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0년 영화이야기

[심야의 FM] - [택시 드라이버]가 되지는 못했다.

쭈니-1 2010. 11. 3. 15:38

 

 

감독 : 김상만

주연 : 수애, 유지태

개봉 : 2010년 10월 13일

관람 : 2010년 11월 2일

등급 : 18세 이상

 

 

어린 아이를 볼모로 하는 스릴러는 더이상 보기 싫었다.

 

지난 10월 15일 개봉한 [심야의 FM]은 추석 시즌에 개봉하여 흥행 돌풍을 일으킨 [시라노 : 연애조작단]을 2위로 끌어내리고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특히 같은 날 개봉한 오우삼 감독과 정우성 주연의 글로벌 블럭버스터 [검우강호]를 큰 스코어 차이로 이긴 결과라서 더욱 뜻 깊었습니다.

그러한 [심야의 FM]의 흥행 돌풍은 그 다음주에도 이어졌는데 새롭게 개봉한 [파라노말 액티비티 2],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등의 파상 공세를 이겨내고 굳건히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켜냈으며, 개봉 3주차에는 비록 [부당거래]에 1위 자리를 내줬지만 [가디언의 전설], [나탈리] 등 새롭게 개봉한 신작들을 물리치고 2위 자리를 지켜냈습니다.

이러한 [심야의 FM]의 흥행 성공이 이례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유난히 한국형 스릴러 영화들이 많이 개봉했지만 오히려 흥행에 성공했던 스릴러 영화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야의 FM]은 우리나라 관객들이 한국형 스릴러 영화의 식상함에 지칠 때쯤에 혜성같이 등장한 단비와도 같은 영화인 셈입니다.

 

그러나 전 [심야의 FM]를 일찌감치 챙겨보지는 못했습니다. 올해 유난히 많이 개봉했던 한국형 스릴러 영화들을 열심히 챙겨봤지만 어느 순간부터 저 역시 지쳐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심야의 FM]의 범죄가 어느 미치광이가 주인공의 아이를 볼모로 잡고 협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엔 더욱더 이 영화를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올해 우후죽순처럼 쏟아진 한국형 스릴러 영화의 홍수 속에서 한국형 스릴러 영화들은 관객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 유난히 자극적인 소재에 집착을 했고, 그 자극적인 소재라는 것이 바로 어린 아이의 유괴, 살인이었습니다. 

8살된 아들을 둔 아버지 입장에서 그런 영화들을 본다는 것은 섬찟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스릴러 영화에서 관객에게 섬찟함을 줬다면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스토리, 캐릭터, 반전 등은 무시하고 무조건 소재만으로 섬찟함을 준다면 그러한 섬찟함이 달가울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결국 전 [심야의 FM]을 끝까지 외면하지는 못했습니다. 스릴러 영화를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 탓도 있지만 자칭 영화광의 입장에서 관객의 입소문을 탄 영화에 호기심이 생기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심야의 FM]과 저는 만났습니다.  

 

 

[어둠속에 벨이 울릴 때]로 시작해서 [택시 드라이버]로 넘어가는...

 

[심야의 FM]를 보면서 초반 언뜻 떠올랐던 영화는 [어둠속에 벨이 울릴 때]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이 영화는 심야 라디오 DJ를 몰래 사랑한 스토커 여성을 그린 스릴러 영화입니다.

새벽 2시에서부터 4시까지 '심야의 영화음악실' DJ를 맡고 있는 선영(수애). 그녀는 5년동안 맡았던 라디오 프로를 마치고 딸 아이의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방송 날, 그녀의 방송에 집착하던 동수(유지태)는 선영의 집에 침입하여 그녀의 동생과 아이들을 볼모로 잡고 선영에게 협박을 하기 시작합니다.

[심야의 FM]의 초반은 선영이 처한 위기의 상황과 동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미스터리로 가득 채워집니다. 동수가 선영의 방송에 집착을 하고 있으며, 그녀가 방송을 그만 두려고 하는 것에 분노를 느끼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영화의 초반 진행은 영락없이 [어둠속에 벨이 올릴 때]입니다. 하지만 김상만 감독은 초반의 패턴을 재빠르게 변화시킵니다.

