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로만 폴란스키
주연 : 이완 맥그리거, 피어스 브로스난, 올리비아 윌리암스
개봉 : 2010년 6월 2일
관람 : 2010년 6월 8일
등급 : 15세 이상
뚜벅이족의 최후
저는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뚜렷했습니다. 한번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좋아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프로야구 구단인 두산 베어스입니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그냥 아무 생각없이 곰 캐릭터가 귀엽다는 이유로 좋아하기 시작한 것이 30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 세월 동안 단 한번도 바뀐 적이 없었습니다. 싫어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인데 제가 싫어하는 것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영어, 수영, 그리고 운전입니다.
그 중 운전은 참 오랫동안 절 괴롭혔습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동안 운전면허 취득조차 하지 않았던 제게 회사의 상사는 남자가 운전면허도 없다고 매일 갈구었습니다. 하지만 전 떳떳하게 대한민국이라는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너도 나도 자가용을 가지면 교통 문제와 환경 오염 문제 등이 발생하여 나라도 운전을 안하고 자가용을 안 사겠다고 버텼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버틴다고 되는 일은 아니더군요.
결국 다니던 회사에서 정리해고가 되고(물론 운전을 못해서 해고된 것은 아닙니다.) 집에서 쉬며 제 고집을 꺾고 운전면허를 취득하였습니다. 하지만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나서도 운전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8년이 흘렀고 제 운전면허는 장농 속에서 고이 잠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사장님과의 면담 시간에 사장님께서 제게 대뜸 '왜 운전을 안하나?'라고 물으시더군요. 그때 뜨끔했습니다. 그렇게 사장님과의 면담이 끝나고 전 당장 차를 구입하기 위한 계획을 착수했습니다. 20대 젊은 나이였다면 '내가 운전을 하던 말던 자기가 뭔 상관이래?'라며 버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한 가정을 이끌어 나가야할 가장이고, 사장님에게 찍혀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더 이상 갈 곳도 없는 초라한 30대 후반입니다.
결국 구피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쪼들리는 생활비를 쪼개고 쪼개서 자동차 구입비용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해서 결국 자동차 영업사원과 상담을 마치고 이제 제 인생의 첫 자가용을 구입할 단계가 코 앞에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왜 이리도 씁쓸하죠? 30대 후반의 나이라는 것은 어린 시절처럼 제가 싫다고해서 무조건 안하고 버틸 수 있는 나이가 아닌가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어쩔수 없이 원활한 회사 생활을 위해서 마음에도 내키지 않는 차를 사야 했다면, 그는(이완 맥그리거) 돈 때문에 마음에도 내키지 않는 영국 전 수상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전기 작가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에이전트는 큰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떠벌리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떨떠름합니다. 하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그는 결국 아담 랭의 전기를 쓰기로 결심하고 맙니다.
[유령작가]는 그렇게 시작합니다. 정치에 대해서 전혀 관심조차 없었던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치의 최대 쟁점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음모에 맞서게 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숨을 걸고 진실을 파헤치게 됩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니다. 그는 결코 정치적이지도 않고,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단지 물 흐르듯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 모든 음모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제가 눈여겨 본 것은 유령작가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음모의 한가운데에 빨려 들어가는 것인가? 입니다.
그런 면에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매우 섬세하게 유령작가의 심리 변화를 그려냅니다. 처음엔 모든 것에 무관심이었던 그가 작가로써의 직업 정신이 발동하여 아담 랭의 과거를 뒤쫓게 되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전임자가 남김 메모와 사진을 통해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그 호기심은 그를 사건의 진실에 한걸음씩 다가가게 만들었고, 그러다보니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나중에는 진실이니, 뭐니 전부 집어치우고 단지 전임자처럼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살기 위해 진실에 매달리게 됩니다.
유령작가가 진실에 다가서는 이 흥미로운 과정들 덕분에 이 영화는 기존의 스릴러 영화들과는 차별성을 갖게 됩니다. 기존의 스릴러 영화들은 지나치게 정의롭고, 지나치게 용감한 등장인물 때문에 쉽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지만 이 영화는 겁많은 소시민인 저라도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군요.
