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정범
주연 : 원빈, 김새론
개봉 : 2010년 8월 4일
관람 : 2010년 8월 4일
등급 : 18세 이상
아저씨라는 호칭이 싫었다.
어렸을 적엔 좀 더 나이가 들어보이고 싶어 안달이 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땐 같은 또래끼리도 형이라는 호칭을 듣고 싶어 했고, 여자아이들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았던...
서른 즈음이 되니 어떻게하면 나이가 적어 보일까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길에서 낯선 사람이 길을 묻더라도 '아저씨!'라고 부르면 기분이 나빠 길도 대충 가르쳐 주지만, '학생!'이라고 부르면 괜히 기분이 좋아 길을 직접 안내까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되니 이젠 그러한 호칭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모든 호칭이 '아저씨'로 통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회사에서 직원들은 제 성에 직책을 붙여 부르고, 집에선 '아빠, 자기, 웅이아범.'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우지만 낯선 사람들이 저를 부를 땐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이미 오래 전에 통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솔직히 그러한 '아저씨'라는 호칭이 듣기 좋지는 않았습니다. '아저씨'라 하면 여름엔 런닝에 반바지 차림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동네를 거닐고, 술에 취하면 거리 아무 곳에나 소변을 싸고, 똥배는 볼룩 튀어 나오고, 머리 숱은 점점 없어지고, 뭐 그런 나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이 '아줌마'라는 호칭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암튼 전 제가 싫던, 좋던, 아저씨입니다. 아직 런닝 차림으로 집 밖을 나가는 짓은 못하고, 술을 아무리 마셨어도 소변은 꼭 화장실에서 싸는 초보 아저씨지만 28 사이즈를 자랑하던 날씬했던 허리가 이젠 32 사이즈를 넘어 점점 볼룩해지고, 머리를 감을 때마다 수북하게 빠지는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아저씨의 전형적인 외모가 되어 가는 것을 어쩔수 없이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저씨'라는 호칭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영화 [아저씨]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뭐 이런 촌스러운 제목의 영화가 있냐?'고 못마땅했습니다. 게다가 '아저씨'역에 중년 남자 배우가 아닌 원빈이 맡았으니 더더욱 이 영화는 제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제가 가지고 있는 '아저씨'라는 호칭의 편견을 시원스럽게 날려줬습니다. 그래서 전 이 영화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원빈... 아저씨가 되기까지...
영화를 보기 전에 가장 의아했던 것은 '왜 하필 원빈이냐?' 였습니다. 과연 원빈이 거리를 거닐고 있다면 그에게 '저기요, 아저씨!'라고 부를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그가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원빈의 외모를 보고 '아저씨'라는 호칭을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도 이젠 '아저씨'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나이입니다. 그가 1977년 생이니 나이도 어느새 3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으며, 군대에도 갔다온 예비역이니 '오빠'라는 호칭으로 불리기엔 좀 어정쩡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그의 출연작에서도 드러나는데... 영화 [킬러들의 수다], [태극기 휘날리며], [우리 형]에서 원빈은 언제나 귀엽고, 반항적인 누군가의 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군대 제대후 출연한 [마더]에서는 약간 모자라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지만 누구의 동생 이미지에서 탈피를 하였고, [아저씨]에선 드디어 그의 어른스러운 카리스마가 맘껏 발휘된 것입니다.
그는 더이상 귀엽고, 반항적인 동생이 아닙니다. 그리고 젊은 오빠로써의 이미지도 [아저씨]도 간단하게 벗어 던졌습니다. 군대 가기 전 원빈은 그 곱상한 얼굴로 인하여 자신이 쌓아 올린 이미지의 벽에 갇힌 느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연기 생활을 길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도 어찌되었건 나이를 먹을 것이고, 미소년 이미지는 세월이 지나면 그가 원치 않더라도 깨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군대 제대를 기점으로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를 깨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에 의해 어쩔수 없이 깨진 것이 아닌 스스로 깨뜨렸다는 것이 원빈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에 안주하는 게으른 배우가 아닌 스스로 이미지를 깨뜨릴줄 아는 용감한 배우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저씨]에서 그의 진가가 발휘됩니다.
