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추창민
주연 : 이순재, 윤소정, 송재호, 김수미, 송지효
개봉 : 2011년 2월 17일
관람 : 2011년 2월 23일
등급 : 15세 이상
이것이 강풀의 힘이다.
드디어 지난 한 달동안 저를 괴롭히던 2010년 법인 결산이 끝을 맺었습니다. 사장님의 최종 결재까지 나고 나니 2010년이 정말로 지나가 버렸다는 것이 실감나네요.
법인 결산도 끝났고해서 퇴근 후 영화를 한 편 볼 생각이었습니다. 아직 제가 보지 못한 기대작은 [아이들...]과 [그대를 사랑합니다]뿐이니 이 두 영화 중에서 한 편을 고르면 되는 것이었죠.
아무래도 영화 블로그를 운영하다보니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는 화제작의 경우는 꼭 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박스오피스 1위라는 것은 그만큼 관객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며, 관객에게 인기가 많은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저도 보고 합류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것이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 6위에 머무른 [그대를 사랑합니다]보다는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는 [아이들...]를 보는 것으로 마음이 결정되었습니다. 최소한 퇴근 2시간을 앞둔 오후 4시까지는 말입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리저리 웹서핑을 하던 중에 강풀의 웹툰인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보고 만 것입니다.
사실 전 강풀의 웹툰을 좋아합니다. 제가 강풀의 웹툰을 접한 것은 역시 영화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웹툰은 영화화된 것이 많은데 [아파트], [바보], [순정만화] , 그리고 [그대를 사랑합니다]까지 무려 네 편의 작품이 영화화된 것이죠. 비록 공포 영화를 못봐서 영화 [아파트]는 보지 못했지만, 호기심에 강풀의 웹툰은 모두 챙겨보았고, 결국 그의 웹툰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강풀 작품의 매력은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느껴지는 것이 그가 창조해낸 캐릭터이고, 그러한 캐릭터들이 만들어낸 에피소드들은 입가엔 미소가, 눈가엔 눈물이 맺히게 합니다. 미스터리 썰렁 심리물이라 장르지어진 '아파트', '타이밍', '이웃사람', '어게인'에서조차 그의 캐릭터들과 에피소드는 사랑으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요즘 너무 바빠 미처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챙겨보지 못했는데 그날 저는 우연히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보게 되었고, 단숨에 첫회부터 마지막회까지 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보겠다는... 그 순간 [아이들...]를 보겠다는 제 결심은 이미 잊혀져 버린 셈이죠.
죄송합니다. 다시는 호상이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강풀의 원작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처음에 어느 장례식장에서 김만석이 사람들에게 호통을 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장례식장 사람들은 '호상'이라며 상주를 위로했고, 김만석은 그런 사람들에게 '호상이라는 말을 하지 말란 말이야.'라며 호통을 친 것입니다. 그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게 어떻게 잘 죽은거란 말이야.'라며 항변합니다.
사실 그 부분을 읽는 순간 저는 뜨끔하고 말았습니다. 저 역시 작년 가을에 연세가 아흔이셨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할아버지께서는 노령으로 인하여 거동이 불편하셨고, 파킨슨 병을 앓고 계시던 아버지와 직장을 다니시던 어머니께서는 어쩔수 없이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맡기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2개월간 요양원에 계시던 할아버지는 집에 가고 싶어 하셨습니다. 집에는 할아버지를 돌봐드릴 사람이 없었지만 부모님은 간병인을 고용하기로 결심하시고 할아버지를 집으로 모셨습니다. 저희 삼남매가 드리는 용돈과 어머니가 버시는 비정기적인 월급으로는 아버지의 병원비와 약값 대시기도 벅찼지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할아버지의 소원을 외면할 수는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집으로 돌아오신지 며칠 후 주무시듯 편안히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있던 날, 사람들은 모두 호상이라며 저희 가족을 위로했습니다. 생활이 어려워 할아버지의 요양원비와 간병인비를 보태주지 못하셨던 삼촌, 고모들은 '아흔이면 오래 사신거야. 호상이야. 호상.'이라고 말씀하셨고, 저 역시 '호상이네요.'라고 동의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할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자손들의 자기 위로였습니다. 평생을 시부모님을 모셨던 저희 어머니께서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 전 2개월 정도,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신 것이 마음 아파하셨고, 파킨슨 병으로 자신의 몸을 가누는 것도 힘드셨던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를 마지막 순간까지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끼셨습니다. 전 그런 부모님께 '호상이니 슬퍼마세요.'라고 위로했던 것입니다.
강풀의 웹툰 '그대를 사랑합니다'와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보며 제 눈시울을 뜨겁게 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제 생각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아무리 오래 사셨다고 해도 삶에 대한 미련이 없으신 것은 아니었을텐데, 전 스스로 '할아버지, 잘 돌아가셨어요.'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후회, 부끄러움이 웹툰을 보며, 영화를 보며 제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이 못 난 손자를 용서하세요."
그들의 사랑도 아름답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제겐 참 어려운 분이셨습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 '할아버지, 옛날 이야기해주세요.'라고 쪼르르 달려가면 할아버지께서는 귀찮은 표정으로 '나중에...'라며 외출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제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손자인 제게 마저도 애정 표현이 그렇게 서투셨습니다.
