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더 브레이브] - 서부극을 살린 이 영화는 '진정한 용기'이다.

쭈니-1 2011. 3. 3. 11:28

 

 

감독 : 에단 코엔, 조엘 코엔

주연 : 헤일리 스타인펠드, 제프 브리지스, 맷 데이먼, 조쉬 브롤린

개봉 : 2011년 2월 24일

관람 : 2011년 3월 2일

등급 : 15세 이상

 

 

코엔 형제의 영화에 재도전을 해본다.

 

제가 처음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 저는 장르와 주연 배우 위주로 영화로 영화를 골랐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본 영화들이 차곡차곡 쌓이니 가장 먼저 고려해야할 것이 감독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이고,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 감독은 있기 마련입니다. 제 경우는 국내 감독으로는 김기덕 감독이고, 해외 감독으로는 데이빗 린치 감독입니다. 그들은 비평가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는 작가주의 감독이며, 그들의 영화는 세계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의 영화를 아무리 봐도 때론 불쾌하고, 때론 난해할 뿐이었습니다.

비록 김기덕 감독과 데이빗 린치 감독과는 다르지만 코엔 형제의 영화도 비슷했습니다. 제가 코엔 형제의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은 [허드서커 대리인]이었는데 전 무척이나 재미있었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코엔 형제의 영화는 점점 저와 멀어져만 가더군요. 그래도 [파고]까지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부터는 뭔가 저와 취향이 점점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느낌의 절정은 코엔 형제에게 아카데미를 휩쓸게 했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였습니다. 매년 아카데미 작품상에 수상한 영화들은 극장에서 챙겨봤던 저는 정말 어렵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봤고 결국 당혹스러움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걸작이라며 칭송했지만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더군요.  하비에르 바뎀의 연기는 분명 소름이 끼칠 정도로 리얼하게 무시무시했지만 이 영화가 관객에게 말하고자 하는 주제도, 영화의 재미도 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패닉 상태에 빠져야 했습니다. 자칭 영화광이라고 생각하는 제가 남들은 모두 걸작이라는 영화에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했으니 왠지 모르게 부끄럽더군요. 

코엔 형제의 두번째 카운트 펀치는 [번 애프터 리딩]이었습니다. 브래드 피트, 조지 클루니, 존 말코비치, 틸다 스윈튼, 프란시스 맥도먼드라는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이고, 가벼운 스토리 라인을 가졌기에 어쩌면 이번엔 코엔 형제의 영화에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구나 싶어 도전했다가 역시 멍한채 극장 밖을 나와야 했습니다. 이렇게 코엔 형제에게 연달아 두번의 카운트 펀치를 맞고 나니 그의 영화를 보기가 두려워 지더군요. 그래서 결국 작년 이맘 때 개봉했던 [시리어스 맨]은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제가 다시 [더 브레이브]로 다시 코엔 형제의 영화에 도전했습니다. 서부극이라는 장르의 매력과 미국에서 코엔 형제의 영화로는 경이로운 1억 7천만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린 [더 브레이브]. 저는 어쩌면 [허드서커 대리인]이후 처음으로 코엔 형제의 영화에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극장을 찾았습니다.

 

 

감정이 철저하게 자제된 14세 소녀의 복수극

  

[더 브레이브]는 톰 채니(조쉬 브롤린)에게 아버지를 잃은 매티(해일리 스타인펠드)의 모습에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원한다면 아버지에게 키스를 해도 좋다'라고 말하는 장의사에게 이미 영혼이 빠져 나간 빈 껍데기일 뿐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한 매티는 장의 비용이 왜 그리도 비싼지 장의사에게 따지며 흥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더 브레이브]의 시작은 이 영화의 정서를 압축해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한 14세 소녀의 복수극이라면 과잉된 감정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울며 복수를 다짐하는 소녀의 모습을 저는 영화를 보기 전에 상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감정을 절제시킵니다. 매티는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기 보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다부진 결심을 하고 복수를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 진행시킵니다. 먼저 돈을 마련하고, 젊은 시절 악명이 높았던 연방보안관 커그번(제프 브리지스)을 고용합니다.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표정 하나 바꾸지 않으며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톰 채니에 대한 복수심을 이 어린 배우가 표현해낸 것입니다.

 

감정의 절제는 매티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매티에게 고용된 커그번 역시 시종 일관 감정을 밖으로 표현해 내지 않습니다. 술에 찌들어 사는 늙은 주정뱅이에 불과해 보이지만 실력을 발휘할 때는 날카로운 총잡이의 면모도 보여주는 그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임무를 묵묵하게 해냅니다.

커그번이 조금이나마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장면은 후반에 가서야 나옵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는 매티를 안고 의사의 집으로 달려가면서 매티를 살리고 싶다는 그 간절함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에 내비친 것이죠.

그러한 감정의 절제는 오히려 영화를 보는 제게 캐릭터들의 감정을 제대로 전달시켜줍니다. 단호한 표정의 매티와 무표정한 커그번의 얼굴에서 저는 이들의 끈끈한 연대감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색다른 경험인데, 감정이 과잉된 영화에서 느꼈던 억지로 만들어낸 감동이 [더 브레이브]에서는 무미건조하지만 그러한 무미건조함 자체가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내 제게 전달된 것이죠.

