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1년 영화이야기

[블랙 스완] - 당신도 흑조를 꿈꾸지 않나요?

쭈니-1 2011. 2. 28. 11:28

 

 

감독 : 대런 애로노프스키

주연 : 나탈리 포트만, 밀라 쿠니스, 뱅상 까셀, 바바라 허쉬, 위노나 라이더

게봉 : 2011년 2월 24일

관람 : 2011년 2월 25일

등급 : 18세 이상

 

 

신상은 구피도 춤추게 한다.

 

제가 구피를 처음 만난 것은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채 식지 않았던 2002년 가을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다니던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서 정리해고를 당한 상태였고, 그 충격으로 다시는 회계관련 일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였습니다.

하지만 학력, 경력 모두 회계 관련으로만 쌓아온 제가 회계관련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저 역시 딱히 '이 일을 해야지.'라고 결정하지도 못했고요. 결국 저는 어영부영 6개월동안을 백수로 지냈으며, 바로 그 시기에 구피를 만난 것입니다.

구피와의 결혼을 위해 서둘러 직장을 구했지만 다니던 회사마다 사정이 어려워 급여는 항상 한두달 정도 밀렸었습니다. 급기야 웅이를 임신한 구피가 다니던 회사를 관두게 되며 저희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철없는 남편인 저는 그저 영화만 볼 수 있다면 행복하다며 열심히 영화 보기에 몰두했고, 결국 어렵게 살림을 꾸려야 하는 것은 오로지 구피의 몫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릅니다. 처녀시절에는 그래도 잘 나가던 커리어우먼이었기에 명품 옷 몇 벌 정도는 있었다는 구피는 저와 결혼하고 나서는 자기 옷 한 벌 사는 것에 벌벌 떠는 평범한 아줌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저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구피도 직장에 다니며 저희 집 사정은 괜찮아 졌지만 여전히 구피는 옷 한 벌 제대로 사지 못합니다. 

월급 이외에 비상금이 생기면 회사 동료들은 마누라 몰래 딴 주머니를 찼지만, 전 결혼 초기에 고생 시킨 것을 생각하며 '이 돈은 꼭 옷 사입어.'라며 구피에게 꼬박꼬박 갖다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돈 마저도 구피는 자기 옷은 사지 못하고 생활비로 써버립니다.

그랬던 구피가 어느날 신이 난 목소리로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나 드디어 질렀어.' 뭔 소리인가 했더니 백화점에서 그 동안 사고 싶었던 봄, 가을 외투를 샀더군요. '이월 상품도 아니고 신상이야.'라며 약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제게 말하는 구피에게 저는 '괜찮아. 2월엔 연말정산 덕분에 소득세 환급분도 나오고, 3월엔 연차 휴가를 쓰지 않은 대가로 나오는 연차 수당도 나오잖아.'라며 안심시켰습니다.

기분이 좋아서일까요? 구피는 목요일에 [아이 엠 넘버 포]를 봤었음에도 불구하고 [블랙 스완]을 보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제게 같이 가자며 쪼르르 따라옵니다. 구피가 연이틀 영화를 보는 것도 드문 일이고, SF나 판타지, 액션이 아닌 스릴러 장르의 영화를 보는 것도 드문 일입니다. 역시 신상은 구피도 춤추게 하더구요.

 

 

[블랙 스완]에서의 '백조의 호수'는 어떻게 변했나?

 

[블랙 스완]은 뉴욕 발레단에 소속된 니나(나탈리 포트만)가 새로운 시즌의 오프닝 작품인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 백조 여왕에 발탁되며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되고 있는 '백조의 호수'는 굳이 발레 공연을 보지 않았더라도 어린 시절 만화영로 한번쯤은 봤을 고전입니다.

하지만 전 [블랙 스완]을 보며 조금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알고 있는 '백조의 호수'와 [블랙 스완]의 '백조의 호수'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일단 제가 알고 있는 '백조의 호수'부터 이야기하자면,  사악한 마법사에 의해 낮에는 백조로, 달빛을 받으면 아름다운 공주로 변하는 오데트,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받아야만 저주에서 풀릴 수 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지그프리드 왕자가 나타나고 지그프리드 왕자는 연회에 오데트를 초대합니다. 그러나 사악한 마법사는 자신의 딸인 오딜을 오데트로 변장시켜 지그프리드 왕자의 사랑을 빼앗고, 이를 안 지그프리드 왕자는 사악한 마법사를 무찌르고 오데트와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워낙 오래된 이야기이고, 각각의 재해석으로 인하여 많은 버전의 '백조의 호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딜에게 왕자의 사랑을 빼앗긴 오데트가 희망을 잃고 호수로 몸을 던져 죽음을 택하고, 지그프리드 역시 오데트의 뒤를 이어 호수로 몸을 던지지만 죽음을 초월한 사랑의 힘으로 오데트의 저주는 풀리고 결국 둘은 행복하게 산다는 해피엔딩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블랙 스완]의 '백조의 호수'는 발레단의 단장 토마스(뱅상 까셀)에 의해 재해석됩니다. 우선 백조인 오데트를 맡은 발레리나는 흑조인 오딜을 함께 연기해야 하고, 마지막 장면 역시 오데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러한 변화는 [블랙 스완]을 스릴러 영화로 탄생시키는 근간이 됩니다. 완벽에 가까운 오데트였던 니나는 오딜을 함께 연기해야 함으로써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오데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백조의 호수'의 마지막 장면 역시 [블랙 스완]의 주제와 교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백조는 왜 흑조가 되어야만 했나?

