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0년 영화이야기

[방자전] -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될 남자의 이야기.

쭈니-1 2010. 6. 7. 11:05

 

 

 

감독 : 김대우

주연 : 김주혁, 조여정, 류승범, 류현경, 오달수

개봉 : 2010년 6월 2일

관람 : 2010년 6월 5일

등급 : 18세 이상

 

 

나도 방자였다.

 

여러분은 혹시 자신이 주인공이어서는 안될 사건을 겪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전 있답니다.(슬프게도...)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제 친구가 처음으로 여자친구를 사귀었답니다. 하지만 중학생에게도 밀고 당기기가 있었는지 제 친구와 그의 여자친구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여자친구와의 관계개선을 고민하던 친구는 제게 한가지 계획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깡패들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큰 부상을 당했다고 여자친구에게 거짓말을 해서 자신의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한 계획이었습니다.

그 계획에서 제가 맡은 역할은 친구의 여자친구를 불러내서 제 친구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제 친구는 붕대로 팔을 칭칭 감아서 많이 다친척 분장을 해놓고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것이죠. 계획은 대성공이었습니다. 붕대에 빨간 물감으로 가짜 피까지 만들어 뿌린 친구의 센스 덕분에 그의 여자친구는 눈물까지 흘리며 친구의 부상을 안타까워했었답니다.

 

그렇게 그 계획은 제 친구에겐 해피엔딩이었답니다. 하지만 제겐 커다란 굴욕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친구와는 달리 너무나도 멀쩡했던 저는 깡패들과 싸우는 친구를 버리고 도망간 비겁한 녀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녀는 제게 어떻게 친구가 저렇게 되었는데도 도망을 갈 수가 있느냐고 따지는데 뭐라 할말이 없더군요. 속시원하게 '이건 모두 거짓말이야.'를 외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날 저는 절대로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될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수십명의 깡패들과 멋지게 싸우다가 부상을 당한 친구만 주인공이 되었고, 전 그 들러리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만약 제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 마지막 반전으로 친구의 계획을 그녀에게 고백했다면 그날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닌 비극이 되었을 것입니다. 친구는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헤어졌을 것이고, 전 친구들에게 친구를 배신한 놈으로 낙인 찍혔을 것입니다.

아직도 그날의 사건을 생각하면 억울하고 답답하지만 그날 제 역할은 방자였기에 방자인 제 역할에 충실하여 친구와 그녀가 해피엔딩으로 그날의 사건을 마무리지었다는 것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방자는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춘향전]의 방자는 그날의 저처럼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춘향전]은 완벽하게 이몽룡과 성춘향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방자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 나선다면 어떻게 될까요? [춘향전]은 더 이상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아닌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이야기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영화 [방자전]이 그러합니다.

김대우 감독은 도저히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될 남자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 나서면서 벌어지는 찐한 비극을 영화 속에 담아냈습니다. 이몽룡(류승범)과 성춘향(조여정)이 주인공이었다면 우리가 아는 [춘향전]처럼 신분의 벽을 뛰어 넘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포장될 수 있었던 이야기를 김대우 감독은 굳이 방자(김주혁)를 내세워 아름다운 이야기를 뒤집어 버립니다.

그 결과 [방자전]은 신분 상승을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는 팜므파탈 춘향과, 출세를 위해 사랑 마저도 거짓으로 이용하는 속물 이몽룡을 담아 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있던 순수함이 더럽혀질 때의 불편함을 [방자전]에서 느꼈다면 그것은 관객의 책임이 아닙니다. 김대우 감독이 스스로 의도한 바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 김대우 감독에게 '왜 우리가 알고 있던 순수함을 더렵히려 하느냐?'라고 따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것이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될 인물의 서러움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자전]에서 방자가 주인공으로 나서며 이몽룡과 성춘향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더렵혀 졌지만, 방자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새롭게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방자... 과연 여러분들은 [춘향전]에서 방자에 대해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으신가요? 대부분의 [춘향전]에서는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방자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습니다. 가끔 방자의 역할을 코믹한 비중있는 조연으로 부각시킨 영화나, 마당놀이 등도 있지만 거기에서도 방자는 그저 향단과 함께 관객들의 웃음을 책임지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방자 역시 남자인데 남원 제일의 미녀라는 성춘향에 대해서 흑심을 품지 않았을까요? 상놈이라고 해서 거세당한 남자는 아니었을텐데 그는 그저 이몽룡의 곁에서 까불기만 했던 것일까요? 전 방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김대우 감독의 상상력은 아주 탁월했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상상력을 위해서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이 더럽혀진 것에 대해서 일말의 아쉬움도 없었습니다. 대신 방자의 사랑이라는 새로움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캐릭터의 재구성

  

자!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될 방자가 주인공으로 나서며 [방자전]은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춘향전]을 싸그리 바꿔야 했습니다. 특히 이 영화는 캐릭터의 재구성이 눈에 뜁니다. 처음엔 '설마'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다 보면 '정말 저랬을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이 영화에서 캐릭터의 재구성은 아주 탁월했습니다.   

