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0년 영화이야기

[레드] - 노친네들의 반격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다.

쭈니-1 2010. 11. 5. 11:19

 

 

감독 : 로베르트 슈벤트케

주연 : 브루스 윌리스, 모건 프리먼, 존 말코비치, 헬렌 미렌, 메리 루이스 파커, 칼 어반

개봉 : 2010년 11월 4일

관람 : 2010년 11월 4일

등급 : 15세 이상

 

 

맥주는 나의 로망이다.

  

중학교 3학년때 친구들과 처음으로 맥주의 세계를 접했습니다. 좀 빠른 감이 있었지만 그 이전까지는 범생이 이미지가 강해서(공부는 잘 못했지만) 소위 노는 얘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저는 맥주의 짜릿함을 맛보고는 곧바로 빠져 들었었습니다.

물론 중, 고딩 시절엔 어른들 눈치보느라 대놓고 맥주를 마시지 못했습니다.(가끔 몰래 몰래 마셨습니다.) 대학 시절엔 돈이 없어서 맥주 대신 주로 소주를 마셔야 했고요.(맥주 마실 돈이 생기는 날은 그야말로 땡잡은 날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생각했습니다. 취업하면 나만의 공간에 커다란 냉장고를 들여놓고 냉장고에 갖가지 맥주들로 가득 채워서 퇴근하면 옷을 풀어 해치고(기왕이면 초콜릿 복근을 자랑하며) 멋지게 맥주를 즐기겠다고...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나서 백수 신세였던 적이 더욱 많았고, 놀다 놀다 지쳐 구피를 만나 정신을 차린 다음엔 곧바로 결혼을 했기에 나만의 공간에서 냉장고에 가득 맥주를 채워 즐기겠다는 꿈은 깨지고 말았습니다.(물론 초콜릿 복근에 대한 꿈은 게으른 천성 덕분에 더 일찌감치 깨졌습니다.)

 

결혼하면 냉장고에 맥주를 가득 채우고 맘껏 즐길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가끔 사랑스러운 아내와 일주일에 한번 쯤은 맥주 파티를 열며 맥주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기 전에 맥주는 어느 정도 마시던 구피가 웅이를 낳더니 맥주 한모금도 못마시는 체질로 바뀌며 제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집에서 즐기는 여유로운 맥주의 달콤함. 하지만 구피는 그러한 제 로망을 이해 못했고, 맥주로 인한 말 다툼이 잦아졌습니다. 구피는 툭하면 캔맥주와 감자칩을 사오는 절 이해못했고, 전 다른건 몰라도 맥주 한 캔 정도(500ml) 마시는 것은 구피가 이해해주길 바랬습니다.

제가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맥주 한 캔과 감자칩 한 봉지 뿐입니다. 물론 자주 마시면(여름엔 특히) 일주일에 4~5번도 마시긴 하지만 요즘같은 계절엔 일주일에 2~3번 정도 마십니다. 그런 제게 구피는 술을 너무 자주 마신다며 잔소리를 합니다. 맥주 맛도 모르면서...

구피와 저의 맥주 전쟁은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정말 구피 눈치 안보고 맥주를 맘껏(그래봤자 캔맥주 한, 두개) 즐길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런지... 그리고 여기 [레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 로망이 맥주라면 [레드] 주인공들의 로망은 총과 정의를 위한 살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로망을 어떻게 지켜냈을까요?   

 

 

[레드] 삐딱하게 관람하기.

 

프랭크 모시스(브루스 윌리스)는 과거 최고의 CIA요원으로 지금은 은퇴를 하여 연금이나 타며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연금 공단 직원으로 매일 통화만 하는 사라(메리 루이스 파커)와의 사랑을 이루는 것. 그런 그에게 어느날 위험이 닥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프로 암살단이 그의 목숨을 노린 것입니다.

이때부터 모시스는 자신과 자주 통화함으로써 같이 목숨이 위태로워진 사라는 물론, 과거 최고의 CIA요원이었지만 지금은 은퇴하여 퇴물이 되어 버린 동료들을 모아 반격을 준비합니다. 이렇게 모인 모시스의 동료들은 다시 예전처럼 짜릿함을 즐길 수 있다며 오히려 위험한 모험을 즐기고 반깁니다. 따분한 일상에 지친 사라 역시 책에서만 읽었던 첩보원의 위험한 모험에 매료되어 버립니다.

여기에서 저는 약간의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사실 [레드]는 킬링타임용 오락영화입니다. 바뀌 말하자면 이 영화를 즐기는데 있어서 심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인을 일삼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섬찟함마저 느꼈습니다.

 

그들은 정의, 혹은 조국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살인을 일삼던 자들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살인이 정의였고, 조국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모시스와 그의 동료들을 위협에 빠뜨린 과거의 사건은 정의도, 조국을 위한 것도 아닌 한 권력자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비열한 사리사욕을 위해 뒤치닥거리를 해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과거에 대한 반성과 회의를 품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 영화의 그 어디에도 그러한 부분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거 맘껏 살인을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는 식으로 과거 자신의 행적을 포장하기만 할 뿐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모습에서 세계 최강국이라는 권력을 앞세워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향해 무소불위의 폭력을 휘둘렀지만 이젠 경제 위기로 인해 휘청이고 있는 미국과, 과거 군사정권의 인권을 무시한 행정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나라의 현 정권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구피가 맥주에 대한 제 로망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저 역시 총과 정의로운 살인에 대한 그들의 로망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레드]에 대한 제 개인적인 영화적 재미는 조금 반감되었습니다.

