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짧은영화평/2011년 아짧평

[불량남녀] - 불량시대를 풍자하는 불량 로맨틱 코미디

쭈니-1 2011. 1. 4. 08:56

 

 

감독 : 신근호

주연 : 임창정, 엄지원

 

 

내가 채권추심업체에 근무하던 시절.

 

지금으로부터 한 5년전쯤, 저는 어느 채권추심업체의 경리부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그곳에서 일을 하기 전에는 자금력이 약한 작은 중소기업들을 전전했었고, 월급을 제때 받지 못해 이제 막 결혼한 제 생활은 최악의 상황에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채권추심업체에 입사하며 '업종이 무엇이든 월급만 제때주면 된다.'라고 생각했었죠.

실제로 그 채권추심업체는 월급도 제때 나오고, 연말이면 직원당 평균 1천만원씩 보너스 돈 잔치를 벌이기도 했습니다.(전 입사한지 1년이 조금 넘어서 6백만원의 보너스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전 그곳에서 2년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사표를 내야 했습니다.

제가 월급도 제때주고, 게다가 연말 보너스 돈 잔치까지 해주는 그곳을 스스로 나와야 했던 이유는 지랄같은 직장 상사와의 불화도 있었지만 업종이 업종이다보니 매일 불행을 등에 업은 사람들을 봐야 했고, 그 불행이 제게 전염되어 저 역시 몸이 많이 아프고, 마음도 황폐해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가 제게 있어서 가장 불행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불량국민이 넘쳐나는 시대

 

채권추심업체에서 일하다보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으로 와서 추심 기간 연장을 부탁하러 오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생긴건 멀쩡한데 대부분 신용 카드를 마구 긁어대다가 연체가 되어 신용 불량자가 된 사람들이죠. 솔직히 전 그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신용 카드를 긁었을까요? 언젠가는 갚아야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을텐데...

암튼 그러한 신용불량자가 의외로 많더군요. 제가 다니던 채권추심업체에 등록된 사람들만 해도 몇 천명이었고, 그런 신용불량자들에게 채권을 추심하기 위해 고용된 인력만해도 백여명에 달했으니 말입니다.

[불량남녀]는 바로 그러한 시대를 관통하는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남자 주인공인 방극현(임창정)은 보증 한번 잘못 해줬다가 거액의 빚을 지게된 현직 형사이고, 여자 주인공인 김무령(엄지원)은 어떻게든 빚을 받아내려는 채권추심업체의 직원입니다. [불량남녀]는 서로 상극이어야할 그들이 만나 서로 갈등하다가 결국 사랑하는 그런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소재만 불량인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불량남녀]의 스토리 전개는 신용불량자와 채권추심업체 직원의 사랑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전형적입니다. 처음엔 서로 티격태격하고, 그러다가 미운 정이 들고, 잠시 관계의 위기를 맞이하지만 결국 사랑으로 골인한다는, 로맨틱 코미디의 기본공식을 충실히 따라갑니다.

게다가 극현과 무령의 관계의 위기를 끌어내는 인질 사건은 조금 촌스럽습니다. 가장 손쉽게 관계의 위기를 끌어내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극현과 무령의 관계를 잘 이용했다면 굳이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관계의 위기를 이끌어낼 수도 있었을텐데 아쉽더군요.

그래도 찌질남 연기의 최고봉 임창정과 오랜만에 물만난 고기마냥 맹활약을 펼치는 엄지원의 연기는 보는 내내 웃음을 안겨 줬습니다. 그들은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에서 대사를 버벅거리기도 했는데 오히려 그러한 버벅대는 연기가 그들의 캐릭터에 잘 맞아 떨어지더군요.

 

그들은 행복했을까?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불량 로맨틱 코미디라고 칭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라스트씬을 보며 그들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령은 극현과 사랑함으로써 그의 거액의 빚을 함께 떠안아야 합니다. 게다가 극현은 보증서주는 버릇을 남주지 못하죠. 결국 그녀는 평생 극현을 만난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극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극현은 무령에게 잡혀 살 것이며, 처음엔 그것이 편하고 좋을지 몰라도 사랑이 식은 몇 년후가 된다면 후회를 하게 되겠죠.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가 평등할 때 오래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령과 극현의 사랑은 처음부터 불평등으로 시작되었고, 그것은 극현의 거액의 빚에 의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의 사랑을 지키고 행복했을까요?

불량국민을 양성하는 불량사회에서 불량남녀가 만났으니 어쩌면 이 영화의 사랑 역시 불량사랑이 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불량남녀]는 영화를 보고나면 행복해지는 로맨틱 코미디의 최고 장점을 살리지 못한 불량 로맨틱 코미디에 머물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