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월드 인베이젼] - 외계인이 나온다고 전쟁 영화가 SF 영화되냐?

쭈니-1 2011. 3. 11. 11:21

 

 

감독 : 조나단 리베스만

주연 : 아론 에크하트, 미셸 로드리게즈, 브리짓 모나한

개봉 : 2011년 3월 10일

관람 : 2011년 3월 10일

등급 : 12세 이상

 

 

구피도 속고, 나도 속았다.

 

구피와 저는 영화 취향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역사극과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만 구피는 별로 좋아하지 않고, 저는 가끔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를 극장에서 보는 것을 즐기지만 구피는 그런 영화들은 집에서 비디오로 빌려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구피와 저도 영화 취향에서 공통점을 보이는 장르가 있는데 바로 판타지와 SF 영화입니다. 구피도 저도 초현실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셈입니다.

그런 면에서 [월드 인베이젼]은 참 헷갈리는 영화입니다. 외계 생명체의 지구 침공이라는 설정은 영락없이 구피와 제가 좋아하는 SF 영화로 보였지만, 영화의 예고편은 오히려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전쟁 영화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구피는 작년에 봤던 [스카이 라인]에 대한 안좋은 기억 때문인지 [월드 인베이젼]을 그다지 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구피에게 저는 저예산인 [스카이 라인]과는 달리 [월드 인베이젼]은 제작비가 1억 달러가 들어간 블록버스터이니 [스카이 라인]처럼 B급 향내가 풀풀 풍기진 않을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저 역시 [월드 인베이젼]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는 못했습니다.

 

암튼 우여곡절 끝에 [월드 인베이젼]의 국내 개봉날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도중 웃지못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영화 시작 20분 정도 지났을 무렵 구피는 제게 '그런데 그 잘생긴 배우는 언제 나와?'라고 묻더군요. 저는 '잘생긴 배우? 누구? 아론  에크하트는 저기 있잖아.'라고 대답했지만 구피는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아니, [아이 엠 넘버 포]에 나온 그 배우있잖아?'라며 계속 이해 못 할 질문만 하는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물어보니 구피는 우리가 보는 영화가 [월드 인베이젼]이 아닌 [비스틀리]인줄 알고 있었다네요. 제게 '난 [월드 인베이젼]은 안 본다고 했잖아.'라고 강하게 항의를 합니다. 제가 자신을 속여 억지로 [월드 인베이젼]을 보게 했다며 억울해 하더군요. 뭐 약간의 오해가 있었지만 어떻게 [월드 인베이젼]과 [비스틀리]를 헷갈릴 수 있는지... 구피도 참...

하지만 그런 구피를 비웃을 일은 아닙니다. 속은 것은 구피 뿐만 아니라 저 역시 마찬가지니까요.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이 영화, SF 영화야? 전쟁 영화야?'라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적을 외계인으로 설정한 것을 제외하고는 [월드 인베이젼]은 완벽한 할리우드식 전쟁 영화였습니다. 그것도 제가 가장 싫어하는 영웅주의 전쟁 영화말입니다. '내가 전쟁 영화는 싫다고 했잖아. 일부러 이 영화를 보게 하기 위해 교묘하게 SF 영화로 위장한거야?'라고 저 역시 [월드 인베이젼]의 감독에게 따지고 싶었답니다.

 

 

적이 없는 미국, 앞으로 전쟁 영화는 이렇게?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전 전쟁 영화를 정말 싫어합니다. 특히 할리우드의 영웅 주의에 사로 잡힌 전쟁 영화는 더더욱 싫어하는 편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흉악한 범죄입니다. 그러면 범죄 속에 선(善)도 악(惡)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전쟁에 이용당하는 가엾은 희생자만 있을 뿐이죠.

하지만 대부분의 전쟁 영화는 단순한 이분법에 의존합니다. '우리 편은 선이고, 적은 악이다.'라는 이분법 속에 선한 우리 편은 영웅이 되고, 악한 적은 죽어 마땅한 놈들이 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지도자들의 어떠한 명분 아래 총알받이로 동원된 그들은 정말 죽어 마땅한 놈들일까요? 

