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0년 영화이야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이 영화를 반만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쭈니-1 2010. 5. 4. 18:19

 

 

 

감독 : 이준익

주연 : 황정민, 차승원, 한지혜, 백성현

개봉 : 2010년 4월 28일

관람 : 2010년 5월 3일

등급 : 15세 이상

 

 

[왕의 남자] 혹은 [불꽃처럼 나비처럼]...

 

비록 지난주 기대작 1순위는 [아이언 맨 2]였지만 제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역시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왕의 남자]의 이준익 감독의 또 다른 사극 영화이며, 황정민, 차승원이 연기 대결을 펼친다는 점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기대할 만한 영화였습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할리우드의 블럭버스터 [아이언 맨 2]와 같은 날 개봉하며 흥행을 위한 샛길 가기가 아닌 정면 돌파를 선언했을 때 저는 마음 속으로 이 영화의 선전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먼저 본 분들의 반응이 뜨끈미지근 하더군요. [왕의 남자]의 그 폭발적인 반응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바타]와 함께 쌍끌이 흥행을 선도했던 [전우치] 정도의 반응은 불러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오히려 이 영화의 반응은 작년 추석 시즌에 개봉하여 안타까운 흥행 성적만을 올린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물론 사극을 좋아하는 전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그럭저럭 재미있게봤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왕의 남자]와 비교한다면 영화적 재미는 물론이고, 감동마저도 현저하게 부족했던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보러 가는 제 발길은 조금 무거웠습니다.

 

월요일 저녁부터 뜬금없이 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조르는 제게 구피는 '재미없다던데?'라며 일침을 가합니다. 하지만 저는 남의 말 들을 필요 없다며... 최소한 [왕의 남자]만큼은 재미있을테니 무조건 보러 가자고 피곤해하는 구피를 억지로 끌고 나갔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분명 [왕의 남자]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불꽃처럼 나비처럼] 정도도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왕의 남자]와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영화로 보였습니다.

[왕의 남자]의 이준익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캐릭터는 만들어지다가 말았으며, 내용 전개는 예측 가능한 범주에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꽃처럼 나비처럼]과는 달리 유치한 CG로 액션씬을 덮어 씌우는 실수는 하지 않았고(실망스러운 슬로우 모션은 있었지만) 라스트에선 감정의 과잉으로 억지 눈물 쥐어 짜기도 적은 편입니다. 다시말해 [불꽃처럼 나비처럼]도 그럭저럭 재미있게 봤던 전 이 영화 역시도 만족했습니다.

 

 

이몽학의 난에 이몽학은 없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소재가 된 것은 임진왜란 중인 1596년(선조 29년) 7월에 충청도에서 이몽학이 일으킨 이몽학의 난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몽학의 난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면서 역사적인 사실에만 매달리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극 영화들이 그러했듯 이 영화 역시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몽학의 난을 재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맹인 검객 황정학(황정민)을 비롯한 주변 인물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상상력을 동원하여 새로운 캐릭터가 탄생하면 할수록 정작 중요한 이몽학의 캐릭터는 점점 단순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 역사 속의 이몽학은 전주이씨 가문의 서얼로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 전라 지방을 전전하다가 임진왜란 중에 의병을 모집했던 것을 계기로 난을 일으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 속의 이몽학은 그러한 과거가 전혀 그려져 있지 않고 대동계를 이용하여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야심가로만 단순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서얼 출신이라는 이몽학의 과거는 어느정도 견자(백성현)라는 새로운 캐릭터에 투영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결구도로 그려진 영화입니다. 그런데 대결구도의 한 축을 담당해야할 이몽학이라는 캐릭터가 부실합니다. 자신의 꿈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이몽학의 야망은 이해가 되지만 부실한 그의 캐릭터는 저를 이몽학의 야망에 동참시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준익 감독은 무리수를 띄웁니다. 이몽학의 캐릭터가 부실하여 그의 야망이 관객들을 공감시킬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는지 당시 조정 신하들과 선조를 우스꽝스럽게 그려 놓음으로써 이몽학의 야망에 대한 변명을 하려 합니다. '조정이 이렇게 썩었으니 이몽학이 들고 일어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

사실 이준익 감독은 지금까지 세 편의 사극을 연출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항상 민초에 있었을뿐 지도층은 우스꽝스럽게만 그렸었습니다. [황산벌]도 그러했고, [왕의 남자]역시도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한 나라의 왕이, 그 왕을 보필하는 신하들이 그렇게 대놓고 멍청하고 썩어빠졌을까요? 물론 임진왜란을 적절하게 막지 못하고 조선을 위기에 빠뜨린 선조와 그를 보필한 신하들은 역사적 평가에서 비난을 받아 마땅하지만 코미디 영화도 아닌 이 영화에서 코믹하게 그려낸 선조와 신하들은 보기 불편했습니다. 이준익 감독은 멍청한 임금과 신하들로 이몽학의 난을 변명하지 말고, 이몽학의 캐릭터로 직접 그의 야망에 대한 관객들의 공감을 샀어야 했습니다.

 

 

영화 재미의 80%는 황정학이다.

