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랭고] - 성인을 위한? 아동을 위한? 그 아슬아슬한 경계

쭈니-1 2011. 3. 9. 13:13

 

 

감독 : 고어 버빈스키

더빙 : 조니 뎁, 아일라 피셔, 빌 나이

개봉 : 2011년 3월 3일

관람 : 2011년 3월 8일

등급 : 연소자 관람가

 

 

너의 정체를 밝혀라.

 

지난 주말에 제가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일요일에는 웅이와 [랭고]를 보러 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저는 일요일에 숙취로 인하여 극장에 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습니다. 게다가 [랭고]를 이미 보신 분들의 리뷰에 의하면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이 아닌 어른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더군요.

하긴 그냥 딱 보기만 해도 주인공인 랭고(조니 뎁)의 외모는 달콤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제게 상당한 비호감이었고, [캐리비안의 해적 : 세상의 끝에서]에서 블록버스터 영화답지 않게 복잡한 스토리 라인을 자랑했던 고어 버빈스키가 감독을 맡았으니 웅이가 보기엔 어려운 영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웅이와 함께 보기로한 약속을 어기고 퇴근 후 저 혼자 [랭고]를 보러 갔습니다. 어쩌면 웅이와 함께 보기 위해 주말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제 비겁한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어찌되었건 저로써는 잭 스패로우라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사상 가장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낸 고어 버빈스키 감독과 조니 뎁의 영화를 관람을 마냥 미뤄둘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본 제 느낌은? 일단 초반과 중반까지는 '우와, 3D로 봤으면 재미있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후반은 '왜 갑자기 심각한척?'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실적인 화면과 거친 남자들의 세계인 서부극의 만남, 게다가 잭 스패로우 선장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캐릭터와 허풍쟁이의 영웅되기라는 익숙한 스토리 라인까지... [랭고]는 최고의 점수를 주기는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제겐 합격 점수를 줄만한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랭고]는 팝콘 무비이다.

 

[랭고]의 시작은 올빼미 밴드가 '요절한 영웅의 이야기'라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이 장면에서 [랭고]는 자신의 정체를 확실하게 밝히는데 편안한 자세로 저칼로리 팝콘을 먹으며 볼 만한 팝콘 무비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난 가벼운 팝콘 무비야.'라고 밝히며 시작한 [랭고]. 하지만 랭고의 원맨쇼가 돋보이는 랭고의 첫 등장 장면과 랭고가 트럭에서 떨어진 후 길 건너편 다른 세상을 찾아 떠나는 (자동차에 깔리도 끄덕없는 강인한 체력을 지닌...)선지자를 만나는 장면은 가벼운 팝콘 무비로 치부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깊이가 보였습니다.

[아이다호]의 기면발작증을 연상케하는 증상을 보이는 빈(아일라 피셔)의 비호감 외모도 범상치 않았습니다. 영화적 재미를 노린 대부분의 팝콘 무비는 남자 주인공이 개성있는 비호감(잭 블랙 같은...)인 경우는 많지만 여주인공이 비호감인 경우는 드뭅니다. 그런데 [랭고]는 팝콘 무비를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호감 외모를 지닌 캐릭터로 영화를 가득 채워 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어! 이 영화, 뭔가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랭고가 황무지 빌에 들어서며 사라집니다.

이후부터 고어 버빈스키 감독은 제대로된 팝콘 무비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랭고가 얼떨결에 마을의 무법자 매를 죽이는 장면과, 어리숙한 랭고가 마을의 보안관이 되어 우쭐거리지만 실수로 마을에서 목숨보다도 귀중한 물을 도둑맞고 위기에 처하는 설정까지... 최근에 봤던 잭 블랙 주연의 [걸리버 여행기]에서 보여줬던 캐릭터와 설정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영화에 전개됩니다.

이렇게 어디선가 본 듯한 설정은 편안하게 영화를 즐기라던 올빼미 밴드의 충고와도 맞아 떨어지는데 초반의 범상치 않은 전개 때문에 잔뜩 긴장(혹은 기대)했던 저는 결국 아무 생각없이 바보 도마뱀 랭고의 활약상을 편안한 자세로 즐기고 있었습니다.

 

 

고어 버빈스키의 블록버스터적 실력이 발휘되다.

 

하지만 고어 버빈스키 감독은 가벼운 팝콘 무비에 그치지 않고 [랭고]에 블록버스터적인 영화적 재미도 안겨줍니다.

