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킹스 스피치] - 조지 6세가 위대한 이유

쭈니-1 2011. 3. 23. 11:04

 

 

감독 : 톰 후퍼

주연 : 콜린 퍼스, 제프리 러쉬, 헬레나 본햄 카터, 가이 피어스

개봉 : 2011년 3월 17일

관람 : 2011년 3월 22일

등급 : 12세 이상

 

 

제 83회 아카데미의 최후 승자는 이 영화이다.

 

지난 2월 27일 열린 제 83회 아카데미 영화제는 세계 영화팬들에게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일각에서는 세계 영화제도 아닌 고작 미국내 영화제라고 아카데미 영화제를 평가절하하지만 세계 영화계에서 미국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한다면 아카데미 영화제에 대한 세계 영화팬들의 관심은 결코 과하지 않은 셈입니다.

암튼 제 83회 아카데미 영화제의 최후 승자는 [킹스 스피치]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킹스 스피치]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 주연상(콜린 퍼스), 각본상까지 알짜배기 4개 부문을 휩쓸었고, 아카데미의 전초전이라 불리우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킹스 스피치]를 제치고 드라마 부문 작품상을 수상했던 [소셜 네트워크]는 각색상, 편집상, 음악상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워낙 [소셜 네트워크]와 [킹스 스피치]가 박빙의 승부를 벌였기에 둘 중 어느 영화가 작품상을 타도 이변이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아카데미 위원회는 새로운 흐름인 '소셜 네트워크'의 성공담보다는, 세계 2차대전 당시 말더듬이라는 콤플렉스를 이겨낸 영국의 왕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므로, 한동안 변화가 감지되었던 아카데미의 보수성을 다시한번 확립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카데미 위원회가 [킹스 스피치]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킹스 스피치]는 참 영악하게 아카데미가 좋아하는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일단 장애를 딛고 일어선 인간 승리가 있고, 미국의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며, 관객을 감동시키는 마지막 연설까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쯤되면 철없는 천방지축 20대 젊은이  마크 주커버그의 성공을 담은 [소셜 네트워크]가 작품상을 타는 것이 이변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킹스 스피치]는 마치 아카데미를 위한 완벽한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은 꼭 극장에서 보겠다는 굳은 결심으로(작년 [허트 로커]는 결국 극장에서 놓쳤었습니다.) 퇴근 후 웅이한테 가지도 않고 곧장 극장으로 향한 저는 그토록 원했던 [킹스 스피치]를 드디어 봤습니다. 클라이맥스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잔잔한 스토리 라인 속에 약간의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카데미가 이 영화를 왜 선택했는지는 확실하게 확인하고 온 셈입니다.

 

 

당신의 콤플렉스는 무엇인가?

 

[킹스 스피치]는 말더듬이라는 콤플렉스를 지닌 알버트(콜린 퍼스)가 영국의 왕 조지 6세가 되는 과정을 그려낸 영화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는 알버트가 가지고 있는 말더듬이라는 콤플렉스입니다. 당시는 히틀러가 세계 2차대전을 일으키기 직전이었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왕의 역할은 영국 국민들에게 힘을 주는 멋진 연설을 하는 것인데 알버트는 그러기엔 치명적인 약점인 말더듬이였던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콤플렉스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동네 형한테 강가에서 수영을 배우다가 물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그 짧은 공포의 순간은 오랫동안 각인되었고, 결국 저는 아직도 수영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수영을 하지 못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물 알레르기 증상까지 보였습니다. 물에 오랫동안 들어가 있으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가렵더군요. 결국 저는 수영장은 물론 물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고, 동네 목욕탕도 가지 않을 지경이 되었습니다.(집에서 짧게 샤워만 합니다. 남들은 아들과 목욕탕가는 것이 로망이라던데 전 한번도 웅이와 목욕탕에 가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제겐 물에 오랫동안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바로 콤플렉스입니다.   

 

알버트는 말더듬이라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이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하지만 콤플렉스를 이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콤플렉스가 생긴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날의 상처를 치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물에 빠졌을 당시의 기억을 삭제하지 않는다면 물에 대한 콤플렉스가 쉽게 지워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알버트 역시 마찬가지인데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기술적으로 말더듬이를 고치려 하던 그의 시도는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고, 그러한 실패가 늘어나면 날수록 그의 콤플렉스는 더욱더 깊어지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라오넬 로그(제프리 러쉬)의 등장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그는 알버트의 말더듬이 치료에 기술적인 시도보다는 대화를 통한 두려움 극복에 좀 더 심혈을 기울입니다. 물론 알버트는 그러한 그의 치료법에 쉽게 동조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개인적 사생활이 낯선 남자에게 까발려진다는 것을 좋게 생각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을테니까요.