 

 

노친네들의 반격이 시작된다.

  

제가 너무 오바했죠? 인정합니다. 킬링타임용 오락영화에서 그런 심각한 생각을 하다니... 저도 늙긴 늙었나봅니다. ^^;

여하튼... 그런 삐딱한 시선을 거두고 [레드]를 본다면 이 영화는 꽤 즐길만한 오락영화입니다. 특히 브루스 윌리스, 모건 프리먼, 존 말코비치, 헬렌 미렌으로 구성된 노장 배우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학창 시절 [다이하드]를 보며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재미를 느꼈던 저로써는 브루스 윌리스가 녹슬지 않는 액션 연기를 펼칠 때 쾌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 중 모시스가 모는 차와 쿠퍼(칼 어반)의 차가 충돌하는 가운데 모시스가 유유히 충돌하는 차에서 빠져나와 쿠퍼에게 총을 난사하는 장면은 브루스 윌리스의 액션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증명해 보입니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연기력을 인정받고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를 거머쥐었던 모건 프리먼 특유의 지성미 넘치는 연기도 좋았는데, 마지막 죽음까지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은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더 퀸]에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완벽하게 연기함으로써 아카데미를 거머쥐었던 헨렌 미렌의 연기도 정말 의외였는데, 60세가 훌쩍 넘어버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첩보원의 금지된 사랑을 우아하게 연기하는 모습은 정말 최고였습니다.

물론 미치광이 마빈을 연기한 존 말코비치의 연기도 영화의 잔재미를 안겨줬는데, 광기에 휩싸인 연기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이기에 마빈과 더욱더 잘 어울렸습니다.

이렇듯 [레드]의 영화적 재미는 노장 배우들의 매력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의 활약이 워낙에 특출나다보니 그들을 암살하려는 CIA 요원 쿠퍼의 매력이 반감되고 말더군요. 그래도 쿠퍼를 연기한 칼 어반이라면 [반지의 제왕], [본 슈프리머시], [리딕 : 헬리온 최후의 빛] 등의 영화에서 강력한 모습을 보여줬던 배우인데... 이 영화 속의 노장 배우들에 비하면 귀여운 신출내기 정도로 보였습니다.

 

 

긴장감은 떨어지지만 즐길만 하다.

 

실베스타 스탤론 감독이 추억의 액션스타를 총출동시킨 액션 영화 [익스펜더블]과 비교한다면 [레드]는 노장 배우들을 잘 활용하였습니다. 너무 폼만 잡지도 않았고, 과도하게 과장되지 않았던 [레드]의 노장 배우들은 경험에서 묻어나는 여유로움으로 영화의 재미를 주도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첩보 영화 특유의 긴장감은 생각보다 많이 떨어졌습니다. 모시스 일행이 CIA본부에 잠입하는 장면은 [본 시리즈]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얘들 장난같았고(그래도 모시스와 쿠퍼의 난장 결투는 재미있었습니다.), 후반부의 부통령 암살 장면 역시 다른 대통령 암살을 다룬 액션 스릴러 영화들과 비교한다면 많이 허술했습니다. 특히 진범이 밝혀지는 장면은 너무 억지스럽더군요. 반전을 위해 너무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렇듯 [레드]는 액션 영화로써의 긴장감은 생각보다 많이 부족합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원작과 비교해서도 많이 가벼워진 것이라고 하더군요. 화끈한 액션영화를 원하는 분들에겐 그것이 아쉬울듯.

 

하지만 그런 팽팽한 긴장감을 포기하고 획득한 것이 노장의 여유로움과 유머, 그리고 사랑이라면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손해본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시스와 사라의 로맨스도 그런데로 어울렸고, 조국과 이념을 초월한 빅토리아(헬렌 미렌)의 사랑도 감동적이지는 않지만 제게 잔잔한 미소를 안겨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새롭게 임무를 수행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늙어 은퇴를 하게 되면 3,40대 시절 열심히 일했던 회사 생활이 그리워질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글쎄요... 사실 지금 당장이라면 노년의 여유로운 생활이 더욱 기다려집니다.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여유롭게 영화를 즐기고, 시원한 캔맥주를 마시며 그 영화에 대해 음미할 수 있는 그런 시간적 여유로움. 살 집과 밥 걱정, 반찬 걱정이 없을 정도의 생활비, 그리고 영화 한편 볼 수 있는 여가비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회사에서 은퇴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막상 늙으면 지금의 이런 시간에 쫓기는 바쁜 생활이 그리워질지도 모르죠. [레드]를 보고나니 20년 후의 제 모습이 궁금해집니다. 그것만으로도 [레드]는 충분히 즐길만한 영화였습니다.

 

그들의 로망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처지는 이해가 됐다.

나도 언젠가는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