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김지운
주연 : 이병헌, 최민식
개봉 : 2010년 8월 12일
관람 : 2010년 8월 13일
등급 : 18세 이상
나는 극장 안에서 극장예절을 전혀 모르는 악마를 보았다.
4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지난 금요일 회사에 복귀했습니다. 휴가 기간동안 극장에서 영화라고는 [오션스]와 [토이 스토리 3] 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토이 스토리 3]가 너무나도 기대 이상이어서 나름 보람찬 휴가였다고 자평합니다.
저보다 하루가 긴 5일 휴가를 얻은 구피는 제가 회사로 복귀하는 그날도 웅이와 달콤한 늦잠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회사에서 열심히 밀린 업무를 보던 제게 전화해서는 오늘이 자신의 휴가 마지막 날이니 친구들과 만나며 개인적인 시간을 갖겠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자긴 친구들과 놀다가 늦을테니 저보고 회사 끝나면 영화나 한 편 보고 오라고 합니다. 칫! 나는 휴가 기간동안 친구도 못만나고 운짱노릇만 했는데...
암튼 구피의 예상치 못했던 선언 덕분에 저 역시 웅이는 처가집에 맡기고 혼자 '프리'하게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일찌감치 구피가 '난 저 영화는 안 볼꺼야.'를 선언했던 [악마를 보았다]가 그날 제가 선택한 영화였죠. 사실 [악마를 보았다]를 보기 전에 이 영화가 상당히 잔인하고 불편한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잔뜩 긴장을 하며 눈에 힘을 주고 있었죠.
그런데 그러한 제 긴장감을 깨뜨리는 분이 계셨으니 제 옆에 앉으신 중년의 여성 관람자였습니다. 조금 느지막하게 들어와 한참을 부스럭거리시더니 김밥을 꺼내 맛나게 드시더군요. 저 역시 그랬던 적이 있기에 그런 것 쯤은 참았습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지만)
하지만 영화의 초반... 경철의 잔인한 살인행각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 순간 청아하게 울리는 그 분의 핸드폰. 정말 비명을 질러 버리고 싶었지만 핸드폰을 진동 모드로 하는 것을 잊을 수도 있었겠다 싶어서 역시 참았습니다. 그런데 태연하게 그 전화를 받아 통화까지 하시더군요. 아마도 부동산 중개업을 하시는 분 같던데...(상대편 통화 내용까지 전부 들렸습니다.) 정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영화에서 너무 긴장된 순간,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밖으로 나가시는 겁니다. 영화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그 분이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면서 저도 모르게...'제엔장~'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몇 초동안 저를 째려보시던 그 분은 상당히 아니꼬운 목소리로 '죄송해요~'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휑하니 밖으로 나가셨다가 10분 후쯤 역시 제 영화에 대한 집중력을 깨뜨리고 자리에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어머 어떻게 해', '문을 열어주면 안되'라며 영화보는 내내 맛깔스러운(?) 추임새로 제 영화 감상을 방해하셨습니다. 그날 제게 있어서 악마는 살인마 경철도, 잔인한 복수를 꿈꾸는 수현도 아닌,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하시는 바로 그 분이었습니다.
소문대로 잔인했다. 하지만...
극장 예절이라고는 전혀 모르시는 악마같은 그 분 덕분에 [악마를 보았다]의 감상이 상당 부분 방해를 받았지만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해 영화에 집중하며 관람하였습니다.
일단 [악마를 보았다]는 소문대로 상당히 잔인하였습니다. 신체 절단은 예사고, 강간, 식인 장면 등등 결코 편하지 않는 장면들이 아예 작정을 한 듯이 영화 상영 내내 절 괴롭혔습니다. 물론 간혹 경철(최민식)의 볼을 뚫어 버리는 수현(이병헌)의 송곳 장면처럼 미숙한 CG로 인하여 가짜임이 확연히 드러나는 장면도 눈에 띄었지만 이 정도면 한국영화 사상 가장 잔인한 영화라고 평가해도 될만큼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줬습니다.
