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사랑이 무서워] - 순진함과 멍청함의 차이

쭈니-1 2011. 3. 15. 17:31

 

 

감독 : 정우철

주연 : 임창정, 김규리

개봉 : 2011년 3월 10일

관람 : 2011년 3월 15일

등급 : 15세 이상

 

 

오늘은 민방위 날이다.

 

제가 거의 마지막(제 밑으로 몇 기가 더 있긴 하지만...) 동사무소 방위 출신입니다. 동사무소 방위의 주업무는 예비군 관리입니다. 그 중에서 저는 예비군 훈련에 불참하는 예비군들을 고발하는 업무를 맡았었는데, 그래서인지 방위 해제 이후에도 예비군 훈련만큼은 단 한차례도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임했습니다.

지금 저는 민방위 5년차입니다. 남들은 민방위 훈련은 대리출석시켜도 된다고 하던데, 동사무소 방위 때부터의 인식이 남아 있어서인지 저는 그렇게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민방위 훈련도 예비군 훈련과 마찬가지로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민방위 훈련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날짜는 3월 15일. 문제는 시간이었습니다. 훈련 시간이 오후 1시 30분부터 2시 30분까지더군요. 회사에 출근했다가 훈련 장소로 가기에도 빠듯했고, 훈련이 끝나고 회사에 복귀하기에도 어정쩡한 시간입니다.

결국 저는 오랜만에 하루간의 휴가를 냈고, 민방위 훈련이 시작하기 전에 영화나 보자는 심정으로 [사랑이 무서워]와 [파이터]를 보고 왔습니다.(사실 저희 동네 멀티플렉스에선 이 두 편밖에 볼 영화가 없었습니다.)

 

예비군 훈련은 그래도 덜한 편이지만 솔직히 만방위 훈련은 왜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도 영화를 연달아 두 편을 보는 바람에 훈련 장소에 10분 정도 늦었지만 모두들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는 분위기였고, 훈련이 시작하고 나서도 동사무소 직원들과 함께 차량 통제한다며 우두커니 15분간 서 있었던 것이 훈련의 전부였습니다.

회사 생활이 바쁜 와중에도 휴가까지 내며 민방위 훈련에 참가했지만 할 일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하품이나 하며 서 있는 것이 전부이니...

게다가 오늘은 훈련 시작하기 전에 저희 동네 동장이 '북한의 연평도 도발과 일본의 대지진 때문에 민방위 훈련이 강화되었다.'라고 연설까지 했는데 그러한 연설이 무색할 정도로 이번 민방위 훈련 역시 대충대충이었습니다.

한참 사회 생활로 바쁜 대한민국의 30~40대 남성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대충 대충 훈련을 해도 비상 사태가 발생하면 국민들이 잘 대처할 것이라 생각하는 윗 분들이 순진한건지, 멍청한건지, 잘 모르겠네요.

 

 

여기 순진한 척 하는 영화가 있다.

 

사실 제가 [사랑이 무서워]를 본 이유는 순전히 볼 영화가 없어서이기 때문입니다. 민방위 훈련 때문에 하루 휴가를 냈지만 요즘 너무 극장을 열심히 드나들었더니 볼 영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더군요.

임창정의 코미디는 2006년 [1번가의 기적]이후 단 한번도 극장에서 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코믹 연기에는 일가견이 있는 배우이니만큼 영화를 보는 동안이라도 맘껏 웃음을 줄 수 있다면 만족하겠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봤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저는 이 영화를 보며 단 한번도 맘껏 웃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임창정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버린 루저의 슬픈 코미디도 있고, 약간의 화장실 코미디와 김수미, 안석환을 내세운 명품 조연들의 코믹 연기도 간간히 터져 나오지만 [사랑이 무서워]는 지루하기만 했습니다.

도대체 문제가 무엇일까요? 저는 이와 비슷했던 [색즉시공]을 보며 정말 맘껏 웃으며 극장을 나왔었습니다. 하지만 '[색즉시공]의 은식이 대학에 졸업하여 사회인이 된다면...' 이라는 가정에서 시작하였다는 [사랑이 무서워]는 [색즉시공]과는 달리 전혀 웃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러한 [색즉시공]과 [사랑이 무서워]의 차이는 순진함과 멍청함에 있습니다.

 

[사랑이 무서워]의 상열은 변변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 홈쇼핑의 시식 모델입니다. 그러한 그가 홈쇼핑의 명품 모델 소연(김규리)을 짝사랑합니다. 하지만 소연에게 상열이 눈에 찰리가 만무하죠. 소연은 상열에게 말합니다. '상열씨는 참 순진한 것 같아요.'

이 이야기를 들은 포장마차의 주인(안석환)은 '여자가 남자에게 순진하다고 하는 것은 멍청하다라는 뜻이다.'라며 상열에게 충고합니다.

맞습니다. [색즉시공]의 은식이 순진했다면 상열은 멍청합니다. 은식은 사랑 앞에서는 답답할 정도로 순진했지만 그러한 순진함은 학생이기에 풋풋했고, 웃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루 하루가 경쟁인 사회라는 전쟁터에서는 순진함은 무기가 아닌 스스로를 옭아매는 덫이 됩니다. 특히 가족들을 부양해야할 가장이라면 더욱더...