그리고 자유분방하셨습니다. 할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셨기에 할아버지께서는 혼자셨지만 언제나 그 곁에는 많은 친구분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가끔 저는 어느 할머니께서 할아버지를 찾는 전화를 받곤 했답니다. 그 전화 속의 할머니께서는 소녀같은 목소리로 '오빠 바꿔주세요.'라고 수줍게 말씀하셨습니다.(당시에는 핸드폰이 없어서 집전화로 통화를 하는 것이 유일한 연락 방법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다 늙으셔서 아직도 연애를 하시네.'라며 속으로 할아버지께 투덜거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도, 저희 집에 전화를 거신 할머니도, 비록 연세는 많이 드셨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사랑하는 마음 마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저는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글을 쓰면 쓸수록 할아버지께 죄송한 마음 뿐이네요.)
고맙게도 강풀의 웹툰 '그대를 사랑합니다'와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제가 모르고 있었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아름답게 잡아냅니다.
제가 강풀의 웹툰을 좋아하면서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보지 않은 것은 어쩌면 '젊은 선남선녀의 사랑이 아닌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이야기가 재미있겠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나봅니다. 웹툰을 보며, 영화를 보며 저는 그런 선입견을 가졌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사실 웹툰의 강만석 할아버지 캐릭터는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무섭고 무뚝뚝한 그가 송씨 할머니를 만나며 소년 같은 모습을 보이는 장면을 보며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인데, 원작과의 싱크로율 100%를 자랑하는 이순재의 버럭 연기는 영화를 보면서도 참 많이 웃게 만들었습니다. 김만석과 송이뿐(윤소정)이 서서히 사랑을 느껴가는 장면은 감히 이 세상 그 어떤 로맨틱 코미디보다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치매에 걸린 조순이(김수미)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주는 장군봉(송재호)의 사랑도 감동스러웠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풋내기 사랑보다 더욱 강렬했으며, 이 세상 그 무엇도 떼어놓을 수 없는 끈끈함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했던 세월이 그들의 사랑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이별(스포 포함)
강풀의 원작 자체가 30부에 불과하고, 읽는 속도가 남들보다 현저하게 느린 제가 1부 부터 30부까지 읽은 시간이 2시간에 불과했습니다. 그 만큼 영화는 다른 강풀 원작의 영화와는 달리 웹툰의 소소한 에피소드까지 영화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웠던 것은 웹툰에선 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김만석, 송이뿐, 장군봉, 조순이의 과거 장면이 영화에선 조금 어색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모든 에피소드를 영화화하는 것은 힘들었는지 송이뿐이 자신를 버린 과거의 남편을 만나고 그를 용서하는 장면이 영화에선 빠졌더군요. 웹툰을 보며 그 장면에서 많이 찡했는데(처자식을 버린 그가 송이뿐에게 자신이 버린 딸의 안부를 묻는 장면과 그런 그에게 딸이 잘 살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장면) 영화에선 볼 수 없어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장군봉, 조순이의 장례식날 그들의 막내딸에게 결국 거짓말을 해야 했던 김만석의 쓸쓸한 뒷모습도 영화에선 빠졌고, 송이뿐을 고향에 데려다주며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김만석의 사망 신고를 하지 않는 연아(송지효)의 모습도 영화에선 빠졌습니다. 역시 아무리 원작에 충실하다고 해도 원작의 모든 것을 영화로 옮길 수가 없었나 봅니다. 그것이 강풀 원작이 영화화되며 가장 아쉬웠던 부분인데 그래도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이 정도면 원작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영화화했다고 인정해도 될 것 같습니다.
특히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김만석과 송이뿐의 이별 장면으로 마무리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혹시 해피엔딩을 위해 웹툰의 결말을 바꾸지 않을까 영화를 보며 노심초사했는데 다행히 그런 만행을 저지르진 않았습니다.
김만석과 송이뿐의 이별 장면은 이 영화의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는 명장면입니다. 사실 저는 어느 노래 가사에서 나온대로 '사랑하기에 떠나신다는 그 말 나는 믿을 수 없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한다면 그의 곁에서 지켜주면 될 것을 왜 이별의 아픔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줘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저도 젊은 시절 이별 꽤나 해봤는데 정말 많이 아픈데 병원에 갈수도, 약을 먹을 수도 없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_-)
그런데 김만석과 송이뿐의 이별은 정말 사랑하기에 하는 이별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김만석과 송이뿐의 나이. 그들은 죽음이 억지로 갈라놓는 이별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얼마 남지않은 평생동안 사랑을 기억하고 간직하며 그렇게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짓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별이 두려워 동반자살을 선택했던 장군봉과 조순이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웹툰을 읽으며, 영화를 보며, 사랑보다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것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생각해낸 강풀은 진정 천재적인 이야기꾼이며, [그대를 사랑합니다] 덕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다시 회상할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해 정말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사랑합니다.
비록 애정 표현에 서툰 할아버지께 서운한 점도 많았는데...
지나고 보니 할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이 간절하게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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