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양윤호
주연 : 김태희, 양동근
개봉 : 2010년 9월 16일
관람 : 2010년 9월 14일
등급 : 12세 이상
제사보다 젯밥
'무비 365'라는 영화 예매 사이트가 있습니다. 영화 시사회를 자주 신청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무비 365'시사회를 신청하시면 당첨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아직 신생 사이트라 시사회 신청 경쟁률이 높지 않은 까닭이죠.
여하튼... 어찌어찌하다 '무비 365'의 영업 팀장님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께서 영화 시사회에도 참가해주고 영화 리뷰도 올려달라고 하시더군요. 영화 리뷰야 영화를 보면 항상 쓰는 것이니 '무비 365'에 올려주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영화 시사회 참가는 여덟살난 아들을 둔 30대 후반의 직딩에겐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매번 영화 시사회 참가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두두둥~) 종로의 주얼리샾에서 '무비 365'에 협찬을 하여 [그랑프리] 사시회에 참가하면 (몇몇 참가 회원에게) 4만원 상당의 귀걸이를 선물로 준다는 귀가 솔깃한 정보를 입수하였습니다. 솔직히 [그랑프리]는 극장에서 봐야할지, 나중에 비디오로 출시되면 봐야할지 고민하고 있는 영화라서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구피에게 생색을 내며 선물할 수 있는 귀걸이는 탐이 났답니다.
그래서 [그랑프리] 시사회에 참가를 하였습니다. 구피 역시 혼자 가면 귀걸이 하나만 받지만, 둘이 가면 두개 받지 않겠느냐며 [그랑프리] 시사회에 함께 가자고 우기더군요.(공짜를 너무 좋아하는 우리 부부 ^^)
그리하여 하루종일 엄마, 아빠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리는 웅이를 하루간 버려두고, 6시 칼퇴근이라는 회사 사장입장에선 엄청난 만행을 저지르고, 저녁식사까지 컵라면으로 떼우며 [그랑프리] 시사회에 참가하였답니다.
그렇게해서 결국 저와 구피는 소원대로 시사회가 끝나고 몇몇 '무비 365' VIP급 회원들과 함께 종로 주얼리샾에 가서 귀걸이와 핸드폰줄을(남자에겐 핸드폰줄을 주더군요. 전 귀걸이 받겠다고 버텼지만 결국 남자라는 이유로 밀렸습니다. ^^;) 받았습니다. 4만원 상당의 귀걸이는 아니고 4천원 상당의 귀걸이와 핸드폰줄이었지만 영화 시사회와 주얼리샾의 만남이라... 꽤 기억에 남는 행사였습니다.
대표작이 드라마인 영화감독과 영화배우의 영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전 [그랑프리]에 대해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양윤호 감독의 영화를 그래도 극장에서 꽤 자주 보는 편인데... 양윤호 감독의 영화는 한결같이 70년대 감수성을 지닌 뭐랄까 설정 자체가 좀 유치한 면이 있습니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항상 드는 생각은 '영화의 기획 의도는 참 좋은데 왜 스토리 라인이 이렇게 구식일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김태희가 주연이라니... 뭐 그녀를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남자이고, 김태희 예쁜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이니, 예쁜 여자 싫어하는 남자는 없는 법이죠. 하지만 배우 김태희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녀의 영화 [중천]과 [싸움]을 극장에서 봤는데 정말 그녀의 연기는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최악이었습니다.
그렇게 제게 좋은 기억이 없는 양윤호 감독과 김태희의 만남이니 제가 [그랑프리]를 기대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던 셈이죠.
재미있는 것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양윤호 감독의 이름 옆에 붙은 그의 대표작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그랑프리]를 포함해서 무려 아홉 편의 영화를 감독한 중견 감독인데 그의 이름 옆에는 그가 연출한 영화가 아닌 드라마 [아이리스]의 양윤호 감독 작품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은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김태희도 마찬가지입니다. 김태희의 대표작하면 그녀가 이름을 알린 [천국의 계단]이라던가, [러브 in 하버드], [아이리스]와 같은 드라마 일색입니다.
영화와 드라마는 비슷해보이지만 사실 많은 부분이 다릅니다. 약 2시간 안에 모든 설정과 스토리, 캐릭터를 설명해야 하는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긴 시간을 통해 서서히 캐릭터를 구축하고, 설정을 설명하며, 스토리를 진행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양윤호 감독의 영화와 김태희 주연의 영화는 실패했지만, 그들의 드라마가 성공하는 이유는 그의 연출력이, 그녀의 연기력이, 단 시간안에 끌어 올려 관객을 흡입시키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랑프리]의 영화적 재미 역시 그의, 그녀의 그러한 단점이 얼마나 보완되었는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여전한 양윤호, 발전없는 김태희
하지만 막상 제 눈으로 확인한 [그랑프리]는 그의, 그녀의 단점이 전혀 보완되지 않은채 여전히 2% 부족한 영화적 재미만을 선보입니다.