 

그러나 이준익 감독에겐 저력이 있었습니다. 그가 괜히 [왕의 남자]로 천만 관객 신화를 이룩한 감독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비록 이몽학이라는 캐릭터 구축에는 실패했지만 황정학이라는 캐릭터는 성공하였습니다.

만약 황정학이 이몽학처럼  부실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 영화는 캐릭터의 단순화로 인하여 [불꽃처럼 나비처럼]보다도 못한 영화가 될 뻔했습니다. 하지만 황정민은 그 특유의 능글맞은 연기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구해냅니다. 

황정학은 한때 이몽학과 동료로 함께 대동계를 만들고 썩어 빠진 조정 대신 왜적을 막으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몽학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 대동계의 수장이자 자신의 친구인 정여립을 죽이자 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이몽학을 끝까지 뒤쫓습니다.

여기에서 황정학의 캐릭터가 단선적이지 않은 것이 이몽학을 뒤쫓는 황정학의 행동에 두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정여립에 대한 복수이고, 둘째는 이몽학의 야망이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조선을 망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입니다. 그는 절대 서두르지 않았고, 느긋하게 기다릴줄 알았으며, 견자를 통해 자신이 뜻을 못 이룰 경우를 대비하는 치밀함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몽학에게 제발 한양에 가지 말라며 애원을 하기도 합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재미있었다면 그것은 이견의 여지없이 80% 이상이 황정민의 연기와 황정학의 캐릭터 덕분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20%는? 바로 견자와 백지(한지혜)라는 캐릭터입니다. 사실 견자는 이 영화에서 굳이 필요가 없는 캐릭터였습니다. 어차피 영화는 이몽학과 황정학의 대결 구도로 이루어진 영화이고 굳이 견자가 그 사이에 끼어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영화에서 철저하게 생략한 이몽학의 과거가 견자에게 투영이 되었으며, 황정학의 능글맞음을 받아주며 어느새 영화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백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지혜가 사극에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굳이 이몽학의 연인인 백지가 러닝타임을 잡아먹을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한 저는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 영화의 불안요소로 한지혜를 마음 속으로 꼽았습니다.

사실 이준익 감독은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데 별로 소질이 없는데 [왕의 남자]에서도 유일하게 어색한 캐릭터가 바로 장녹수를 연기한 강성연 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님은 먼 곳에]를 통해 남성 영화 속의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어느정도의 성과를 이루어 내더니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도 의외로 백지라는 캐릭터를 잘 이끌어 냈습니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감동을 자아낸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님의 꿈 속에 자신이 없다는것을 깨달은 백지의 원망 섞인 눈빛이었습니다.

 

 

이준익 감독에게 바란다.

 

제 글을 자주 읽으시는 분들이라면 느끼셨을테지만 전 사극을 참 좋아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좋아하기 시작한 사극은 박종원 감독의 [영원한 제국]이었습니다. [영원한 제국]은 왕권 강화를 꿈꾼 정조와 신권 중심의 정치를 추구했던 노론의 총수인 심환지의 하룻 밤 사이의 대립을 담은 영화로 안성기, 조재현, 김혜수, 최종원 등 연기파 배우들의 팽팽한 연기 대결이 영화의 재미를 더해줬던 영화입니다.

전 사극은 그런 맛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살다간 인물들이 펼치는 그 팽팽한 긴장감. 영화라는 매개체를 이용하여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이 더해진다면 그 긴장감은 더욱 극대화될 것이며, 그러한 긴장감 속에 역사의 소용돌이를 느낄 수 있다면 영화를 보는 제 쾌감은 극에 달할 것입니다. 

[구르믈버서난 달처럼]은 어느 부분에선 제가 좋아하는 사극의 모양새를 띄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는 영화입니다. 임진왜란, 이몽학의 난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느낄 수 있을만한 사건이지만 그 속에 살다간 실존 인물들은 부실하게, 가상의 인물들은 치밀하게 그리는 이상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이 영화를 반 밖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가상 인물들의 폭풍과도 같은 사랑과 삶은 사극을 좋아하는 제 마음을 꿈틀거리게 만듭니다.

이준익 감독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극을 가장 잘 만드는 감독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민초들에게만 관심을 가질 뿐, 그 시대의 지도층 묘사엔 악의적 관점이 종종 눈에 띕니다.

역사를 이루는 것은 분명 그 시대를 살다간 한 사람, 한 사람의 몫일 것입니다. 민초들도 역사의 한 부분이고, 지도층도 마찬가지로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이준익 감독이 그러한 사실을 잘 인지하여 민초도, 지도층도 똑같은 시선으로 캐릭터를 이루어 낸다면 그의 사극은 분명 절완벽하게 사로잡을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서로의 당론을 내세우며 갈팡질팡하는 동인, 서인의 우스깡스러운 모습은 결코 그 시대의 풍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국사람들은 이래서 안돼.'라는 입버릇처럼 내려오는 우리들의 잘못된 인식의 뿌리가 아닐까요? 이준익 감독이 그러한 점만 바로 잡는다면 정말 제가 사랑하는 감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모션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