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현석
주연 : 엄태웅, 이민정, 최다니엘, 박신혜
개봉 : 2010년 9월 16일
관람 : 2010년 10월 11일
등급 : 12세 이상
웃음이 필요한 날
지난 목요일 저희 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평소 파킨슨 병을 앓고 있으셔서 움직이는 것은 불편하셨지만 워낙 건강 체질이라서 최소한 20년은 거뜬히 더 사실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평소 웅이가 커서 결혼하는 것까지 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아버지께서는 결국 그러한 바램을 이루지 못하시고 너무나 일찍 먼 곳으로 떠나 버리셨습니다.
회사에서 아버지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가던 길... 가는 도중 아버지께서 숨을 거두었다는 여동생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저도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청량리 한 복판에서 운전대를 잡고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습니다. 운전을 해야하는데 쏟아지는 눈물에 앞은 보이지 않았고, 차를 잠시 세우고 싶지만 복잡한 청량리 한 복판에는 차 세울 곳도 마땅치 않더군요. 그래도 하늘이 도왔는지 별 사고없이 병원에 도착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3일간을 장례식장에서 보냈습니다. 다리에 깁스를 한 구피도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못하고 장례식장을 지켰고, 회사 동료, 제 친구들, 친적분들 등 많은 분들이 장례식장을 찾아 저희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주셨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주말, 애초에 관리부가 주관하는 저희 회사에서 가장 큰 행사인 가을 야유회에 갈 예정이었는데, 그랬다면 떠들썩하고 정신없는 주말을 보냈을텐데, 제 주말은 너무나도 적막했고,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이 허망했습니다.
장례식에 참가해준 친구와 술을 마시고 평소에 하지 않던 술주정을 맘껏 부려봤지만 마음 속 텅빈 그 무엇은 결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주말을 보냈고 월요일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구피마저 출근한 텅빈 집에서 맞이한 월요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안은 정말 엉망진창이 되어 있더군요.
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 당장 다음 날이면 회사에 나가 장례식에 참가해준, 그리고 가을 야유회를 주관하느라 저 대신 고생해준 직원들에게 밝은 모습을 보여줘야 했고, 장례식장에선 죽음이 뭔지 몰라 울지 않았다가 나중에 다시는 할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엉엉 울던 웅이를 달래줘야 했으며, 아픈 다리를 이끌고 3일 내내 고생했지만 힘든 기색조차 내지 않던 구피에게 힘을 줘야 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봤습니다. 무조건 웃긴 영화를 봐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웃고 저 역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시라노 : 연애조작단] VS [방가? 방가!]
처음엔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그저 웃긴 영화... 맘껏 웃을 수 있는 영화, 그것만 해줄 수 있다면 기꺼이 비싼 영화 관람료를 지불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극장 앞에 선 저는 한 없이 고민에 빠져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웃긴 영화가 한 편이 아닌 두 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추석 시즌에 개봉하여 흥행 성공이라는 성과를 거두고 한달째 장기 상영에 들어간 [시라노 : 연애조작단]과 명품 코믹 조연 김인권이 처음으로 주연으로 나선 정통 코미디 [방가? 방가!]가 바로 제 마음을 어지럽힌 주범입니다.
일단 [시라노 : 연애조작단]의 장점은 검증된 영화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분들의 영화 리뷰를 읽어봐도 이 영화가 명품 로맨틱 코미디라는 것에는 대부분 이견이 없더군요. 하지만 단점은 로맨틱 코미디라는 것이죠. 로맨틱 코미디가 코믹하긴 하지만 정통 코미디가 아닌 까닭에 제가 원했던 한바탕 웃음을 안겨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던 것입니다.
[방가? 방가!]의 장점은 정통 코미디라는 사실입니다. 이미 [해운대]에서 관객에게 웃음 폭탄을 안겨줬던 김인권이 주연으로 나선 만큼 [해운대] 이상의 웃음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점은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과 외국인 근로자라는 정통 코미디와는 어울리지 않는 심각한 소재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칫 영화의 후반 슬픈 코미디로 막을 내린다면 제 기분도 덩달아 다운될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제 선택은 [시라노 : 연애조작단]이었습니다. 그 첫번째 이유는 한달동안 장기 상영을 하고 있는 영화라면 그만큼 재미가 있다는 반증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사랑과 웃음이라는 행복 바이러스를 줄 수 있는 영화의 소재가 외국인 근로자 문제를 다룬 [방가? 방가!]보다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제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시라노 : 연애조작단]은 그 많은 관객의 선택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는 영화더군요. 웃겼고, 찡했으며, 행복했습니다. 로맨틱 코미디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장점을 골고루 갖췄더군요.
비록 웃음 폭탄을 안겨주지는 못했지만 커다란 웃음 한 방 대신 소소한 웃음 여러 방을 안겨줬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쯤엔 제 기분은 한결 나아졌습니다. 결국 저는 이 여세를 몰아 영화 두 편을 더 감상했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엉망이 되어 버린 집안 청소를 말끔히 했습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화장실 청소도 해냈습니다.) 퇴근하고 깨끗해진 집에 들어선 구피의 표정도 한결 좋아보이더군요.
그렇게 전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치 아무 것도 바뀐 것은 없는 듯이... 하지만 아버지는 웅이에겐 세상에서 자신과 가장 잘 놀아주던 할아버지로, 구피에겐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은 자상한 시아버지로, 그리고 제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게끔 당신의 평생을 희생해준 아버지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배우의 중요성을 알고 있더라.
