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파이터] - 아무리 짐이 되어도 그들은 가족이다.

쭈니-1 2011. 3. 16. 14:08

 

 

감독 : 데이빗 O. 러셀

주연 : 마크 월버그, 크리스찬 베일, 에이미 아담스, 멜리사 레오

개봉 : 2011년 3월 10일

관람 : 2011년 3월 15일

등급 : 15세 이상

 

 

연기 귀재들의 영화가 여기 있다.

 

민방위 훈련으로 인하여 회사에 하루 휴가를 낸 저는 늦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아침 일찍 일어나 [사랑이 무서워]를 봤습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차례 박장대소 정도는 안겨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초반 김수미로 인한 작은 웃음 밖에 안겨주지 못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사랑이 무서워]를 보고난 다음의 일정은 집으로 돌아가 점심 식사를 하고 민방위 훈련 장소로 가는 것이었지만, 실망스러운 [사랑이 무서워] 때문에 영화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 저는 점심 식사를 굶는 것을 감수하고 한 편의 영화를 더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원래는 민방위 훈련을 받은 이후 오후에 보기로 계획잡았던 [파이터]를 앞당겨 본 셈입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습니다. 올해 아카데미에서 남우 조연상을 수상한 크리스찬 베일,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멜리사 레오는 물론이고, 마크 월버그, 에이미 아담스까지 혼신을 다한 연기는 영화를 보는 제게도 생생하게 전해졌습니다. [파이터]를 보면서 어느새 저는 [사랑이 무서워]에 대한 아쉬움까지 잊고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파이터]를 상영하는 극장 안에는 저 혼자 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관객이 원래 없는 평일 오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랑이 뭐길래]는 극장 안에 10여명 남짓 있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조금 아쉽더군요. 

영화를 보면서 배우들의 연기력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영화 관람료가 전혀 아깝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좋은 영화를 관객들이 많이 봐주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실 저 역시 [피이터]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크리스찬 베일과 멜리사 레오가 아카데미에서 남녀 조연상을 동반 수상하지 않았다면 애써 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별로 기대하지 않은 이유는 판에 박은 듯한 스토리 라인 때문입니다. 어느 가난한 복서가 가족과 사랑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다는 이 영화의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은 2005년에 본 [신데렐라 맨]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실화라니, 왠지 영화를 보지 않아도 영화를 본 것만 같은 느낌까지 들더군요.

하지만 역시 제가 [파이터]를 외면하지 못한 이유는 인간 고무줄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체중을 자유자재로 빼며 열연을 펼치는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배트맨으로 인기를 얻으며 이제는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영웅 역할만 해도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것만 같은 이 배우는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하며 고난한 명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의 명성에 젖어 마약에 의존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디키(크리스찬 베일). 그는 방송국에서 마약의 위험성을 알리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면서도 자신의 선수 복귀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라고 착각하고 있을 정도로 현실을 외면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의 단한가지 자랑거리는 세계 챔피언 슈가 레이를 쓰러 뜨렸다는 왕년의 무용담 뿐이고, 그의 유일한 희망은 서른이 넘은 나이에 상대의 승률을 올려주는 역할을 하는 백업 권투 선수로 전전긍긍하는 동생 미키(마크 월버그) 뿐입니다.

삐쩍 마른 얼굴로 왕년의 영광에 젖어 껄렁대는 골칫거리에 불과한 디키는 그렇게 조금씩 미키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키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체계적인 훈련과 경기를 알선해 주겠다는 스폰서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막아서고, 오히려 미키의 훈련비를 벌겠다며 범죄 행각을 벌이다가 미키 마저도 위기에 빠뜨립니다.

가족이 힘이 되고 희망이 되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가족이 올가미가 된 상황. 크리스찬 베일은 동생의 미래를 갉아 먹으며 연명하는 기생충 같은 인생을 소름끼치도록 완벽하게 연기해 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이토록 숨이 막힐줄이야...

