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임상수
주연 : 전도연, 이정재, 윤여정, 서우
개봉 : 2010년 5월 13일
관람 : 2010년 5월 13일
등급 : 18세 이상
돈이 없다면 이 세상은 불친절하다.
여러분들은 어떠한가요? 세상이 여러분들에게 친절하던가요? 글의 서두에서부터 이런 자극적인 질문을 던지는이유는 [하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칸 영화제에서 경쟁부문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고 있는 [하녀]는 개봉 전부터 은근히 제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화였습니다.
물론 그러한 제 호기심중에는 전도연의 노출씬에 대한 호기심이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1999년 12월 극장에서 [해피 엔드]를 보았을 때의 그 충격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니까요. 당시까지만해도 전도연은 [접속], [약속], [내 마음의 풍금]에 출연했던 청순하고 귀여운 여배우였습니다. 그런데 [해피 엔드]라는 파격적인 영화를 통해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해피 엔드]의 노출씬은 충격적인 영화의 스토리 라인과 더불어 굉장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파격적인 변신을 두려워 하지 않는 배우를 좋아하는 저로써는 [해피 엔드]를 보고 마음 속으로 맘껏 박수를 치며 전도연이라는 배우에 흠뻑 빠졌었습니다.
[하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은 고작 전도연의 노출씬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습니다. 고전 영화에 대한 토양이 턱없이 부족한 한국 영화의 현실에서 50년전 영화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리메이크했다는것도 제 호기심을 자극했고, 전도연, 이정재, 서우라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배우의 조합도 궁금했으며, [처녀들의 저녁식사], [바람난 가족], [그때 그 사람들] 등 문제적 영화를 끊임없이 만드는 임상수 감독의 연출력이 이번 영화에선 어떻게 발휘될지도 궁금했습니다.
이러한 수 많은 궁금증을 안고 본 [하녀]는 그러나 제게 수 많은 질문만을 안겨준채 끝이 났습니다. 임상수 감독은 제게 물었습니다. '이 세상은 과연 당신에게 친절하던가요?'
아뇨. 결코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돈을 내고 물건을 살 때나, 음식을 먹을 땐 손님에 대한 예우로 종업원들이 친절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때 세상은 전혀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동사무소의 잘못된 행정으로 주민번호가 두개나 생성되어 바로 잡기 위해서 동사무소를 찾았을 때도 동사무소 직원은 친절하지 않았고, 구피가 임신중 동전을 바꾸러 은행에 갔을 때도 은행 직원은 친절하지 않았으며, 제가 인터넷 상에서 악플러에게 모욕을 당하고 경찰서를 찾았을 때도 경찰 조사관은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왜 세상은 제게 그리고 제 가족들에게 친절하지 않았을까요?
그녀에게도 세상은 불친절했다.
은이(전도연)에게도 세상은 불친절했습니다. 이혼 후 혼자 꿋꿋하고 씩씩하게 살아갔건만 세상은 오히려 은이에게 친절을 강요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무조건 친절해야하는 하녀였으니까요. 주인을 위해서라면 아더매치(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한)한 일도 꾹 참아가며 친절하게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하녀였으니까요.
마님의 팬티도 손빨래 해줬고, 주인의 성적 욕망도 해소시켜줬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세상은 그래왔고, 그것이 하녀의 운명임을 그녀도 잘 알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욕심을 내기 시작합니다. 훈(이정재)의 성적 욕망으로 인하여 임신을 하게 되자 그녀는 모성애의 본능으로 자신의 아이를 위한 욕심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불친절한 세상에 익숙했던 그녀가 세상에게 친절을 요구하는 그 순간 그녀의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훈과 해라(서우)에게 자신의 뱃속 아기를 뺏긴 은이의 통렬한 복수가 시작될 것이라 기대했던 영화의 후반부. 하지만 복수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찍 소리라도 내겠다.'며 울부짖은 은이의 공허한 외침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녀는 자신만의 복수를 감행했지만 그것으로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세상은 하녀에 불과한 그녀를 쉽게 잊어 버릴 것이며, 가진 것이 없는 이들에겐 여전히 불친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그러한 이 영화의 후반부 때문입니다. [요람을 흔드는 손]과 같은 스릴러를 예상했었습니다. 원작인 1960년작 김기영감독의 [하녀] 역시 어느 중산층 가정을 파멸로 이끈 하녀의 이야기라고 들었습니다.(안타깝게도 원작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임상수 감독은 그러한 일반적인 예상을 모두 깨버렸습니다. 스릴러라고 하기엔 심심한 이 영화는 돈 없고, 힘 없는 이들이 세상을 향해 공허한 몸부림을 치는 영화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친절함을 받고 싶다면 자신부터 바꿔라.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캐릭터는 병식(윤여정)입니다. 아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훈의 집의 하녀에 불과합니다. 은이와 훈의 불륜 사실을 주인에게 고해 바쳤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 역시 세상의 불친절 뿐입니다.
영화를 보며 왜 그녀가 하녀 생활을 청산하지 않는지 궁금했습니다. 아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돈도 어느정도 있어 보였으며, 하녀일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혹시 우리들은 병식처럼 날 때부터 하녀 근성을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닐까요? 세상의 불친절함에 너무 오랫동안 익숙해져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은이의 복수가 결국 불친절한 세상을 아무도것도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불친절한 세상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병식의 모습은 오히려 불친절한 세상을 향해 무모한 복수를 하려했던 은이보다 더욱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영화의 작품성?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임상수 감독의 연출력은 언제나 그랬듯이 독특했지만 자기 자신만의 독특함에 스스로 만족하는 듯한 자아도취의 모습도 느껴졌었습니다.
영화의 재미? 솔직히 재미없었습니다. 하녀의 시원한 복수를 다룬 스릴러도 아니고, 그렇다고 에로티즘을 강조한 영화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녀]는 분명 기억에 남을 만한 영화입니다. 소시민들이 당연하게 여겨는 세상의 불친절함을 일깨워주며 은이처럼 찍 소리를 내며 대항할 것인지, 병식처럼 불친절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그냥 살아갈 것인지 당돌하게 묻는 영화의 화법이 당혹스러웠고, 인상깊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나니 제게 '입냄새나서 불쾌하니 좀 떨어져서 이야기하라'며 인상을 찌푸렸던 경찰 조사관의 모습이 새삼 떠오르네요. 그때 왜 저는 찍 소리를 내지 못하고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며 불친절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일까요? 아! 정말 저는 친절한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우울한 마음에 농담 한마디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불친절한 세상을 향해 은이가 마지막으로 던진 한마디는??? '앗! 뜨거워'였습니다. 썰렁하다고요? 죄송합니다. ^^;
우리에게 과연 돈 많고, 권력을 쥔 이들의 친절함을 받을 날이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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