상인 경철(최민식)을 그렇게 맘대로 돌아다니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되냔 말입니다. 경철에게 쫓기는 자의 두려움을 안겨 주고 싶다면 제한된 공간에 가둬놓고 조금씩 수위를 높이며 폭력을 가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었을텐데... 저는 오히려 [악마를 보았다]를 보고 나서 박훈정 감독이 굉장한 순진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적보다 두려운 아군을 만났다고?
[혈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의 기본 설정은 꽤 흥미롭습니다. 명나라의 강압으로 청나라와의 전쟁에 파병된 조선군. 오랜 친구 사이인 헌명(박희순)과 도영(진구)은 이 피 튀기는 전투 속에서 겨우 살아 남아 어느 버려진 객잔에 머물게 됩니다. 하지만 그 객잔엔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탈영한 조선군 두수(고창석)가 이미 와 있었습니다.
적지에서 아군을 만났다며 안심하는 세 사람. 하지만 속 마음은 달랐습니다. 도영의 아버지를 역적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했던 헌명과 그러한 사실을 눈치챈 도영, 그리고 자신이 탈영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죽음을 당할 것이라 생각하는 두수는 서로 살기 위해 아군을 죽여야 합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은밀히 아군을 죽여야 하는 이 세 캐릭터의 이야기는 잘 만 꾸민다면 연극적인 요소가 결합된 심리 스릴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순진한 박훈정 감독은 관객에게 재미를 줘야 겠다는 생각에 세 캐릭터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잡아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기만 합니다.
코믹 캐릭터 두수, 입 싼 캐릭터 헌명과 도영
[혈투]의 긴장감이 떨어진 가장 큰 이유는 두수라는 캐릭터 때문이었습니다. 코믹 조연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고창석은 자신의 명성 그대로 어둡기만 한 이 영화에 두수를 통해 한가닥 코믹한 기운을 불러 일으킵니다. 하지만 살아 남기 위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이 극한의 상황에서 고창석의 코믹한 연기는 마치 [황산벌]의 이문식이 떠오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헌명과 도영의 캐릭터도 긴장감이 떨어지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두 캐릭터는 형제같은 절친한 친구 사이입니다. 하지만 헌명은 몰락한 양반 가문으로 자신보다 능력이 떨어지지만 가문의 힘으로 자신보다 더 출세한 도영을 시기했고, 결국 그의 가문을 모함하여 몰락하게 만들었습니다.
헌명과 도영의 이 긴장된 관계는 헌명의 가벼운 입으로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거기에 발 맞춰 도영도 '사실 나도 알고 있었어.'라며 가벼운 입을 과시하는데, 그러한 입 싼 그들로 인하여 서로의 속내를 몰랐을 때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서로 죽고 죽이겠다는 아귀다툼만 남아 씁쓸했습니다.
과도한 플래쉬 백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박훈정 감독은 이 영화가 너무 어둡다고 생각했는지 영화 중간 중간에 과거 회상 장면을 넣어 밝음과 어두움을 대비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긴장할만 하면 밝은 장면이 튀어 나와 긴장감을 팍 풀어버리는 효과만 불러 일으켰습니다.
물론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플래쉬 백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캐릭터들의 내면과도 같은 어두운 화면이 자꾸 환하게 바뀌며 영화에 대한 집중력을 약화시켰습니다.
헌명과 도영 사이에서 끼어 이상한 오지랖을 펼치는 두수의 캐릭터는 후반부에서 완전 어이 없음이었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청나라군대 역시 영화의 긴장 구조를 확대시키긴 커녕 더욱 축소시키는 역할만 해냅니다.
[혈투]는 가장 친한 친구도 믿을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의 악마성을 드러내기 보다는 과도한 어두움과 제한된 연극적 상황 속에서도 관객들에게 영화적인 재미를 줘야 겠다는 박훈정 감독의 순진한 발상으로 오히려 영화의 재미가 반감되는 이상한 영화였습니다.
차라리 박훈정 감독은 자신의 순진함을 내세운 밝은 영화를 연출하는 것이 나을 듯 하네요. [악마를 보았다]의 과대 평가에 도취되어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영화는 이제 그만 뒀으면 좋겠습니다.
'아주짧은영화평 > 2011년 아짧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 나이스한 이별? (0) | 2011.04.21 |
---|---|
[굿모닝 에브리원] - 열정은 사람을 아름답게 한다. (0) | 2011.04.19 |
[내 이름은 칸] - 종교보다 사람이 먼저이다. (0) | 2011.04.05 |
[베니싱] - 여백이 너무 많다. (0) | 2011.04.03 |
[시간을 달리는 소녀] - 원작 소설,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0) | 2011.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