[킹스 스피치]는 알버트와 로그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점차 진정한 친구가 되며, 알버트의 말더듬이 병이 점점 고쳐지는 상황을 아주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진정한 치료는 바로 친구이다.

 

만약 [킹스 스피치]가 알버트 묘사에 좀 더 충실했다면 어쩌면 이 영화는 지금보다는 극적인 구성을 지닌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간질병 때문에 격리되었다가 어린 나이에 죽은 동생에 대한 슬픈 기억, 왕자라는 신분 때문에 친구도 사귀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내색도 할 수 없었던 상황, 자유분방하고 자신감 넘치는 형에 대한 열등감 등, 분명 알버트에겐 말더듬이라는 콤플렉스가 생길 수 밖에 없었던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킹스 스피치]는 그러한 것들에 애초부터 관심이 없습니다. 알버트가 말더듬이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알버트의 아주 짧은 대사 등으로 처리됩니다. 그 대신 이 영화가 공을 들여 표현한 것은 알버트와 로그의 관계입니다.

계속된 말더듬이 치료 실패로 인하여 치료사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던 알버트는 처음부터 로그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의 치료 방식을 불신했습니다. 하지만 로그는 끈기를 가지고 알버트와의 대화를 시도했고, 그의 마음의 문을 열었으며, 그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줬습니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위기도 찾아옵니다. 로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알버트는 그를 멀리 하기도 하고, 로그가 학위도 없는 무면허 치료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에 대한 신뢰도가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두 캐릭터 간의 갈등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 클라이맥스가 없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뭔가 두 캐릭터 간의 커다란 위기가 올 법도 한데 [킹스 스피치]는 그런 것 따위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완만하게,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알버트와 로그의 우정에 대해 이야기만 할 뿐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영화가 더욱 현실감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과도하게 꾸민 갈등 구조와 위기 상황 없이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두 캐릭터의 관계를 조명한 이 영화는 영화적 재미를 포기하고 현실적인 구성에 치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1억 3천만 달러가 훌쩍 넘는 흥행 수익을 기록한 것을 보면 미국 관객들에겐 이러한 현실적인 구성에 오히려 영화적인 재미를 찾았나봅니다. 하지만 영국의 왕실 이야기가 그저 먼나라 이야기에 불과한 제겐 그러한 현실적인 구성이 지루하기도 했습니다.

 

 

조지 6세가 위대한 이유.

 

그렇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 영화가 지루했습니다. 젊은 혈기가 느껴졌던 [소셜 네트워크]와 비교해서도 이 영화는 마치 노인의 느린 발걸음처럼 천천히 그리고 서두르지 않습니다. 빠른 편집과 강렬한 음악, 자극적인 스토리 라인에 익숙한 제게 [킹스 스피치]는 너무 느리고, 너무 평범하게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이 영화에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일단 저는 조지 6세라는 실존 인물에 대해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세계 2차대전이라는 현대사의 거대한 위기 속에서 처칠 수상처럼 엄청난 활약을 펼친 인물은 아닙니다. 그가 한,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이크를 잡고 국민 앞에 감동적인 연설을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자신이 해야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영국의 왕의 자리는 사실 유명무실합니다. [더 퀸]에서 블레어 총리는 영국 왕실을 영국인들의 값 비싼 소꼽놀이라며 비아냥거렸습니다. 사실 그러한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영국인들에게 왕의 존재는 그저 영국의 상징적인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8세(가이 피어스)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왕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영국인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랑도 맘대로 할 수 없는 왕의 자리. 그는 이 꼭두각시 자리를 스스로 박차고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꼭두각시라고 할지라도 누군가는 그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조지 6세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인디펜던트 데이]의 미국 대통령처럼 직접 전투기를 조종하며 전쟁의 한가운데에 뛰어 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허울뿐인 자리이지만 누군가 지켜야 하는 자리를 위해서 자신의 콤플레스를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아픈 과거사를 낯선 평민에게 말해야 하는 굴욕도 참아냈고, 마이크에 대한 공포심도 이겨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해야하는,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간혹 자신이 해야하는,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망각하고, 욕심을 부리고 권력을 남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리비아의 카다피가 그런 인물 중 하나일 것입니다. 조지 6세는 그러한 욕심을 버리고 허울 뿐인 왕의 자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이렇게 수수한 영웅 조지 6세를 그린 영화이니만큼 [킹스 스피치]도 결코 화려하지 않고 수수한 영화입니다. 그래서 지루하기도 했지만, 이 영화를 본 이후 여운이 남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에 필요한 대통령도 조지 6세같은 인물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해야하는,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대통령을 원한다는 것...

그건 과한 욕심일까?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