결국 [아저씨]의 가장 큰 무기는 '아저씨'라는 호칭을 두려워 하지 않은 원빈의 과감한 이미지 변신입니다. 그가 이렇게 영리한 배우였음을 [마더]에 이어 다시한번 깨닫게 됨으로써 제 개인적으로는 원빈이라는 배우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습니다.
그를 '아저씨'라 불러준 소중한 아이.
하지만 아무리 원빈이 '아저씨'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쳐도 아무도 그에게 '아저씨'라고 불러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극중 태식(원빈)에게 '아저씨'라고 불러주는 소미(김새론)의 역할이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김새론은 귀여운 외모를 가진 아역 배우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인형 같은 외모를 가진 아역 배우들이 차고 넘치는 현 상황에서 솔직히 김새론의 외모는 평범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은 적중했습니다. 원빈이 '아저씨'라면 김새론은 이웃의 평범한 꼬마 여자아이였어야 함이 마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웃집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여자아이 말입니다. 제게 다가와 '아저씨'라고 부를 것만 같은... 그러한 김새론의 평범한 외모는 이 영화에 집중하는데 더욱 도움을 주었습니다.
자! 모든 것은 준비가 되었습니다. 원빈은 '아저씨'가 되었고, 그에게 '아저씨'라고 불러주는 아주 평범한 여자 아이도 있습니다. 이제 이 영화는 끊임없이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영화의 내용은 모두들 아시겠지만 어른들이 저질러 놓은 추악한 범죄에 말려들어 납치된 소미를 구하지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 태식의 무한 액션이 이 영화의 주요 줄거리입니다.
자신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아내와 뱃 속의 아기를 잃고 동네 허름한 전당포에 숨어 살다시피 하던 태식. 그에겐 자신을 '아저씨'라 부르며 친근하게 따라주는 소미가 전부였고, 아내와 뱃 속의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소미를 지키겠다는 의지로 나타납니다. 이 영화는 이때부터 한국영화에선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하드보일드한 액션을 펼쳐 보입니다.
진화된 하드보일드, 그리고 결론은 아저씨 만세!
사실 [아저씨]를 보러 가며 한국판 [레옹]을 예상했었습니다. 하지만 [아저씨]는 [레옹]에 멈추지 않습니다. 날카로운 칼이 살을 파고 들어 뼈를 으스러트리는 생생한 소리와 적을 제압하는 현란한 액션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잔인합니다.
하드보일드... 우리 영화에선 그다지 친숙한 이름이 아닙니다. 제 기억으로는 박찬욱 감독이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형 하드보일드를 선보였습니다. 당시 이 영화를 함께 봤던 여후배는 영화가 끝나고 화장실에서 한참을 토하고 나왔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복수는 나의 것]의 하드보일드는 약해보였습니다. 코믹 이미지가 강한 송강호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고, 당시만해도 할리우드의 잔인한 영화를 꾸준히 봄으로써 이미 만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저씨]는 달랐습니다. 이 영화의 액션은 단순히 적을 쓰러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하드보일드가 10년이라는 세월동안 이렇게 진회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구피는 오로지 '원빈, 멋있다!'라는 감탄사만 반복합니다. 원빈같은 꽃미남 스타일을 싫어한다는 구피는 이 영화를 통해 아주 제대로 원빈에게 꽂힌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동안 '아저씨'라는 호칭을 싫어했지만 [아저씨]라는 제목이 떡하니 붙은 이 영화의 관람 이후 사실 부끄러운 것은 '아저씨'라는 호칭이 아닌 부끄러운 짓을 하는 남자 어른들의 행동임을 느꼈습니다. 내 자신이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아저씨'라는 호칭을 싫어할 이유가 없는 셈이죠. 원빈 처럼 잘 생긴 남자도, 태식처럼 터프한 남자도 자신이 '아저씨'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결국 [아저씨]는 우리나라의 진일보한 하드보일드 액션의 진수를 맛봄과 동시에 배우 원빈을 재발견하게 하였으며, 내 자신이 아저씨임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부심까지 안겨줬습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아저씨들의 위상을 드높인 영화인 셈입니다.
대한민국 아저씨들이여!
아저씨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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