물을 도둑맞은 랭고는 마을 사람들로 추격대를 구성하고 추격에 나섭니다. 결국 두더지 일당의 본거지에서 일대 격전이 펼쳐지는데...

두더지들이 박쥐를 타고 랭고 일행을 추격하는 장면은 웅장한 음악과 스펙타클한 영상으로 그 어떤 블록버스터도 부럽지않은 재미를 안겨줍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우와, 3D로 봤다면 웅이가 정말 좋아하겠는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왠만한 애니메이션은 3D로 개봉하는 요즘 [랭고]는 3D가 아닌 2D로만 개봉되었지만, 고어 버빈스키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스펙타클한 장면들과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허문 사실적인 영상은 '3D 영화는 관람비만 아까워.'라는 인식이 강한 제게도 '3D 영화로 보고싶다.'라는 강한 충동을 불어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두더지 일당과의 격전이라는 [랭고]에서 가장 블록버스터 영화다운 장면이 지나고 나면 다시금 이 영화는 가벼운 팝콘 영화로 되돌아갑니다. 랭고의 정체가 드러나고 랭고는 쓸쓸히 마을을 떠나게 되죠. [걸리버 여행기]에서도 그랬지만 허풍쟁이의 영웅되기라는 스토리 라인을 지닌 영화에서 예정된 전개를 충실히 따라간 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발생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지던 랭고가 서부의 수호신을 만나고, 사라진 물의 행방을 깨닫고,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 장면부터는 다른 분들의 리뷰처럼 '어린 아이들이 즐기기엔 무리가 있는...'애니메이션으로 돌변합니다. 

랭고의 초현실적인 경험과 그로 인한 자아 찾기... 뭐 대충 그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디만... 암튼 영화의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인 후반부의 대 반전이라는 것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성인을 위한? 아동을 위한?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 선 애니메이션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최강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성인과 아동이 모두 즐길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입니다.

픽사는 디즈니의 동화적인 느낌의 그림과 유쾌한 스토리 라인을 고스란히 차용하면서도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스토리 라인을 창조해 냈습니다. 그 결과 자녀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극장을 찾아야 했던 부모들 역시도 자녀들과 함께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픽사가 단시간 내에 애니메이션계의 최강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드림웍스가 '타도, 디즈니!'를 외치며 애니메이션에 도전하였지만 언제나 2% 부족했던 이유는 디즈니와의 차별화를 위해 성인 애니메이션에 올인했기 때문입니다.(요즘은 그런 드림웍스의 전략이 많이 퇴색하였습니다.)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은 디즈니의 동화적인 느낌의 그림과 캐릭터와는 달리 각이 진 강렬함을 강조했고(픽사의 [벅스 라이프]와 드림웍스의 [개미]를 비교하면 그 차이를 인식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 결과 디즈니와의 차별화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오히려 어른과 아동을 어우르며 새로운 강자로 급부상한 픽사를 넘어서지는 못했습니다.

 

[랭고]의 전체적인 느낌은 디즈니보다는 드림웍스에 가깝습니다. 동화나 설화에 영감을 얻은 디즈니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랭고]는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편승했고, 그림과 캐릭터 역시 동화적인 느낌보다는 강렬한 느낌을 위주로 살려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토리 전개를 보면 디즈니에 가깝습니다. 허풍쟁이의 영웅되기 스토리와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에 대한 경고들을 담은 메시지는 새로움보다는 익숨함으로 그려져 있고, 한편으로는 서부극이라는 거친 장르를 제외하고는 동화적이라는 느낌마저 듭니다. 

[랭고]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인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고 하기엔 스토리 전개가 너무 전형적이고, 아동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고 하기엔 그림이 거칠며, 마지막엔 갑자기 철학적인 이야기까지 끄집어 내는 오지랖을 발휘합니다. 결국 [랭고]는 성인을 위한 애니메이션과 아동을 위한 애니메이션의 그 어떤 경계에 서있는 셈입니다.

물론 저는 그러한 부분에서 흥미를 느꼈지만, 다른 분들은 그러한 부분에 당혹스러움을 느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느낀 [랭고]의 아쉬움은 그 모호한 경계로 인해 관객과의 호흡이 부족했다는 점 뿐입니다.

 

 

[랭고]는 성인과 아동을 모두 어우르는 픽사의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모호한 경계가 [랭고]를 더욱 특별하게 하지 않을까?

어쩌면 드림웍스 스타일로 픽사의 경지에 오르는 꿈같은 일이 벌어질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