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0년 영화이야기

[일라이] - 깊이있는 주제를 담기엔 그릇이 너무 투박했다.

쭈니-1 2010. 4. 19. 14:12

 

 

 

감독 : 알버트 휴즈, 알렌 휴즈

주연 : 덴젤 워싱턴, 게리 올드만, 밀라 쿠니스

개봉 : 2010년 4월 15일

관람 : 2010년 4월 18일

등급 : 15세 이상

 

 

가끔 발상의 전환이 생활을 편하게 한다.

 

저희 회사는 1년에 두번 재고조사를 합니다. 회사의 전 직원이 토요일에 출근하여 자신이 맡은 품목을 하나, 둘씩 세어가면서 재고조사표에 적어내고, 그렇게 해서 모아진 재고조사표는 취합되어 전산의 재고와 맞춰어봅니다. 만약 틀릴 경우 관리부 직원들이 일요일에 출근을 하여 일일히 재고조정을 하는 작업을 하죠.

관리부인 저는 토요일에 재고조사를 하고, 일요일엔 재고조정을 해야 하기 때문에 회사의 재고조사가 있는 날은 주말 내내 일을 해야 합니다.

지난 주말도 그러했습니다. 토요일 재고조사에 이어 일요일에 재고조정을 위해 출근한 관리부의 직원들은 피곤하다며 투덜거립니다. 관리부 팀장인 저 역시도 주말에 쉬지 못하고 나와 일하는 것이 피곤하지만 팀원들에게 내색하지 못하고 오히려 팀원들의 투덜거림을 받아주며 다독거려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 결국 일요일에 빨리 일을 끝내고 집에 가려면 화장실가는 시간도 아껴가며 열심히 일을 해야합니다. 전산에 한 품목, 한 품목 일일히 수정된 숫자를 입력해야 하는 일이니 만큼 집중하지 않으면 숫자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꼭 이 방법 밖에 없을까? 다른 수월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너무나 오랫동안 직접 입력하는 방식으로 재고조정 업무를 해왔기에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재고조정 업무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에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저는 제가 하던 방식의 일을 잠시 멈추고 다른 방식으로 일을 처리해봤습니다. 수정된 데이타를 직접 입력하는 것이 아닌, 데이타를 엑셀화시켜 전산에 일괄 등록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모두들 그것이 될리가 없다고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의외로 데이타 일괄 등록이 되더군요. 결국 직접 입력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한 새로운 입력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 이젠 일요일에 관리부 직원이 모두 나와 입력하는 일은 없어질 것 같습니다.

일괄 등록 덕분에 생각보다 일을 일찍 끝낸 저는 집에 들어와 2시간 동안 모자란 낮잠도 자고, 제가 좋아하는 두산과 롯데의 프로야구 경기도 보고(결국 두산이 졌습니다.) 저녁엔 구피와 영화도 보러 갔습니다.  

 

 

여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영화가 있다.  

 

그날 본 영화가 [일라이]입니다. 사실 처음엔 이 영화에 대해서 무진장 기대를 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배우인 덴젤 워싱턴이 주연을 맡았고, 인류를 멸망의 위기로 몰고간 대재앙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의 소재도 맘에 들었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기대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분들이 이 영화가 SF영화의 탈을 쓴 종교영화라고 평가를 했기 때문입니다. 종교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기에 종교영화 역시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라이]에 대한 제 기대감은 한 순간에 푸욱 꺼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 외엔 달리 볼 영화가 없었습니다. [베스트셀러]를 보자니 그렇지않아도 심신이 피곤한 상황에서 으시시한 분위기의 영화를 봤다간 며칠동안 악몽에 시달릴것 같았고, [블라인드 사이드]를 보기엔 이렇게 노골적인 감동주의 영화를 그다지 선호하는 편이 아닙니다. [반가운 살인자], [육혈포 강도단], [프로포즈 데이], [바운티 헌터]와 같은 코미디 영화는 극장보다는 집에서 보는 것을 더욱 선호하는 편이고요.