조용한 스릴러
이렇게 [유령작가]의 스릴은 상당히 소시민 적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의 분위기 역시 특출나지 않고 오히려 잔잔합니다. 음악은 최대한 자제되었습니다. 정말 꼭 필요한 순간에만 아주 단조로운 음악이 흐를 뿐입니다.
유령작가가 진실을 파헤치는 그 모든 과정도 특출나지 않습니다. 뛰어난 추리력과 날렵한 몸동작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고, 그저 눈에 보이는 단서들을 가지고 아주 평범한 추리를 해내고 지레 겁을 집어 먹는 것이 전부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분위기는 떠들썩하고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것 같은 할리우드 스릴러와 비교한다면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제게도 2시간이 약간 넘는 러닝 타임이 길게 느껴졌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조용함은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의 분위기에 빠져 생각할 틈도 없이 정신없이 빠져들어야 했던 할리우드 스릴러와는 달리 이 영화의 조용함은 내 스스로 생각할 여유와 주인공이 느꼈을 위협을 영화를 보는 내 자신도 똑같이 느끼는 색다른 긴장감을 선사했습니다.
외딴 섬이라는 외부와 차단된 조용한 공간 역시 쉽게 빠져 나갈 수 없는 갑갑함으로 영화를 보는 절 짖눌렀고, 섬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수단인 배는 오히려 위험한 죽음의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정치인 특유의 거짓된 미소를 짓는 아담 랭과 그의 측근들이 전부 의심스러웠고, 그가 뒤쫓는 이 모든 단서가 어쩌면 의도된 함정일지도 모른다며 걱정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조용함이 제게 선사한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입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거장 답게 호들갑을 떨며 떠들석하게 분위기를 조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느긋하게 적막함을 즐기며 여백을 놔두어 관객 스스로 스릴러의 긴장감을 느끼도록 배려합니다. 물론 그러한 그의 시도가 지루함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린 너무나도 할리우드식 스릴러에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 그런 조용함이 좋았습니다. 제가 만약 다른 사람에게 쫓길 때 열심히 뛰는 제 주위에 긴박한 음악이 흐르지 않습니다. 단지 제 심장 박동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관객 스스로 그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마지막 반전의 아쉬움.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가 이 영화의 모든 것에 완벽하게 만족한 것은 아닙니다.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와는 차별되는 조용함이 주는 긴장감도 좋았고, 배우들의 연기력 역시 논란의 여지없이 최고였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음모의 한가운데에 서 있게 된 유령작가와 온갖 배신이 난무하는 정치 세계의 묘한 조합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마지막 반전이 가져다준 결말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왜 그가 목숨을 내걸고 마지막 모험을 했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정의감에 불타는 히어로나 할 짓이지,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음모의 한가운데에 서있었기에 살기 위해 어쩔수없이 진실에 매달렸던 소시민이 할 짓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신과 맞지 않는 영웅 짓거리를 한 댓가는 결국 거리에 흩날리는 진실처럼 허무했습니다.
제가 원치 않던 자가용을 어쩔수 없이 구입해야 했던 것처럼 유령작가는 진실을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침묵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이미 자신이 맞설 수 없는 너무 거대하고 치밀한 상대임을 알면서도 그가 선택한 용기는 무모했습니다.
저라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했을 것입니다. 이미 마음만 먹으면 나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는 조직임을 경험했는데 겨우 영웅심리 하나로 맞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유령작가의 마지막 선택이 아쉬웠던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진실을 찾아 파헤치는 영웅을 그린 할리우드 스릴러와는 차별된 내 자신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캐릭터를 구축해 놓고 마지막에 가서 할리우드 스릴러의 캐릭터를 쫓아갔으니 말입니다. 물론 그의 선택에 따른 결말은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와는 많이 달랐지만 말이죠.
영화가 끝나고 구피는 '재미있었어?'라며 시큰둥한 표정으로 묻습니다. 아마도 재미가 없었나봅니다. 하지만 전 재미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에 나의 의견을 떳떳하게 말하고 내세울 수 없는 유령작가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 영화는 마지막 결말을 제외하고는 이 영화의 구성과 캐릭터가 제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로만 폴란스키... 그의 영화는 호들갑을 떨지도, 서두르지도 않는다.
느리고 긴호흡으로 긴장감을 최대치로 끌어 올릴줄 안다.
그래서 그가 거장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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