 

[블랙 스완]은 니나의 변화를 뒤쫓아 갑니다. 그녀의 어머니인 에리카(바바라 허쉬)는 발레리나였지만 니나를 임신하며 꿈을 포기합니다. 자신의 꿈을 포기한 에리카는 니나를 자신이 이루지 못한 최고의 발레리나로 만들기 위해 그녀를 뒷바라지합니다.

영화의 초반, 니나는 그러한 에리카의 품 안에 완벽하게 보호를 받는 나약한 여자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녀의 방 안은 인형들로 치장되어 있고, 에리카의 도움 없이 니나는 모든 것이 불안해 보였습니다. 영화의 초반 홀로 지하철을 탄 니나의 모습이 불안해 보였던 것은 바로 그러한 니나의 캐릭터를 잘 설명해줍니다.

하지만 그녀는 변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소망했던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서 그녀는 나약한 여자 아이가 아닌 아름다움과 관능을 동시에 갖춘 성숙한 여성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먼저 에리카의 보호에서 벗어나야만 했고, 발레를 위해 자신이 그동안 포기해야 했던 삶의 쾌감을 즐겨야만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녀와 비교가 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바로 릴리(밀라 쿠니스)입니다. 니나와는 달리 관능적이고, 자신에 차있으며, 삶을 즐길줄 아는 그녀는 니나가 갖고 있지 못한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캐릭터였습니다.

니나는 릴리를 동경하고, 질투하며, 그녀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러면서 니나는 점점 백조에서 흑조로 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은 그러한 니나의 변화를 섬뜩한 스릴러로 표현합니다. 자아가 분열되고,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니나의 흑조로써의 변화는 얼핏 '흑조를 탐한 백조의 파멸'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전 다르게 봤습니다. 니나가 흑조를 탐함으로써 파멸을 맞이한 것이 아닌, 오히려 흑조를 탐함으로써 니나는 행복했을 것이라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니나를 통해 대리만족하려 했던 어머니의 기대와 최고가 되고 싶다는 열망 속에 박제된 자신의 본능을 깨닫는 그 순간 니나는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만족스러운 미소도 얻습니다. 저는 바로 그 마지막 니나의 미소에 주목한 것입니다.

 

 

당신은 백조가 되고 싶은가? 흑조가 되고 싶은가?

 

어머니의 보호 아래 백조로 우아하게 성장했던 니나. 하지만 저는 그러한 니나의 모습에서 한때 최고의 발레리나였지만 은퇴 기로에 서야만 했던 베스(위노나 라이더)의 모습을 봤습니다.

나이가 들어 스스로 최고의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던 베스는 그러한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자해하며 자신을 망가뜨립니다.

베스의 물건을 몰래 훔치며 그녀처럼 되기를 열망했던 니나. 하지만 그녀는 병실에 누워 있는 베스에게 자신이 훔쳤던 물건들을 되돌려 주며 베스에 대한 동경을 버립니다.

베스와 달리 자신의 인생을 즐기고, 최고가 되기 위한 강박보다는 발레 자체를 즐겼던 릴리. 베스를 향한 니나의 동경은 베스에서 릴리도 변합니다. 그럼으로써 니나는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에서 벗어나게 되고, 쾌락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며,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최고의 발레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흑조를 탐한 백조의 욕망의 결과였습니다. 

왕자가 구해주기만을 기다리며 자신의 슬픈 운명을 탓했던 백조 오데트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왕자를 유혹하며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 했던 흑조 오딜, 동화 속에서 백조는 착한 편, 흑조는 나쁜 편으로 나누어 있지만 현실이라면 다를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에 소극적이었던 백조를 원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래서 저는 니나가 흑조를 탐함으로써 파멸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어머니의 기대에 맞춰 진행되던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며 어른이 되었고, 진정한 발레리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성의 욕망을 가두고, 욕망을 표출하는 여성을 악녀로 단정짓는 그런 사회에서 흑조는 악역이지만, 여성이 적극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고, 왕자의 도움이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인정되는 사회에서 백조는 오히려 사회 부적응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레퀴엠]으로 마약이 순수한 사람들을 어떻게 타락시키는지 끔찍한 리얼리티로 보여줬던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은 남성의 강인함을 겉으로 드러내는 레슬러들의 생활에서 오히려 남성이기에 나약했던 어느 늙은 레슬러의 생활을 관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블랙 스완]은 [레퀴엠]의 끔찍한 스릴러적 요소와 [레슬러]의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의 이중적 삶을 적절하게 섞어 놓은 영화입니다. 여성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몸짓인 발레를 통해 오히려 그 속에서 박제된 자신의 욕망을 표출함으로써 진정한 발레리나가 되는 니나의 끔찍한 변화를 쫓아간 것입니다.

사람들은 백조를 보며 '아름답다'라고 탄성을 지를지 모르지만 스스로 백조가 되라고 한다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 것입니다. [블랙 스완]은 이렇게 관객들의 잠재의식 속에서 자리잡은 흑조에 대한 욕망을 끄집어낸 영화입니다.

 

나는 가끔 구피가 자신의 욕망을 가둬야만 하는 백조이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아는 흑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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