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0년 영화이야기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 - 중국무협영화의 재미는 바로 이것이다.

쭈니-1 2010. 10. 14. 13:22

 

 

감독 : 서극

주연 : 유덕화, 유가령, 이빙빙, 양가휘

개봉 : 2010년 10월 6일

관람 : 2010년 10월 11일

등급 : 12세 이상

 

 

10월, 그 첫번째 기대작

 

사실 지난 월요일 무작정 극장으로 간 것은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비록 첫 영화에 대해서는 무조건 웃기는 영화를 보자고 결심해서 [시라노 : 연애조작단]을 봤지만 두 번째 영화는 무조건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을 보자고 정한 상태였습니다.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은 극장가의 비수기라는 10월의 개봉작 중에서 제가 기대작으로 꼽고 있는 첫번째 영화입니다. 10월의 기대작이 고작 여섯 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9월의 슬럼프를 벗어나기 위해선 열심히 기대작들을 챙겨 봐야 했고,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은 그 첫번째 영화인 셈입니다.

제가 그토록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을 기대했던 이유는 이 영화가 제가 좋아하는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거대한 스케일의 중국 무협영화이며, 오우삼 감독과 함께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열었던 서극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유덕화, 양가휘, 유가령, 이빙빙 등 중국영화의 스타급 배우들이 주연을 맡고 있습니다. 게다가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의 스토리 전개도 제가 이 영화에 흥미를 느낀 중요한 요소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런 어마어마한 기대를 안고 본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은 과연 어땠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 굉장히 만족하며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중국영화 특유의 거대한 스케일이 제 시선을 사로 잡았고, 서극 감독은 요근래 보여줬던 실망스러운 연출력에서 벗어나 이 영화에선 예전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유덕화는 여전히 멋있었고,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여황제인 측천무후를 연기한 유가령 역시 카리스마가 빛났습니다. 특히 전 이빙빙의 매력이 돋보였는데 이 젊은 배우를 앞으로 주목해봐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그러한 만족이 제 개인적인 취향과 영화에 목말라있는 개인적인 상황이 맞물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국스릴러만큼이나, 중국무협영화 역시 식상한 장르입니다. 엇비슷한 홍콩느와르 영화들을 우후죽순처럼 쏟아내다가 몰락한 80, 90년대 홍콩영화처럼 이대로 간다면 중국의 거대한 무협영화 역시 조만간 위기를 맞이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은 그러한 식상함 속에서 중국무협영화만의 재미를 지켜낸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대륙의 거대함... 스펙타클로 이끌어내다. 

 

중국 무협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거대한 스펙타클입니다. 하긴 중국은 땅덩어리가 워낙에 광활하고, 인류의 4대 문명의 진원지라는 자부심 또한 대단한 곳이죠. 그러한 것들이 중국영화의 스펙타클로 곧잘 표현되곤 합니다.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 역시 그러합니다. 이 영화는 중국 역사상 문화적으로 가장 화려한 시기로 손꼽히는 당나라 시대, 중국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황제 측천무후의 화려한 즉위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측천무후와, 여자가 황제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이유로 측천무후의 황제 등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반대파의 날카로운 대립으로 폭풍전야의 분위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측천무후는 자신의 권위를 온 세상에 떨치기 위해 즉위식날 공개할 거대한 불상 완공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에서의 스펙타클은 바로 거대한 불상에서 나옵니다. 120미터의 높이에, 100톤이 넘는 철이 투입되었다는 이 엄청난 불상은 영화의 초반부터 그 거대함으로 절 압도하였습니다. 사실 전 서기 690년에 저런 거대한 불상이 건축되었을 것이라 믿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이 사실만을 바탕으로한 정통 역사극이 아닌 과장이 심한 무협영화임을 감안한다면 거대한 불상이 안겨다주는 스펙타클은 충분히 영화의 재미를 더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초반, 거대한 불상이 이 영화의 스펙타클을 이루고 있다면 영화의 중반부는 수세기 전 지진으로 땅 속에 묻힌 이후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지하도시인 귀도시가 이끌고 있습니다.

이 두 스펙타클은 하나의 영화에서 초반과 중반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서로 정반대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거대한 불상이 화려함과 거대함으로 스펙타클을 이룬다면 귀도시는 지하도시의 미스터리하고 신비한 분위기로 스펙타클을 이루어 냅니다.

사회에 버림받고 외면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귀도시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화려하고 거대한 불상과는 또 다른 느낌인데, 그러한 오싹한 분위기 속에서 벌어지는 액션과 추격전은 그래서인지 더욱 독특하게 느껴집니다.