우선 춘향부터 살펴 보죠. 여러분이라면 과연 기생의 딸이 양반자제와 사랑에 빠져 목숨을 걸고 정조를 지키는 이야기와 신분 상승을 위해서 일부러 양반자제를 꼬드기는 이야기중 어느 것이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전 후자가 더욱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확실했던 조선 시대의 경우는 더욱더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가 강했을 것입니다. 기생으로 한 평생을 마감해야하고, 자신의 아들, 딸 마저도 그런 하류 인생을 물러 받아야 한다는 현실 속에서 춘향이 가진 신분상승의 욕구는 어쩌면 당연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방자전]의 춘향은 사랑이라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밥도 먹여주지 않는 추상적인 단어보다 신분상승이라는 현실적인 이익에 매달린 것 뿐입니다. 결혼은 현실이기에 사랑은 방자하고 하더라도 결혼은 몽룡과 하고자 했던 춘향의 선택을 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출세를 위해서 음모를 꾸미는 몽룡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 김대우 감독의 탁월한 캐릭터 재구성이 놀라웠던 것은 몽룡이 춘향과의 사랑을 거짓으로 꾸며야 했던 이유를 너무나도 치밀하게 만들어 냈다는 점입니다.

그로 인하여 몽룡은 출세를 위해 춘향과의 거짓 미담을 만들어 내야  했으며, 그러한 몽룡의 음모는 신분 상승을 꿈꾸는 춘향의 욕망과 교묘하게 맞물려 이 영화의 재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듭니다.

그 외에도 의도된 어리숙함으로 포장된 변학도를 비롯하여 방자를 사랑했지만 방자의 사랑을 춘향에 빼앗긴 비련(?)의 여인 향단(류현경) 등 [방자전]이 재구성한 캐릭터들은 영화의 재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듭니다.

전 개인적으로 향단의 캐릭터에 좀 더 비중을 높였다면 더욱 재미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방자와 마찬가지로 향단 역시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될 캐릭터였으니 말입니다. 이번 영화를 통해 방자는 당당히 주인공으로 도약을 했는데 향단은 여전히 조연으로 언저리를 맴돌 뿐이니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화룡점정 마노인... 그리고 예정된 비극

 

그런데 뭔가 부족하다고요? 팜므파탈 춘향, 출세에 눈이 먼 속물 몽룡, 그리고 주인공으로 발돋음한 방자와 변학도, 향단까지 모두 나왔는데도 허전함을 느끼셨다면 바로 마노인(오달수)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방자전]의 진정한 주인공은 마노인이라 생각합니다.

신분상승을 위해 계략을 꾸미는 춘향은 어떻게 몽룡이 아닌 방자에게 넘어갈 수가 있었을까요? 설마 춘향이 방자에게 진정한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원하신다는 'NO'입니다. 몽룡과 춘향의 진정한 사랑 마저도 뒤집어 버린 이 영화에서 그보다도 더 비현실적인 방자와 춘향의 진정한 사랑을 담아낼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마노인의 존재는 이 영화에서 중요합니다. 연애의 초절정 고수로 눈빛 하나만으로 뭇 여인내들을 녹아들게 만드는 그 신비의 기술은 방자로 하여금 몽룡에게 춘향을 빼앗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만약 마노인이 없었다면 [방자전]은 남자 주인공만 바뀐 여전히 특색없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마노인이 이 모든 것을 바꾸었고, 결국 [방자전]은 마노인으로 인하여 진정한 재미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마노인마저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예정된 비극입니다. 마노인 덕분에 방자는 한시적으로 춘향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지만 신분상승을 위한 춘향의 욕구가 되살아나는 그 순간 그의 사랑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립니다.

그러고보니 김대우 감독은 [음란서생]에서도 그랬습니다. 다른 관객들은 [음란서생]을 보며 웃기 바빴지만 저는 그 속에 숨겨진 엄청난 비극에 가슴을 졸여야 했습니다. 사랑해선 안될 상대를 사랑한 댓가로 찾아오는 비극은 [방자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음란서생]에 비해 [방자전]의 비극은 더 잘 꾸며져 있습니다.

결국 방자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은 결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되었다는 사실을... 춘향을 너무나도 갖고 싶었기에 모든 것을 배신하고 주인공이 되었지만 그로 인하여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사랑을 그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주인공으로써의 자신의 역할을 버립니다. 너무나도 먼 길을 돌아 그것을 깨달은 것이죠.

하지만 그의 욕망은 결국 비극이 되었지만 그의 도전은 한때 방자였던 제겐 속 시원했습니다. 방자는 결코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될 캐릭터였지만 그런 방자의 한을 [방자전]으로 풀어준 김대우 감독의 역량에 무한한 박수를 보냅니다.

 

세상의 모든 방자들이여! 주인공을 꿈꾸어라.

그 선택이 비록 비극으로 끝날지라도 한번 도전해볼 가치는 있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