 

[파이터]가 다른 권투 영화와, 아니 다른 할리우드 영화와 차별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입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고 희망이 되어야할 가족으로 인하여 미키의 인생이 망가지는 상황을 [파이터]는 섬뜩하게 그려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크리스찬 베일이 있었고, 디키와 미키의 어머니인 앨리스(멜리사 레오)가 있었습니다. 마약에 찌든 디키와는 달리 가족의 힘을 강조하며 끊임없이 미키를 옭아매는 그녀의 모습은 아카데미가 왜 멜리사 레오를 선택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미키가 자신의 인생을 찾으려 할 때마다 '얘야, 남은 믿으면 안된다. 우린 가족이잖니. 가족만 믿어라.'라며 미키의 인생을 수렁에 빠뜨리는 앨리스.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디키보다도 섬뜩했고, 숨이 막혔습니다.

재능은 갖고 있었지만 가족에게 옭아매어 옴짝달짝도 못하는 미키의 모습이 너무나도 안쓰럽더군요. 그렇기에 영화의 후반부에 '경기를 하는 것인 나야, 제발 나에게 관심을 가져줘.'라며 울부짖는 미키의 모습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그나마 미키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존재는 샬린(에이미 아담스)입니다. 미키가 재능은 있지만 가족들로 인하여 그 재능을 맘껏 펼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된 그녀는 앨리스와 미키의 누이들, 그리고 디키를 상대로 당당하게 맞섭니다.

놀랍게도 이 당찬 연기를 해낸 배우는 [마법에 걸린 사랑]에서 풋수대기 공주를 연기했던 에이미 아담스입니다. [파이터]에 에이미 아담스가 출연한다고 해서 [마법에 걸린 사랑]의 어여쁜 모습만 기억하며 그녀의 출연을 기다렸던 저는 영화 중반까지 '그런데 에이미 아담스는 언제나오지?'라고 스스로 의문을 던져야 했습니다. 샬린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가 에이미 아담스일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녀의 당찬 연기는 진수는 미키의 가족들을 처음 소개 받는 장면과 미키의 가족에 대한 변심이 샬린 때문이라며 앨리스와 미키의 누이들이 떼를 지어 샬린의 집에 처들어 오는 장면입니다. 기가 죽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미키와는 달리 '난 그들이 겁나지 않아.'라며 당당하게 맞서는 샬린의 모습은 미키에게는 물론, 영화를 보는 제게도 청량제같은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난 가족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파이터]는 이렇게 할리우드 영화로는 드물게 가족주의의 허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말 만큼은 여느 할리우드 영화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발 나에게 고나심을 가져줘.'라며 항변하는 미키에게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줄 몰랐다.'며 한발 물러서는 앨리스, 감옥에 갔다와서 오히려 사람이 되어 '나에게 마지막 기회를 줘.'라며 진심으로 부탁하는 디키의 모습에서 이 영화는 결국 가족의 소중함으로 다시 되돌아갑니다.

하지만 그것을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배우들의 완벽한 연기와(마크 월버그의 연기도 평균 이상이었지만 워낙에 다른 배우들이 출중하여 오히려 묻혀 버릴 정도였습니다.) 권투 특유의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강렬한 경기 장면, 그리고 바로 내 자신을 뒤돌아 보게 하는 완벽한 스토리 덕분에 영화를 보는 내내 색다른 기분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가족의 희생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다른 나라들보다 우리나라가 최고가 아닐까요? 저 역시 저희 아버지는 8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나 밑에 동생들을 모두 시집, 장가보내느라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시고 어린 나이 때부터 미싱을 걸리며 재단사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비단 저희 아버지 세대의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1남 2녀 중 장녀였던 저희 누나는 학창시절 공부를 꽤 잘했지만 집안 형편과 동생들 둿바라지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고 상업계 고등학교를 진학했었으니까요.

그런 누나의 희생도 모르고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나도 빨리 취업을 하겠다며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진학하겠다는 저를 붙잡고 누나는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만은 대학을 보내고 싶었다며 저를 부둥켜 앉고 엉엉 울더군요.

그렇게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한 가족은 희망이 되기도 하지만 가끔은 우리들의 발목을 붙잡는 짐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힘이 되지 않던가요? 이 영화의 디키처럼... 그러한 디키에게 절망도, 희망도 맛 본 미키처럼 말입니다. 

 

 

과연 우리가 잘못 되기를 바라는 가족이 몇이나 있을까?

그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짐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의 진심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