서극 감독의 역량이 느껴지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관객에게 지루함을 느낄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분위기를 바꾸어가며 중국무협영화 특유의 스펙타클로 영화의 재미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이 식상한 장르의 영화이면서도 제겐 전혀 식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첫번째 이유였습니다.

 

 

주목! 이빙빙

 

중국무협영화 특유의 스펙타클이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의 첫번째 재미입니다. 하지만 스펙타클만으로는 영화의 전체를 이끌어나가기엔 역부족입니다. 우린 이미 수도 없이 속빈 블록버스터들을 경험했었고, 그러한 영화들은 화려한 스펙타클만으로 관객을 현혹시키려 노력하다가 부실한 스토리 라인으로 대부분 흥행 실패를 경험했었죠. 결국 아무리 거대한 스펙타클이 존재한다고해도 흥행 여부는 탄탄한 스토리 라인인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측천무후의 측근인 정아(이빙빙)의 캐릭터는 그 누구보다도 중요했습니다.

정아는 상당히 복합적인 캐릭터입니다. 측천무후는 카리스마를 유지하기만 하면 되었고, 적인걸은 주인공답게 멋있게 보이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정아는 아닙니다. 이 영화의 모든 스토리 라인의 중요한 열쇠를 그녀 혼자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선 측천무후의 카리스마를 지키기 위한 수족 역할을 해야 하고, 적인걸이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보조 역할도 수행해야 하며, 측천무후를 위해 적인걸을 감시함과 동시에 그와 사랑에도 빠져야 했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캐릭터를 이빙빙은 무리없이, 아니 완벽하게 해냅니다. 만약 이 영화에서 이빙빙이라는 배우에게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영화를 재미있게 보기는 애초에 틀렸다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역할은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에서 절대적입니다.

고아인 자신을 받아준 측천무후를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 적인걸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느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당당하지만 가녀리고, 측천무후의 황제 등극을 반대했던 적인걸에게 반감을 갖고 있지만 어쩔수 없이 그에게 빠져드는, 이런 상반된 감정을 이 어린 배우가 해냈다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이빙빙을 주목해봐야할 충분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빙빙의 연기에서 [동방불패]의 임청하가 연상되었을 정도로 그녀는 제게 매력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이빙빙이 있었기에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은 단지 중국무협영화 특유의 스펙타클만 내세운 영화가 아닌 캐릭터가 살아있고, 음모와 배신, 그리고 로맨스가 한데 어우러진 재미있는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수기의 시작... 느낌이 좋다.

 

이빙빙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지만 그 외에도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유덕화는 여전히 편안하면서도 멋있었고, 배동래 역을 맡은 등초라는 배우 역시 꽤 인상 깊었습니다. 단지 사타충을 연기한 양가휘가 약간 어색한 느낌이었는데... 그렇게 눈에 거스릴 정도의 어색함은 아니었으니 이 영화를 즐기는데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영화의 스펙타클을 받쳐주는 스토리 라인도 괜찮은 편이었는데, 적인걸이 인체자연발화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전개 방식이 너무 우연에 치우치지도 않았고, 각 장면마다 색다르게 펼쳐지는 홍금보 무술 감독이 연출한 액션씬도 무협영화의 재미를 제대로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단지 사타충이 적인걸에게 단서를 제공하는 장면이 조금 어색했습니다. 그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적인걸이 인체자연발화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게 하기 위한 무리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그러고보니 제가 느낀 이 영화의 유일한 단점은 사타충이 전부 지니고 있네요. ^^)

 

전체적으로 본다면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은 충분히 즐길만한 영화였습니다. 중국무협영화 특유의 과장은 있었지만 눈쌀을 찌푸릴 정도로 심하지도 않았고, 과하지 않는 정당한 스펙타클과 단순하지 않은 스토리 라인의 조화, 그리고 주연 배우들의 매력까지.

사실 극장가의 비수기에 개봉하는 영화들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재미가 없으니 성수기가 아닌 비수기로 개봉 시기가 밀린 것이라는...

하지만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을 보고나니 굳이 그러한 선입견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10월의 기대작들에 대한 기대감이 팍 증가해 버렸습니다. 특히 오우삼 감독과 정우성, 양자경 주연의 [검우강호]는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과 같은 무협 장르의 영화이면서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서극 감독과 함께 열었던 오우삼 감독의 영화라는 점에서 더욱더 기대됩니다. [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덕분에 10월의 시작이 좋았으니 나머지 10월의 개봉작들도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중국무협영화의 재미를 다시 되찾았다.

그래, 이 맛으로 난 지금까지 중국영화를 좋아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