제가 처음 미국의 전쟁 영화를 접한 것은 미국의 실패한 전쟁이었던 월남전 소재의 영화들이었습니다. 그 영화에서 미군은 베트남의 자유를 위해 싸운 영웅이었고, 베트콩들은 죽어 마땅한 악당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인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베트콩들은 자주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였고, 미군은 자기네 나라에 처들어온 악당입니다. 누구의 관점으로 전쟁을 보느냐에 따라 선과 악이 뒤바뀌는 것이죠. 그러한 전쟁에서 이분법적인 논리는 그저 정치가들의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전쟁 영화가 돈이 꽤 된다는 것입니다. 전쟁 영화만큼 자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손 쉬운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군이 적군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장면에 환호하게 됩니다. 전쟁 영화의 선동적인 기능이죠.

영화 제작자들은 그러한 전쟁 영화의 선동성을 지금까지 잘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전쟁 영화들은 적을 잃어버린 상황입니다. 월남전과 2차 세계대전은 이제 너무 낡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미국이 일으킨 걸프전으로 인하여 촉발된 테러와의 전쟁 역시 이젠 너무 흔한 소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월드 인베이젼]은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을 새로운 적으로 내세워 전쟁 영화를 찍어 냈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를 욕할 관객도 없고(그 누가 외계인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겠습니까?), 공공의 적을 통해 전 세계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인 낸츠(아론 에크하트)가 외계인의 약점을 찾는다며 칼로 난도질을 해도, 미해군이 탄 탱크가 외계인을 짓밟고 지나가도, '너무 잔인해! 저 외계인 불쌍해!'라고 생각하는 관객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속 시원하다'라며 속으로 환호했을 관객은 많았겠죠. 이렇게 [월드 인베이젼]은 전쟁 영화의 약점을 살짝 비켜 나간 상태에서 전쟁 영화의 선동적인 기능을 맘껏 누립니다.

 

 

영웅만들기는 처음부터 진행중이었다.

 

[월드 인베이젼]은 처음부터 주인공을 군인으로 설정합니다. 군인들의 소소한 일상을 잡아내고, 자막으로 그들의 이름과 계급을 내보내며 관객들에게 그들의 캐릭터를 인식 시킵니다.

그렇게 짧게나마 캐릭터를 완성한 이 영화의 군인들은 외계인의 침략이라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일반인들을 구출하는 임무를 맡게됩니다. 게다가 그들이 구출하려는 일반인은 어린 아이 셋과 젊은 여자입니다.(민간인 남자는 영웅이 되어 장렬하게 희생당합니다.) 이러한 설정은 관객들이 낸츠 일행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마음 속으로 두려움에 떠는 어린 아이들이 무사하길 빌며 낸츠 일행을 응원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적인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들은? 전쟁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이 적에 대한 묘사는 가급적 피합니다. 그들의 캐릭터 따위는 당연히 없고, 그들이 지구를 침공한 이유 역시 관심도 없습니다.(TV에서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이 사견이라며 떠들어내는 것이 전부입니다.) SF 영화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외계인을 묘사하는 장면 역시 최대한 자제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머나먼 우주를 건너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들의 가공할만한 위력의 새로운 병기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것 역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별로 특별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월드 인베이젼]이 관심을 가진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낸츠 일행의 영웅 만들기입니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오로지 그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영웅 만들기는 전쟁 영화의 가장 흔한 영화적 재미 요소입니다. 영웅 만들기 만큼이나 손 쉽게 관객의 환호를 이끌어내는 요소는 없습니다. 두려움 없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며 동료 혹은 나라를 지키는 영웅의 활약상은 대부분의 전쟁 영화들이 기생하고 있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월드 인베이젼]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영웅 만들기에 몰두합니다. 부하들과 파병을 나갔다가 부하들을 모두 잃고 홀로 살아 돌아온 낸츠는 그러한 영웅이 되기엔 아주 적당한 과거의 아픔과 그로인한 현재의 희생 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엘레나 산토스(미셸 로드리게즈)라는 여성 군인 캐릭터를 새롭게 투입하며 남녀의 구색마저 맞추는 영특함을 보입니다.  