 

이렇게 해서 어쩔수 없이 보게된 [일라이]는... 확실히 종교적 색채가 강한 영화였지만 꼭 그렇다고 무작정 거부감이 드는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의 종교적 논란은 주인공인 일라이(덴젤 워싱턴)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며 가지고 다니던 책이 바로 성경이라는 점에서 비롯됩니다. 악당인 카네기(게리 올드만) 역시 일라이에게 성경을 빼앗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도대체 성경이 뭐길래??? 처음엔 기독교인이 아닌 저로써는 그러한 이 영화의  설정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성경=기독교'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일라이의 성경이 암시하는 것이 정의와 질서가 무너진 비문명화된 영화 속의 인류에게 문명을 가르치는 도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성경을 향한 일라이와 카네기의 집착이 그리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중적인 문명의 힘에 대해서...

 

인류를 멸망의 위기로 몰고 갔던 대재앙이 있은지 30년 후. 사람들을 통제하던 모든 법체제와 공권력, 경찰력 등은 무너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질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죽음을 당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도구를 손에 넣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일라이가 성경을 목숨보다 더욱 소중히 지킨 이유입니다.

사실 성경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종교 서적이 거의 그러하듯 성경엔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과 천국에 가기 위한 선행, 그리고 인간 사회의 질서가 쓰여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성경이 문명 사회를 다시 이룩하려는 사람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종교의 힘은 무질서한 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질서가 될 것이며,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존재는 질서를 어지럽히고, 살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경이 만약 카네기의 손에 들어간다면? 무솔리니 평전을 읽는 카네기의 첫 등장은 결코 우연이아닙니다. 그는 강력한 독재 권력을 원했고, 성경은 그의 독재 권력을 확립시키는 이념이 될 것입니다.

결국 카네기는 그 스스로가 신이 되기 위해서 성경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격상하려 했던 그 수 많은 독재자들처럼 카네기는 수세기동안 사람들에게 읽혀졌던 성경을 자신의 독재 정치에 이용을 하려 했고, 그러한 그의 야망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성경을 뒤쫓는 집착으로 나타납니다.

이 영화에선 성경으로 지칭되었지만 사실 꼭 성경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원래 개신교를 근간으로 두고 있는 나라이기에 성경이 이 영화의 소재이지만, 무질서의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질서 확립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면 그 모든 것이 '일라이의 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영화는 종교적 색채가 강한 영화라기 보다는 질서가 무너진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도구를 손에 넣은 한 남자의 독특한 모험담이 됩니다.

 

 

그래도 부족한 영화적 재미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고해서 제가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본 것은 아닙니다. 영화의 시작, 잿더미가 눈처럼 내리는 숲에서 고양이를 사냥하는 일라이의 모습은 꽤 강렬했지만 이 영화의 강렬함은 그것이 끝입니다.

액션은 빈약했고, 영화적인 배경이 비슷한 [더 로드]와 비교해서도 충격적인 장면들은 확실히 부족했습니다. 영화의 전개도 그다지 매끄럽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일라이가 성경을 들고 서쪽으로 여행을 하는 이유는 그야말로 종교적이어서 제가 수긍할만한 동기 부여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계시처럼 죽어도 죽지 않는 일라이는 영화를 보던 제게 쓴 웃음을 짓게 하는데 그러한 일라이의 존재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SF적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나마 신경질적인 악당 카네기를 연기한 게리 올드만과 [플래쉬 댄스]의 히어로 제니퍼 빌즈를 오랜만에 볼 수 있다는 점은 반가웠는데... 미래 묵시룩적 SF를 보기 원한 저에겐 그러한 장점만으로 이 영화의 단점을 가리기엔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영화가 마지막 반전이라고 내세우는 것도 의외이긴 했지만 조금 억지스러웠고, 솔라라(밀라 쿠니스)의 마지막 액션 히어로로써의 변심도 좀 뜬금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일라이]는 제가 기대했던 것들을 단 한가지도 제게 보여주지 못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분명 한 것은 이 영화에 대한 실망감이 이 영화가 종교적 색채를 너무 강하게 띄고 있기 보다는 오락 영화로써 영화적 재미가 현저하게 부족하고, 그렇다고 [더 로드]와 같은 메세지를 띄고 있는 영화라고 하기엔 내용 자체가 너무 투박하다는 점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감독인 휴즈 형제는 [일라이]가 어떤 영화인지 잘 확립하지 못한채 이리저리 휩쓸려 다닌 느낌입니다. 이 영화에 담고 싶은 주제가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그러한 주제를 담은 그릇이 너무 투박하여 그 주제를 잘 살려내지 못한 느낌입니다.  

 

SF 영화라고 하기에도, 메세지를 담은 영화라고 하기에도, 종교영화라고 하기에도,

이 영화는 뭔가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