우선 양윤호 감독의 연출력부터 이야기하자면... 그가 영화를 이끌어 나가는 스토리 전개는 언제나 세련됨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랑프리] 역시 마찬가지인데 오프닝씬에서 보여준 서주희(김태희)의 상처는 너무 전형적이어서 식상했고, 이우석(양동근)과의 사랑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촌스러웠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어이가 없었던 설정은 황만출(박근형)과 고유정(고두심)의 관계입니다. 양윤호 감독은 1948년 일어난 제주도 4.3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황만출과 고유정의 악연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러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영화의 소재로 끌어 오려면 좀 더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제주도 4.3 사건에 대해서 모를 대부분의 관객을 위해서 황만출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했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설명도 없이 거대한 사건만 끌어와놓고 무책임하게 간략하게 생략해 버립니다. 그러니 황만출과 고유정의 악연이 제주도 4.3 시건을 모르는 관객들에겐 어이없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만약 [그랑프리]가 드라마였다면 그래서 몇 부작으로 나눠어 있었다면 황만출과 고유정의 악연이 몇 회를 거쳐서 상세하게 설명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그들의 악연이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아닙니다. 그러기엔 러닝 타임이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설명할 수도 없는 거대한 근대사를 굳이 끌어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부분이 (고작 [아이리스] 한 편만 연출했지만) 양윤호 감독이 영화보다는 드라마가 더 잘 어울리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김태희도 마찬가지인데 이 영화에서 서주희는 감정이 굴곡이 상당히 큰 캐릭터입니다. 경마 도중 자신이 가장 아끼는 말을 잃었고, 그로인해 기수를 포기할 정도로 좌절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마음을 정리하고자 찾은 제주도에서 이우석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에 빠집니다. 결국 이우석의 사랑의 힘으로 용기를 되찾고 그랑프리 우승을 위해 다시 말에 올라탑니다.
이 영화에서 김태희는 좌절을 표현해야 했고, 사랑에 빠진 여인을 연기해야 했으며,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거는 용기를 보여줘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김태희의 연기는 그러한 굴곡이 거의 보이지 않는 아주 완만한 연기였습니다. 하긴 뭘해도 예쁜 배우의 한계일지도... 그러나 드라마라면 단 시간 안에 감정의 굴곡을 표현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그녀의 연기가 좀 더 안정적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도 우리에겐 양동근이 있다.
하지만 전 [그랑프리]는 꽤 재미있게 봤습니다. 양윤호 감독의 촌스러운 연출력은 여전했고, 김태희의 연기력은 여전히 제자리 걸음 중이었지만 [그랑프리]는 그래도 꽤 재미있었습니다.
그 재미의 중심엔 양동근이 있습니다. 군 제대 후 [그랑프리]를 통해 복귀한 양동근은 그 동안 연기를 하지 못한 한을 풀어내 듯이 자신의 모든 매력을 [그랑프리] 속에 쏟아냅니다.
어눌하면서도 독특한(마치 랩을 하는 듯한) 말투와 껄렁껄렁한 몸짓, 그리고 능굴맞은 표정까지... 다른 남자 배우가 했다면 손발이 어글거렸을 연기를 양동근은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연기해냅니다. 시사회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의 웃음 소리 대부분이 그러한 양동근의 연기에서 품어져 나왔습니다. 그 덕분에 서주희와 이우석의 촌스러운 사랑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볼거리가 되었습니다.
양동근의 힘이 느껴지는 대표적인 장면은 이별 장면에선 항상 등장하는 공항씬입니다. 사실 전 서주희가 말을 타고 제주 공항으로 달려가는 장면에서부터 속으로 '제발... 그러지 말아줘.'를 외쳤답니다. 더 이상 그들의 사랑이 촌스러워지면 아무리 양동근이라고 할지라도 고개를 돌려버릴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촌스러운 장면에서조차 양동근은 미소를 짓게합니다. 그것도 정말 대단한 능력인 셈이죠.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 영화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상당히 힘들어 보입니다. 하지만 애시당초 양윤호 감독에 김태희 주연의 영화라는 점에서 기대감을 조금 덜어놓고 영화를 관람한다면 의외로 '꽤 재미있네.'라는 반응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서주희와 이우석의 키스씬에서 서주희가 한쪽 발을 들어 올리는 장면처럼 촌스러운 장면들로 가득 채워진 영화이지만 양동근의 매력 하나만으로도 그러한 장면들이 용서가 되는 셈이죠.
영화에서 배우가 그래서 중요한가봅니다. 만약 양동근이 아니었다면 전 이 영화를 올해 본 그 어떤 영화보다도 최악의 평가를 내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양동근이 [그랑프리]를 살려낸 셈이죠. '고작 배우 한 명 때문에?'라고 되물으신다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양동근의 매력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시사회가 끝나고 함께 시사회를 관람한 분들의 반응도 '생각보다 괜찮네'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구피 역시 [그랑프리]의 시사회에 간다고 하자 회사 동료들이 '그 재미없는 영화를 뭐하러 봐?'라고 물었다며 불안해 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볼만 했어.'라는 반응입니다. 오랜만의 시사회. 그 자리에 양동근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 뿐입니다.
神은 그래서 공평하다.
김태희에겐 아름다운 미모를 줬지만, 배우로썬 부족한 연기력를 줬고,
양동근에겐 배우답지 않은 외모를 줬지만, 멋진 연기력을 안겨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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