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0년 영화이야기

[페르시아의 왕자 : 시간의 모래] - 모래의 스펙타클 미학

쭈니-1 2010. 5. 31. 17:17

 

 

 

감독: 마이크 뉴웰

주연 : 제이크 길렌할, 젬마 아터슨, 벤킹슬리, 알프레드 몰리나

개봉 : 2010년 5월 27일

관람 : 2010년 5월 30일

등급 : 12세 이상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지난 일요일, 저는 제 마지막 여자친구의 결혼식장에 다녀왔습니다. 결혼해서 여덞살난 아들이 있는 제게 여자친구가 웬 말이냐? 라고 의아해 하시는 분들도 계실테지만, 이성하고도 진정한 우정을 쌓을 수 있다고 항상 믿어왔기에 어렸을 때부터 이성친구 사귀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애는 많이 못해봤습니다.)

암튼 결혼하고 나서 젊은 시절 사귀었던 여자친구들도 하나, 둘씩 결혼하고 서서히 연락이 끊겨 버렸었는데, 유일하게 골드 미스를 외치며 독신을 주장하던 친구가 지난 일요일에 결국 독신 생활을 마감하고 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 동안 그 친구에게 참 많은 남자들을 소개시켜 줬었습니다. 제 친구는 물론이고, 회사 동료에, 친인척까지... 제가 소개시켜 줄 수 있는 남자는 모두 소개시켜줬는데 그 많은 남자들을 모두 마다하더니 결국 자신의 학교 동창과 결혼을 해버리네요.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입니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IMF로 취직을 하지 못했던 저는 정부에서 실업자 구제 정책으로 시행하던 정보화근로사업에 참여하였고, 그녀와 한 팀이 되며 우정을 쌓아 갔습니다.

서른을 앞둔 나이에 직장조차 변변하게 없었던 우리는 그래도 서로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며칠 남지 않은 20대의 마지막 날들을 유쾌하게 (술과)함께 보냈답니다.

그녀의 결혼식장에는 당시 저희 패거리였던 친구도 오랜만에 참석하였는데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도 하며 유쾌하게 수다를 떨었습니다.

10년 전, 당시엔 웃고 떠들면서도 직장이 없던 하루 하루가 불안하고 암담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저는 찬란한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고, 뭐든 마음만 먹으면 새롭게 출발을 할 수가 있는 나이였습니다. 왜 그땐 몰랐을까요?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가 있다면 불안한 미래를 정보화근로사업을 해서 벌은 푼돈으로 매일 술을 마시며 보냈던 그 시절로 돌아가 뭔가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마흔을 앞둔 나이에 새신부가된 제 마지막 여자친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모래가 있다.

 

그녀의 결혼식 후, 구피와 오랜만에 극장 나들이를 나섰습니다. 한동안 극장에 가지 않아 보고 싶은 영화가 넘쳤지만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페르시아의 왕자 : 시간의 모래]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왕자 : 시간의 모래]는판타지 장르의 영화였고, 구피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 역시 판타지 영화이기에 다른 영화를 고를 필요가 전혀 없었죠.

영화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느 신비한 나라에 시간을 거슬러 올아갈 수 있는 신비의 모래가 있었고, 그 모래를 차지하게 위해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왕국에서의 궁중 암투가 벌어진다는 내용입니다.

처음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모래라고?'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아무리 판타지 영화라고 하지만 기본 소재가 유치하다면 영화 자체가 유치해질 수 있기에 '시간의 모래'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이 영화는 유치해질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이크 뉴웰 감독은 그렇게 어리석 감독이 아니었습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을 연출했던 마이크 뉴웰 감독은 '시간의 모래'라는 충분히 유치해질 수 있는 소재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내면 깊숙히 감추었던한 한 남자의 탐욕을 멋들어지게 그려냅니다.