자! 자! 이제부터 위기를 전환하죠. 처음부터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어느새 블로그는 제 일상의 중요한 한 부분이고, 그렇기에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꼭 하고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지금 현재 제 일상에서 아버지의 죽음이 차지한 부분이 그 만큼 크니까요.
암튼...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시라노 : 연애조작단]의 가장 큰 장점은 배우들의 매력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 로맨틱 코미디의 성패는 출연 배우들의 매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은 선남선녀들의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를 보며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관객들에게 대리만족의 쾌감을 안겨주기 위해서라면 그들이 평소 동경하던 배우의 매력을 동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민정의 캐스팅은 정말 절묘했습니다. 톡톡 튀는 매력을 지닌 그녀는 남성들이 한번쯤 꿈꾸었을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도 이민정 같은 여자와 한번 사귀고 싶다'라는 상상을 하게끔 만드는 그녀의 매력을 이용하여 [시라노 : 연애조작단]은 영화의 재미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병훈(엄태웅)이 이끄는 시라노 팀은 그러한 남성들의 환상을 이루어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엄태웅과 최다니엘의 적당한 매력이 버무려집니다.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그들의 매력은 이민정의 매력과 절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애초부터 이 영화의 초점이 이민정과 사귀고 싶은 관객을 대리만족시키는 설정이기에 사실 엄태웅과 최다니엘의 매력은 적당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성 관객은 이 영화의 무엇에 만족해야 할까요? 그것은 엄태웅의 눈물과 최다니엘의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희중(이민정)을 믿지 못했던 병훈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여기에서 여성 관객들은 짜릿함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많은 남성들이 병훈과 같은 실수를 하고,(저도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로인해 많은 여성들이 상처입었을 것을 생각한다면 병훈의 뒤늦은 후회는 여성 관객들에게 쾌감을 안겨줬을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영화의 초반엔 그저 그랬던 최다니엘이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멋있게 포장되는 것 역시 이 영화가 얼마나 영특한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영화의 초반 여성 관객들은 그저그런 최다니엘의 짝사랑을 대리체험할 수 있으며, 영화의 후반에선 '어! 이 남자, 제법 멋있는대!'라는 생각과 함께 로맨틱 코미디 특유의 행복감을 느낄 수가 있었을테니까요. 이렇게 [시라노 : 연애조작단]은 초점은 이민정에게 맞춰 있으면서 남성 관객과 더불어 여성 관객까지 만족시킬줄 아는 영화였습니다.
어디서 누가 웃겨야 하는지도 잘 알더라.
하지만 이 영화가 이렇게 사랑이 고픈 관객의 대리만족을 충족시킬 로맨스 영화로만 만족한다면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가 되어선 안되겠죠. 분명 코미디는 로맨틱에 밀린 부수적인 요소이지만 엄연히 로맨틱 코미디 역시 코미디 영화의 한 종류이니까요.
그럼 이 영화는 어디서 웃길까요? 사실 그 부분에서도 이 영화의 영특함이 돋보입니다. 일단 적재적소에 웃기는 배우들을 배치해 놓고 관객들에게 웃음을 안겨준 것입니다. 영화의 초반 송새벽과 류현경 에피소드는 꿈에 그리던 짝사랑을 이루어준다는 이 영화의 설정을 설명함과 동시에 관객들에게 웃음을 안겨줍니다.
그 외에도 시라노 멤버중 시나리오 담당인 박철민의 코믹 연기도 영화의 코믹한 부분을 부각시켜 줬으며, 권해효, 김지영의 예상치못했던 출연도 꽤 웃겼고, 영화의 후반부에선 멋진 훈남으로 재탄생하는 최다니엘도 영화의 초반엔 어리숙한 매력을 선보이며 영화의 웃음을 담당합니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너무 코미디에 집착하여 주연 캐릭터들에게 코믹함을 부여한다면 로맨틱 부분이 약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정도 유머감각이 있는 남성, 여성은 매력적이지만 너무 웃긴 남성, 여성은 로맨스의 주연으로 별로 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처럼 조연들에게 코믹한 부분을 맡기는 것이 정석인데 [시라노 : 연애조작단]은 그러한 정석을 완벽하게 수행한 셈입니다.
어떤 영화는 장르의 평범한 정석을 벗어나 예기치못한 재미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영화는 그러한 평범한 정석을 지킴으로써 재미를 지켜내기도 하죠. [시라노 : 연애조작단]은 후자의 경우입니다.(여기서 후자란 싸움잘하는... 뭐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영화 보신 분들은 이게 뭔 소린지 잘 아실듯... ^^)
로맨틱 코미디가 워낙에 정석을 벗어나기 힘든 장르입니다.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을 벗어나기 위해 매력없는 배우들을 캐스팅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주연 캐릭터에게 슬랩스틱 코미디를 하게 하기도 어렵습니다. 단지 그들의 사랑과 그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외엔 별다르게 장르의 정석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바로 로맨틱 코미디가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하지만 [시라노 : 연애조작단]은 오히려 그러한 약점을 잘 이용하여 영화의 재미를 극대화합니다. 그렇기에 스토리 전개는 뻔하지만 그 뻔함마저도 재미있고, 유쾌합니다. 프랑스의 고전 희극 [시라노]를 모티브로 이용한 것 외엔 다른 로맨틱 코미디와 비교해서 달라진 것이 없는데 이렇게 제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정해진 정석의 힘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틀을 깨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그 정해진 틀 속에서 재미를 재창조하는 것도 정말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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