물론 제가 여자이고, 제 앞에 비열한 박PD와 상열,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상열을 고르겠죠. 하지만 이 세상에 남자는 이 두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순진하다못해 멍청한 상열과 결혼하는 소연도, 대책없는 멍청함을 무기로 주인공 행세를 하는 상열도 더 이상의 웃음을 제게 안겨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연이 못 웃기니 조연이라도 웃기라고?

 

박PD의 아기를 가진 상태에서 상열과 결혼하는 소연. 이 어이없는 상황은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웃음과 연결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비극적인 소재일 뿐 코미디의 소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사랑이 무서워]는 다른 요소에서 이 영화의 정체성인 코믹함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도, 그러한 스토리 라인을 이끌어 나가야할 주인공도 웃길 수가 없으니 스토리 라인과 상관이 없는 부분에서 곁가지로 웃기려 하는 것이죠.

초반엔 어느 정도 성공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짧지만 아주 강렬한 한방을 날려주시는 상열 어머니 역의 김수미의 연기는 [사랑이 무서워]에서 유일하게 제게 웃음을 안겨줬습니다. 포장마차 주인 역의 안석환도 소소한 재미를 안겨주는데 중반 이후부터는 너무 자주 나와 식상하더군요.

조연들의 선전에 주연인 임창정과 김규리도 여기에 질 수 없다는 듯이 난데없이 화장실 코미디를 선보이는데 솔직히 아나콘다 똥 장면은 더럽기만 했을 뿐, 웃기지 않아 아쉽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이 무서워]의 코믹 전략도 곧 밑천을 드러냅니다. 상렬이 소연 뱃속의 아기의 비밀을 알게 되는 후반부 부터는 본격적으로 이 영화가 감동적인 마무리를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영화의 분위기 역시 코미디와는 어울리지 않게 축 쳐지는 분위기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조연을 이용한 코믹 상황도 점점 강도를 높입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여장을 한 김진수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배우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옷차림으로 등장함으로써 후반부의 축 처진 분위기를 끌어 올리려는 정우철 감독의 전략일 것입니다.

분명 김진수의 등장은 난데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절 웃기려 드는 것은 역시나 무리였습니다. 억지로 웃기기 위해 상열의 친구를 커밍아웃시키고, 김진수에게 여장을 시키며 닭살 연기를 뽑아냈지만 그러한 감독의 무리수는 웃기기 보다는 오히려 짜증이 나더군요.(마치 [할렐루야]에서 이휘재가 여장 연기를 했었을 때의 짜증남과 비슷했습니다.)

 

 

이 영화가 웃길 것이라 생각했던 감독의 순진함

 

[사랑이 무서워]는 순진함을 무기로 내세운 코미디 영화입니다. 순진하다 못해 멍청한 상열이 진심으로 소연을 사랑하고, 소연은 처음엔 미혼모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상열을 이용하지만 결국엔 상열의 순진한 사랑에 감복합니다.

이 영화는 너무나 전형적인 방법으로 스토리를 이끌어 나갑니다. 겉보기엔 완벽하지만 속은 비열하기 그지없는 박PD는 끝까지 악역을 자처하고, 박PD로 인하여 소연을 사랑하지만 소연 곁을 떠나야 했던 상열은 남 몰래 눈물지으며 소연의 곁을 맴돕니다.

만약 이 영화의 해피엔딩을 의심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이야 말로 순진한 것입니다. [사랑은 무서워]를 마치 대단한 비밀을 감춘 듯이 포스터에 '오매불망 그녀, 하룻밤(?)에 무너지다! 도대체 왜?'라며 낚시질을 하지만 너무 속이 뻔히 보여, 오히려 안쓰러운 마음에 낚시에 걸려들고 싶을 정도이며, 마지막엔 반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연의 생사를 숨기지만 그것 역시 이런 류의 영화를 자주 접하지 못한 순진한 관객이 아니라면 걸려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결국 정우철 감독은 순진함을 무기로 관객에게 재미를 주려 했지만 그것은 관객을 너무 순진하게만 판단한 오산으로 보입니다.

정우철 감독이 생각하는 것처럼 관객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습니다. 멀티플렉스 극장이 생기고 영화 관람은 이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예전과는 달리 수 많은 영화를 극장에서 간편하게 보는 관객들은 점점 영특해져 갑니다. 왠만한 낚시질에도, 왠만한 반전에도 속아넘어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영특한 관객들을 순진함만을 내세우며 극장으로 유혹하려고 한 정우철 감독이 순진해 보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순진함과 멍청함은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정우철 감독은 [사랑이 무서워]가 감독 데뷔작입니다. 데뷔작이니만큼 그의 연출력은 순진하다고 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번째 영화에서도 이렇게 대책없이 순진한 연출력을 보인다면 그땐 순진한 것이 아닌 멍청한 연출력이 될 것입니다. 대학생인 은식과 사회인인 상철의 차이처럼, 데뷔작을 연출한 초짜 감독과 데뷔를 마치고 두 번째 영화를 준비하는 감독은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정우철 감독의 순진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순진함이 장점이 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는 나도 아쉽다.

하지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순진함은 멍청함일 뿐이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나가야 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