그와 더불어 페르시아라는 이국적인 풍경의 고대 왕국을 통해 판타지의 공간을 효과적으로 창조해 냈으며, 모래가 가지고 있는 스펙타클함을 이끌어 냄으로써 지구상의, 아니 지구 밖의 물체에 대해서도 스펙타클한 의미를 부여하는 할리우드의 경향에 발 맞춰 나아가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전 이 영화를 상당히 재미있게 봤습니다. 영화의 마무리 부분이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영화를 이끌어 나가는 스토리 라인도 제법 정교했고, 주연 배우들의 매력도 출중했으며, 특수효과는 멋있었고, 액션씬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무리 부분만 조금 더 다듬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어차피 [반지의 제왕]처럼 작품성을 담보로 하는 판타지 영화가 아닌 다음에야 관객들이 좋아하는 해피엔딩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려한 이 영화의 시도에 반기를 들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모래가 이토록 스펙타클해 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쩌면 제가 판타지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관대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아니 분명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 영화는 분명 장점이 단점보다 많은 영화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고대 왕국 페르시아의 고풍적인 풍경은 영화를 보는 내내 놀라울 지경이었고, [투모로우], [브로크백 마운틴], [브라더스]를 통해 흥행성 있는 영화와 작품성 있는 영화들 사이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제이크 길렌할의 매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타이탄]에 이어 [페르시아의 왕자 : 시간의 모래]에 까지 판타지 영화의 여주인공을 맡은 젬마 아터튼은 마치 [스콜피온 킹]에서 카산드라를 연기했던 켈리 후를 연상시켰는데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검은 색의 머리와 신비함, 그리고 강렬함까지 고루 갖춰 영화를 보는 재미를 더해줬습니다.

  

그 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모래가 스펙타클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모래의 스펙타클함은 예전에 [미이라]에서 잠깐 선보이기도 했지만 당시엔 이렇게 놀라운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왕자 : 시간의 모래]는 모래만으로 압도적인 스펙타클함을 선사합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얼음의 스펙타클함을 과시했던 [투모로우]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두 영화 모두 제이크 길렌할이 출연하는 군요.) 예상외의 것에서 느끼는 스펙타클함에 대한 쾌감은 꽤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사방을 에워싼 사막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거칠게 몰아부치는 모래 폭풍의 위용, 서서히 다가오는 모래 속의 위험까지... 이 영화의 모래는 시종일관 놀라운 판타지적 재미를 안겨줍니다. 모래가 이토록 스펙타클한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당신에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모래가 있다면? 

 

제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앞서 언급한 끝 마무리였습니다. 음모는 너무 쉽게 드러나고, 이룰 수 없었던 슬픈 사랑은 어느 순간 해피엔딩으로 변해 버립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아갈 수 있는 능력은 결국 이 영화의 결말을 모조리 바꿔 버렸는데...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좋아하는 제게 해피엔딩을 위해 소모된 시간여행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결국 '시간의 모래'를 통해 과거를 바꿔 자신이 가질 수 없었던 것을 가지려 했던 한 남자는 '시간의 모래'로 인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철저한 권선징악적인 결말이죠.

영화를 보고나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내게 '시간의 모래'가 있다면 난 어떻게 썼을까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기 위해 애썼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것이었지만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을까요?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것을 지키는데 사용했을까요?

 

신은 인간의 더러운 욕망을 멸하려 하지만 한 소녀의 용기로 이를 잠시 유보합니다. 하지만 '시간의모래'를 남겨 둠으로써 인간의 멸망을 아예 거둬둘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시간의 모래'일까요?

'시간의 모래'는 인간의 욕망을 뜻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도 시간을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시간을 지배할수 있다면 그는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시간의 지배는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입니다.

자신의 영역을 거슬러 신의 영역을 넘보는 인간의 욕망을 알기에 아마도 신은 '시간의 모래'를 남겨두고 인간의 욕망을 부추겼을 것입니다.

만약 제게 '시간의 모래'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냐고요? 전 그냥 놔둘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걸어온길은 온전히 제가 선택한 길이고, 그렇기에 제가 책임져야할 길입니다. 그러한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은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 무기력했던 20대 시절을 바꾸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기력했던 순간도 제겐 추억이고, 그러한 날이 있었기에 나이 마흔 가까이 되어 새신부가 된 내 마지막 여자친구도 있었을 것이며, '그때 우린 참 한심했어.'라고 웃고 떠들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작은 행복들이 제가 지나온 과거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제겐 '시간의 모래'가 굳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시간의 모래'를 거부하는 것은 과거를 바꾼다고 해서

내가 현재 가진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며 즐거워하는 지금 자체만으로도 난 충분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