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0년 영화이야기

[데이브레이커스] - 저예산 영화의 진정한 힘.

쭈니-1 2010. 3. 22. 11:34

 

 

 

감독 : 마이클 스피리그, 피터 스피리그

주연 : 에단 호크, 윌렘 데포, 샘 닐

개봉 : 2010년 3월 18일

관람 : 2010년 3월 21일

등급 : 18세 이상

 

 

뱀파이어 전성시대.

 

[트와일라잇]의 기록적인 흥행 성공 덕분일까요? 요즘은 뱀파이어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미 [트와일라잇]의 속편인 [뉴 문]이 [트와일라잇]을 뛰어 넘는 흥행을 기록했고, 전지현의 해외 진출작인 [블러드]도 뱀파이어 영화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박쥐]를 통해서 국내에 전무하다시피한 뱀파이어 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고, 요즘 제가 화요일을 기다려며 꼬박꼬박 챙겨보는 인터넷 만화 역시 품위있는 뱀파이어가 주인공인 [노블레스]입니다.

뱀파이어 영화의 장점은 그 오래된 역사 만큼이나 여러가지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초창기 뱀파이어 영화는 주로 공포영화의 형식을 띄고 있었죠.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의 존재 자체가 공포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만큼 '뱀파이어 = 공포영화'라는 공식은 어쩌면 당연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뱀파이어 영화는 공포에 머물지 않고 코미디, 액션, 로맨스로 다양한 장르적 변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트와일라잇]과 [뉴 문]은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청춘 멜로영화의 형식을 띄고 있고, [블러드]는 액션, [박쥐]는 사회성 짙은 드라마의 형식을 띄고 있으니까요.

[데이브레이커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체 불명의 바이러스로 인하여 인류의 대부분이 뱀파이어로 변한 201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액션과 공포, 사회성 드라마의 모든 장르를 골고루 버무려 놓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특이할 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과연 뱀파이어 영화가 어디까지 장르적 변종을 가할 수 있을 것인지 가늠할 수 있는 좋은 표본을 될만하니까요.

 

 

저예산으로 창출해낸 뱀파이어의 세계

 

[데이브레이커스]의 국내 포스터엔 아주 큼지막하게 'SF액션블록버스터'라고 쓰여 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저예산 영화입니다. 미국의 박스오피스 사이트인 '박스오피스 모조'에 의하면 이 영화의 제작비는 고작 2천만 달러에 불과합니다. '억'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비한다면 제작비가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셈입니다.

감독인 마이클 스피리그와 피터 스피리그 형제 감독 역시 경력이라고는 [언데드]라는 B급 좀비영화가 전부이고, 이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에단 호크, 샘 닐, 윌렘 데포는 연기파 배우이긴 하지만 흥행 배우와는 거리가 먼 배우들입니다.

이렇게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뱀파이어 세계를 인간 사회의 모습 그대로 그려냅니다.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길에 줄을 서서 피가 든 커피를 사 먹는다거나, TV를 보고, 부족한 피에 대한 토론을 하고, 직장을 다니며 일을 합니다. 그들은 그냥 일반 사람들이라고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평범하기만 합니다.

 

[데이브레이커스]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피에 굶주려 인간을 사냥하는 일반 뱀파이어와는 달리 사회를 이루고 통제된 룰에 따라 생활을 하는 뱀파이어들의 모습에서 이 영화는 신선함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뱀파이어가 아니었다면 그러한 신선함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을 뱀파이어로 설정 하나 바꾸는 발상의 전환으로 평범함이 신선함으로 바뀌는 것이죠. 영화가 가질 수 있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만합니다.

그렇다고해서 이 영화가 뱀파이어 영화로써의 기능마저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수가 줄어들고, 그에따라 피가 부족해진 뱀파이어들이 남은 인간을 사냥하는 장면이라던가, 피의 공급 부족으로  지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변종 뱀파이어인 서브사이더의 등장 등, 기존의 뱀파이어 영화에서 즐길 수 있었던 장면들이 다수 존재하기도 합니다.

 

 

영화의 무한한 상상력은 꼭 돈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뱀파이어 사회의 득특한 설정으로 제게 즐거움을 준 [데이브레이커스]는 후반부에 가면 갈수록 사회성 짙은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뱀파이어지만 인간이고 싶은 뱀파이어와 인간보다 우월한 힘과 영생을 포기할 수 없었던 뱀파이어의 대립 양상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의 후반부는 자신의 손아귀에 움켜쥔 이득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우리 모습과 겹쳐지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뱀파이어이기를 원하는 동생과 대립하는 에드워드 달튼(에단 호크),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다가 뱀파이어가 되어 영생을 얻은 찰스 브롬리(샘 닐)와 뱀파이어가 되기를 거부하는 그의 딸. 영화를 본 후 구피가 묻습니다. '자기라면 어떻게 할래?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뱀파이어가 될래? 아니면 인간으로 남을래?'  전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전의 뱀파이어 영화를 보면서 뱀파이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결코 해 본적이 없지만 만약 [데이브레이커스]와 같은 세상이 온다면, 그래서 인간을 선택한 댓가가 두려움에 떨며 숨어사는 것이라면 어쩌면 전 뱀파이어를 선택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데이브레이커스]는 그런 영화입니다. 영화의 초반은 인간사회를 뱀파이어 사회로 발상의 전환을 꾀한 영화의 기발함이 재미있었고, 영화의 중반엔 뱀파이어와 남은 인간들의 추격전에 긴장감을 느꼈으며, 후반엔 '너라면 어떤 인생을 선택하겠느냐?'라고 노골적으로 묻는 영화의 질문에 잠시동안이라도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영화적인 재미만 놓고 본다면 다른 뱀파이어 영화들에 비해서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화끈한 액션도 없고, 무시무시한 공포도 없습니다. 단지 B급 호러영화의 주특기인 갑자기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들이 존재할 뿐입니다. 저예산 영화의 티를 팍팍 내고 있는 셈이죠. 

하지만 [데이브레이커스]는 저예산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상상력을 맘껏 보여줬습니다. 이 상상력이라는 것이 거대한 자본으로 구축해야만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이 투입된 블록버스터들이 가지고 있는 빈약한 상상력을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저는 그러한 빈약한 상상력을 지닌 블록버스터보다는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저예산 영화가 더욱 좋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화가 가진 진정한 힘이니까요.

 

 저예산 영화이긴 하지만 에단 호크와 샘 닐의 연기는 좋았다.

에단 호크의 감상적인 연기와 샘 닐의 전형적인 자본주의의 악역은

서로 대립하며 영화의 또 다른 재미를 창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