 

김상만 감독이 변화시킨 것은 바로 동수의 캐릭터입니다. 동수는 선영의 팬에서 머물지 않고 스스로 악을 처단하는 영웅임을 자처하며 그동안 수 많은 범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바로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택시 드라이버]입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택시 드라이버]의 내용이 자주 언급되고, 동수는 자신이 트래비스(로버트 드니로)와 같은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동수가 자신을 트래비스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동수를 트래비스라고 생각했다면 그 영화적 효과가 더욱 커졌을텐데, 동수의 캐릭터는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관객이 동수를 트래비스라고 생각하려면 일단 동수의 행동에 관객들이 동정, 혹은 공감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동수는 그러한 동정과 공감을 이끌어 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관객을 끌어모으기 위한 자극적인 소재(여성 살인, 유아 납치 감금) 때문입니다. 동수가 트래비스가 되려면 그는 약하고 선량한 이들에 대한 폭력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결국 종착지는 [더 팬]

 

[어둠속에 벨이 울릴때]를 거쳐 [택시 드라이버]까지 숨가프게 달려온 [심야의 FM]의 최종 종착지는 바로 [더 팬]이었습니다.

토니 스콧 감독, 로버트 드니로, 웨슬리 스나입스 주연의 [더 팬]은 메이저리그 자이언츠의 광팬인 길(로버트 드니로)이 자신의 우상과도 같은 바비(웨슬리 스나입스)가 부진에 빠지자 점점 광기에 사로잡혀 섬찟한 살인 행각을 벌인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도, [더 팬]의 광적인 팬인 길도 모두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여하튼 관객의 동정과 공감을 얻어내지 못한 동수는 트래비스가 되지 못하고 [더 팬]의 길이 되어 버립니다. 물론 [더 팬]도 제가 꽤 좋아하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동수는 기왕이면 영화사에서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는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를 닮았어야 했습니다.

 

동수가 트래비스가 되지 못하고 길이 되어 버린 결정적인 이유는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한 김상만 감독의 무리수 때문입니다. 

실제로 [심야의 FM]의 긴장감은 최근 봤던 한국형 스릴러 영화 중에서도 최고였습니다. 수애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외모, 거기에 [올드보이]를 연상하게 하는 유지태의 광적인 연기는 영화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이끌어 냅니다.

특히 선영의 말 못하는 딸이 동수를 피해 집안으로 아슬아슬하게 숨어 다닐 때 여성 관객들의 '어떻게해'라는 안타까움이 여기 저기에서 들려오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그 장면에서 숨이 멎을 것 같은 긴장감을 느꼈는데, 아마도 그러한 것이 한국형 스릴러에서 툭하면 귀여운 여자 아이들을 희생자로 이용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자신을 영웅이라 칭하고 선영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동수. 하지만 그가 트래비스가 아닌 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긴장감 유지를 위한 김상만 감독의 욕심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트래비스가 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결과적으로 저는 [심야의 FM]이 재미있었습니다. 스릴러 영화를 보며 오랜만에 느껴보는 긴장감이 가져다주는 쾌감도 짜릿했고, 수애와 유지태의 연기 대결도 생각보다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온 몸에 힘을 주고 영화를 봐서인지 온 몸에 힘이 쫙 풀리더군요. 마음 속으로 선영의 딸이 마지막까지 살아남기를 기원했고, 동수가 선영에게 폭력을 가할 때엔 마치 제가 현장의 한가운데에서 동수의 폭력을 당하는 것 같은 아픔까지 느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전 이 영화를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의 긴장감을 위해 연약한 여성과 아이를 이용했고, 동수라는 캐릭터가 점점 전형적인 미치광이로 변해가는 것을 보며 영화를 보는 제 마음은 상당히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동수는 트래비스가 될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극단적으로 선영에게 몰려 있는 포커스를 동수에게 이동해야 했을 것이며, 관객들이 동수의 범죄 행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어쩌면 조금은 지루한 스토리 전개를 해나가야 했을 것입니다.

동수가 선영에게 가하는 자극적인 폭력은 좀 더 완화되었을 것이고, 그로인한 영화의 긴장감도 조금은 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전 영화의 긴장감과 재미를 조금 떨어뜨리더라도, 동수가 트래비스가 되었다면 [심야의 FM]은 재미뿐만 아니라 작품성도 동시에 획득할 수 있는 걸작 스릴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최근 짜증나는 한국형 스릴러와 비교한다면 [심야의 FM]이 가진 재미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지만 자꾸만 조금 더 욕심을 내고 싶은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택시 드라이버]가 되지는 못했지만... [더 팬]이 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심야의 FM]을 좋아할 수는 없지만, 김상만 감독의 차기작은 눈여겨 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