무사히 부대로 돌아갈 수 있지만 지구의 평화를 위해 홀로 적진에 뛰어 드는 낸츠. 그리고 위험을 알면서도 그러한 낸츠를 따라 충성을 맹세하는 부하들, 임무를 마쳤지만 아침 식사 따위는 거부하며 전투 준비를 하는 그들의 영웅적 모습에 [월드 인베이젼]은 맘껏 박수를 치라며 관객들의 등을 떠밉니다. '후퇴는 없다'라는 그들의 구호가 극장 밖을 나와도 귓가에 맴돌 정도입니다. 

 

 

SF 영화의 재미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이렇게 제가 본 [월드 인베이젼]은 SF 영화가 아닌 전쟁 영화였습니다. 물론 '외계인의 지구 침략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SF 영화가 아닐 수 있냐?'고 반문하시는 분들에겐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외계인의 지구 침략이라는 소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전쟁 영화처럼 흘러 갑니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이 '외계인의 지구 침략 영화는 이렇게 만들어라.'라며 교본으로 제시했던 [인디펜던트 데이]의 경우는 [월드 인베이젼]처럼 영웅 만들기 영화였지만 그래도 SF 영화다운 스펙타클과 특수효과는 빛이 났습니다.

그런데 1996년 영화인 [인디펜던트 데이]에 비해 무려 15년이 지난 [월드 인베이젼]은 그 어떤 진화된 특수효과도, 관객을 압도할 스펙타클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B급 SF 영화였던 [스카이 라인]과 비교해서도 SF 영화다운 면모가 한참 뒤떨어집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전쟁 영화로 본다면 말이 틀려집니다.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민간인을 구하기 위한 군인들의 활약상은 전쟁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에겐 재미를 느낄만한 요소가 많습니다. 게다가 폐허가 된 도시, 사방에서 총탄이 빗발치듯이 날아들고, 이를 헤치며 적군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전쟁 영화의 카타르시즘을 느끼기에도 충분했습니다.

 

결국 [월드 인베이젼]을 본 제 개인적인 느낌은 제가 그토록 싫어하던 전쟁 영화를 억지로 보고 나온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SF 영화로는 아무리 좋은 점수를 줘도 100점 만점에 40점을 주기 어렵습니다. 외계인의 모습도 독창적이지 못했고, 그나마 등장 장면도 한 없이 짧습니다. 외계인의 신 병기는 그냥 대충 흉내만 낸 것 같습니다. SF 영화가 현실아닌 공상 과학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영화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월드 인베이젼]은 전혀 그러한 공상 과학적인 측면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쟁 영화로는 그래도 60점은 주고 싶네요. 노골적인 영웅 만들기가 짜증났지만 외계인과의 시가전 묘사는 탁월했고, 적을 외계인으로 설정하며 제가 전쟁 영화를 싫어하는 직접적인 이유였던 단순한 이분법적 구분의 불편함을 살짝 비켜갔기 때문입니다.

흠... 아무리 그래도 평균을 내보니 100점 만점에 50점이네요. 어렵게 시간을 내서 극장에 가는 만큼 왠만하면 영화의 장점을 찾아 재미있게 관람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워낙에 전쟁 영화를 싫어하는 제 취향 탓에 [월드 인베이젼]은 재미있게 관람하고 싶어도 관람할 수 없는 영화였습니다.

 

 

 

만약 외계인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비웃을 것 같다.

우리가 먼 우주를 건너, 오랜 준비 끝에 지구를 침략하는데

저렇게 허술하게 할 것 같냐며...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