만약 김지운 감독이 관객에게 잔인함을 보여 주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성공한 셈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잔인함이 아닌 뭔가 다른 메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안타깝지만 그것은 실패한 듯이 보입니다. 이 영화의 메세지는 잔인함에 함몰되어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간혹 시각적인 효과에 매몰되어 정작 하고자 하던 스토리의 힘을 잃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에선 주로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 화려한 특수효과에만 매달리다가 단순 무식한 스토리 라인으로 인하여 '골 빈 블록버스터'라는 비아냥만 받는 경우가 많은데, [악마를 보았다]는 비록 '골 빈 블록버스터'는 아니지만 비슷한 사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은 간단합니다. 약혼녀의 잔혹한 죽음 앞에서 복수를 맹세한 수현은 살인마인 경철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복수를 합니다. 바로 잡았다 놔주며 그가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것이죠. 그러한 과정에서 김지운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메세지 역시 간단합니다. 바로 '복수의 허무함'일 것입니다. 짐승보다 못한 경철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수현 역시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 되었지만 결국 그 복수의 끝은 달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간단한 스토리 라인과 간단한 메세지는 제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합니다. 너무 강렬한 잔인함 때문이죠. 이 영화를 보고나서 과연 수현의 서글픈 복수의 허무함에 공감했을 관객이 몇이나 되었을지 개인적으로 궁금할 정도입니다.
내가 수현이라면...
전 영화는 관객과의 공감대 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의 주인공에게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와 함께 웃고, 울고, 두려워하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전 그것이 진정한 영화의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의 수현은 절 전혀 공감시키지 못했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약혼녀를 짐승보다 못한 살인마에게 잃은 그의 분노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가 경철에게 행한 잔인한 복수는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복수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경철을 잡았다 놓아주는 것을 반복하며 그가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죽음보다 더욱 괴로운 것은 두려움이라는 것을 수현은 알고 있었고, 그것을 복수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일단 그것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수현은 경철의 두려움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합니다. 경철은 오히려 수현과의 게임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현 역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방법을 바꾸었어야 했습니다. 그가 거리를 활개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어야 했고, 그를 향한 폭력도 강도를 더욱 쎄게 했어야 했습니다.
제가 수현이라면... 경철을 가두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서서히 그에게 폭력을 가했을 것입니다. 첫 날은 손톱을 뽑아버리고, 둘째 날은 혀를 뽑아 버리고, 세째 날은 팔목을 잘라버리고, 넷째 날은 발목을 잘라버리고, 그렇게 그에게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육체적 고통을 느끼며 죽도록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현은 경철을 자유롭게 놓아둠으로써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했고, 그에게 가한 폭력이라고는 팔목 부러뜨리기, 아킬레스건 절단 등 강도도 상당히 약했습니다. 김지운 감독은 정작 잔인해야 할 수현의 복수는 약하게 표현했고, 그 대신 경철의 행각에 잔인함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니 수현의 복수에 공감이 될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왜 복수를 저 따위로 밖에 못해서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키는 것인지 답답할 따름이었습니다.
김지운 감독은 박찬욱 감독이 되고 싶었나보다.
전 김지운 감독의 영화를 좋아합니다. 그의 감독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에서부터 최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까지... 그가 가지고 있는 유머 감각이 좋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관객과 어느 정도 타협한 하드 보일드한 영상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에서 김지운 감독의 스타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이 영화에 대한 기본 정보를 아무 것도 모른채 봤다면 전 십중팔구 박찬욱 감독의 영화일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박찬욱 감독이 [복수는 나의 것], [올드 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이루어진 이른바 복수 3부작을 연출했기 때문입니다. [악마를 보았다]의 스타일과 주제는 제가 보기엔 바로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경철이 수현에게 쫓기다가 찾아간 인육을 먹는 태주의 별장 장면은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연상시키기도 했는데, 그 씬에서 나온 세정의 외모와 분위기가 [박쥐]의 김옥빈과 너무 비슷하여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결국 [악마를 보았다]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제겐 불합격을 받은 영화입니다. 수현의 복수는 공감이 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복수의 속 시원함도, 혹은 복수의 허무함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영화 자체가 김지운 감독의 영화라기 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같은 분위기가 풍겨 김지운 감독의 영화를 보러 간 절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고, 의미 없어 보이는 잔인한 장면들과 불편한 장면들만이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만약 이 영화에서 한국영화 사상 가장 잔인한 영화라는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 공감하겠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아! 한가지 이 영화를 보고나서 바뀐 것은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던 날,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구피를 기다리는 제 마음은 타들어 갔습니다. [악마를 보았다]의 경철과 같은 범죄자들이 이 세상에 널려 있다는 불안한 생각에 혹시 내 가족이 그 희생양이 되지 않을지 걱정되더군요. 김지운 감독이 원했던 것이 그러한 관객들의 불안심리를 끄집어 내는 것이라면 최소한 제겐 성공한 것 같습니다.
차가워서 지독한 복수도, 뜨거워서 잔인한 복수도, 내겐 무의미 했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난 찬성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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