한가지 더 특이한 것은 감정을 절제한 매티와 커그번과는 달리 텍사스 레인저스인 라뷔프(맷 데이먼)는 맘껏 자신의 감정을 드러냅니다. 그러한 라뷔프의 존재는 자칫 무미건조함으로 지루해질 수 있는 이 영화에 활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결국 [더 브레이브]의 첫 번째 재미는 배우들의 명연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서부극으로서의 재미?

 

구피는 서부극이라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지만 저는 서부극을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서부극은 거의 멸종 직전의 장르입니다. 그래서 극장에서 서부극을 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죠.

제가 코엔 형제의 영화와 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더 브레이브]를 챙겨본 이유는 바로 그러한 서부극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놓치고 나면 또 언제 서부극을 극장에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부극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저도 서부극을 많이 보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했던 90년대 초반엔 이미 서부극은 미국에서조차 거의 제작이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가 봤던 서부극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는데 샘 레이미 감독, 샤론 스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진 핵크만 주연의 [퀵 앤 데드], 로렌스 캐스단 감독, 케빈 코스트너, 데니스 퀘이드, 진 핵크만 주연의 [와이어트 어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진 핵크만, 모건 프리먼 주연의 [용서받지 못한 자] 등,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습니다.(그러고보니 제가 본 서부극에선 거의 진 핵크만이 출연했네요.)

 

그렇기에 제가 기억하는 서부극은 황량한 벌판에서의 결투, 복수, 남자들의 거친 세계 등 아주 단편적인 것들 뿐입니다. 그런 단편적인 제 기억에 의존해서 [더 브레이브]를 평가한다면 서부극의 재미는 거의 없다고 평가해도 될 것 같습니다.

[더 브레이브]에는 황량한 벌판에서의 결투는 나오지 않습니다. 휘파람 소리 같은 서부극 특유의 음악이 흐르고,허리에 총을 찬 두 남자가 서로 마주 보며 서 있고, 동시에 총을 뽑아 쏘는... 뭐 그런 장면([퀵 앤 데드]에서는 그런 장면이 멋지게 포장되어 나옵니다.) 대신 말을 탄 4명의 무법자와 커그번의 결투 장면이 나올 뿐입니다. 하지만 그 장면 역시 멋지게 포장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복수는 오히려 무덤덤했고, 남자들의 거친 세계 보다는 14세 소녀의 당찬 복수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제가 기대했던 서부극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재미없지는 않았습니다. 배우들의 명연기가 영화의 재미를 주도했지만 코엔 형제 특유의 깨알같은 대사의 묘미와 멋지게 포장되지는 않았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마지막 결투 장면의 긴장감이 코엔 형제식의 서부극의 재미를 새롭게 창조해 냈습니다.

 

 

코엔 형제의 영화를 좋아해도 될까요?

 

톰 채니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를 방불케하는 무시무시한 악인일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는 후반부의 장면에서 어쩌면 많은 분들이 실망을 하셨을지도 모르겠네요. 확실히 톰 채니는 악당이라기 보다는 얼간이에 불과했으니까요.(1969년 작인 [진정한 용기]에서도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더 브레이브]가 좋았습니다. 코엔 형제의 영화를 보며 언제나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극장 밖을 나서야 했지만, [더 브레이브]는 성인이 된 매티가 커그번과 마지막 만남을 갖는 장면에서 이 영화 특유의 절제된 감정 속의 감동을 느끼며 여운을 안고 극장 밖을 나설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이 번 영화에서는 코엔 형제 특유의 색체가 많이 순화되었음을 뜻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영화 이전에 제가 코엔 형제의 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재미있게 봤던 [허드서커 대리인]은 코엔 형제의 팬들에겐 코엔 형제 영화 중에서 최악의 졸작으로 손꼽히는 영화입니다. 결국 저는 아직 코엔 형제의 재능이 맘껏 발휘된 영화보다는 그들의 색채가 순화된 영화에 재미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더 브레이브]를 재미있게 봤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허드서커 대리인]은 관객은 물론 비평가들에게 명백한 실패작 판정을 받은 영화였지만 [더 브레이브]는 코엔 형제 특유의 색체가 순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더 브레이브]의 성공은 코엔 형제의 영화가 저와 같은 우매한(?) 관객들도 즐길 수 있게끔 조금은 순화될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며, 멸종 직전까지 갔던 서부극이 잘 만든다면 아직은 충분한 흥행성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해낸 것입니다.

저는 [더 브레이브]의 흥행 성공으로 코엔 형제의 영화를 나도 즐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좋아하는 장르이지만 좀처럼 극장에서 만나기 어려웠던 서부극도 어쩌면 이전보다는 자주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그것 만으로도 [더 브레이브]는 충분히 제게 가치가 있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의 원제처럼(True Grit) [더 브레이브]는 최소한 제겐 흥행성이 불분명했던 서부극을 코엔 형제가 자신의 색체를 순화시키는 노력 끝에 되살려낸 '진정한 용기'가 돋보이는 걸작이었습니다. 

 

[더 브레이브]의 미국내 흥행 성공이 좀 더 많은 서부극의 제작으로 이어진다면 좋겠다.

그러한 희망만으로도 이 영화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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