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0년 영화이야기

[인 디 에어] - 텅빈 배낭도, 꽉찬 배낭도 행복의 조건은 아니다.

쭈니-1 2010. 3. 16. 17:02

 

 

 

감독 : 제이슨 라이트먼

주연 : 조지 클루니, 베라 파미가, 안나 켄드릭

개봉 : 2010년 3월 11일

관람 : 2010년 3월 15일

등급 : 15세 이상

 

 

난 해고당한 적이 있다.

 

불행한 IMF세대인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무려 2년간 백수생활을 해야했습니다. 그러다가 경제가 조금 나아지며 아주 작은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죠. 그것이 제겐 대학 졸업 후 제대로된 첫 직장이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서울대 졸업생으로 꾸려진 회사라서 제 학력이 제일 딸렸고, 그래서 더욱더 제 능력으로 그것을 만회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에 대한 성과도 있었습니다. 처음엔 절 떨떠름하게 생각하던 사장도 나중엔 '내가 널 잘 못 봤구나.'라며 잘못을 시인했을 정도니까요.(그때의 희열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어려워지고 정리해고를 한다는 소식을 들려오더니 결국 저도 그 정리해고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첫 직장에서의 정리해고는 정말 큰 충격이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냐?'는 원망도 들고, '내가 없으면 이 회사가 잘 돌아갈 것 같아?'라며 호기를 부리기도 했고, '내가 여기 아니면 일할데가 없을 것 같아?'라며 큰소리를 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회사를 그만두고 거의 1년을 집에서 쉬어야 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던 회사에서 쓸모없다며 버려지고 나니 회사 다니는 것이 두려워 아예 입사원서를 내지 못하겠더군요.(구피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입사원서를 내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인 디 에어]는 해고 전문가의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한 사원들에게 '그만 두셔야 겠습니다.'라는 정말 어려운 이야기들을 직접 해야 하는 사람이 주인공이죠. 하지만 영화의 오프닝씬에서 제 눈에 들어온 것은 해고 전문가인 라이언 빙헴(조지 클루니)이 아니었습니다. 해고를 당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8년 전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 예전의 제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습니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 했지만 속으론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던 그때의 기억들,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며 '내가 어떻게 그 회사를 키워냈는데...'라며 분개했던 그 아픈 기억들이 [인 디 에어]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습니다.

어쩌면 비디오로 봐도 될 이 영화를 굳이 극장에서 보겠다며 고집을 피운 이유도 그러한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믿고 의지했던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당하는 기분을 잘 알고 있는 저로써는 그렇다면 그렇게 해고를 해야하는 사람들의 일상은 어떠할지 은근히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의 배낭을 비어 있었다.

 

해고 전문가인 라이언 빙헴. 그는 1년중 322일을 출장으로 미국 전역을 떠돕니다. 하지만 집에서 보낸 43일마저도 아까워 하는 인물이죠. 사정이 이러하니 그는 자신의 가정도 없고, 그의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텅 비어 있습니다. 오히려 공항과 비행기가 그의 집이고 가정이었습니다.

그는 강연을 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배낭에 넣으라고, 그리고 그 배낭의 무게를 느껴보라고,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그 무게감에 괴로워하지 말고 배낭을 비우라고... 어찌보면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떠오를지도 모를 그의 연설은 사실 무소유가 아닌 무책임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들로보터, 자신이 소속된 가족들로부터 책임을 느끼지 않기 위해 그는 자신의 배낭을 비우고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자유를 만끽합니다. 그것이 바로 라이언 빙헴이 사는 방식입니다.

 

어쩌면 그의 삶의 방식은 편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이 없으니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공항에, 비행기에, 그리고 호텔에 모두 준비가 되어 있으니 그야말로 몸만 움직이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 관계도 그렇습니다. 살다보면 가장 귀찮은 것이 사실 내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난 영화도 보고 싶고, 야구도 보고 싶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하고, 집안 청소를 해야합니다. 만약 제가 혼자 살았다면 보고 싶은 영화도 실컷 보고, 야구가 보고 싶을 때마다 아무런 제약없이 야구장으로 향할텐데...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그럴 수가 없게 만들죠. 주말이면 집에서 쉬고 싶은데 친척 누가 결혼을 한다더라, 누구 생일 잔치를 한다더라, 하며 피곤에 지쳐 무거워진 제 몸을 억지로 움직이게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이언 빙헴의 삶의 방식을 따라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영화에서도 그렇듯 혼자라는 것에 대한 외로움을 느끼고, 정착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도 느낄테니까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죠. 혼자 사냥을 하며 살아가는 동물이 아닌 집단을 이루고 그 집단 속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동물입니다. 라이언의 배낭은 비어있지만 그 비워진 배낭의 무게는 그 어떠한 것들보다 무겁게 라이언의 어깨를 짓누룹니다.

 

  

텅빈 배낭을 채운 라이언 빙헴... 과연 행복해 졌을까?

 

[인 디 에어]는 인생의 배낭이 텅 비었던 라이언 빙헴이 점차 배낭을 채워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이상형인 알렉스 고란(베라 파미가)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당찬 후배 나탈리 키너(안나 켄드릭)와의 동반 출장을 통해 인간 관계를 배운 그는 자신의 인생 철학과는 달리 점차 자신의 배낭을 채워 나갑니다.

절대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가하여 오빠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알렉스와의 사랑도 쿨한 관계에서 자신의 가족들에게 소개를 시켜줄 정도의 깊은 관계로 발전합니다. 나탈리가 제안한 온라인 해고 시스템에도 적응하려 노력하고, 텅빈 자신의 집에 자신의 물건들로 채우기도 합니다. 텅빈 배낭은 가벼울지 물라도 그 배낭 안에 외로움이라는 짐이 쌓이게 되면 그 어떤 것보다 무겁다는 것을 라이언은 점차 깨닫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행복했을까요?  아뇨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알렉스와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착각을 깨닫고, 나탈리는 저 멀리 떠나버립니다. 그는 여전히 혼자이고, 여전히 집보다 비행기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염원했던 천만 마일리지를 이루었을 때의 담담함과 같이 그가 원했던 텅빈 배낭의 삶도, 그리고 우리가 꿈꾸는 가득찬 배낭의 삶도 어쩌면 그냥 삶의 일부분일뿐, 그것으로 인하여 행복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뭔가 달콤한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제게 이 영화의 결말은 상당히 당혹스러웠지만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니 라이언이 지었던 그 씁쓸한 미소처럼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선 제 입가에도 담담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주노]를 통해 여고생의 임신을 담담하게 담아냈던 제이슨 라이트먼의 영화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비록 아카데미는 그들을 외면했지만...

 

이번 아카데미에서 [인 디 에어]는 작품상, 감독상 등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부문에서도 수상을 하지 못한채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뭐 어차피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은 [아바타]와 [허트 로커]의 대결이었으니 다른 부분은 그렇다고 해도 연기상 부분에서도 외면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 아쉬움이 남네요.  

조지 클루니는 이 영화에서 폭발력은 부족하지만 잔잔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연기를 해냈습니다. 섹시한 솔로의 당당함에서 외로움의 무게에 짓눌린 처절한 솔로의 모습까지... 너무나도 공감되게 표현한 그의 연기는 감히 그의 연기 중에서 최고라고 평가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비록 [시리아나]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긴 했지만 조만간 아카데미 역시 그의 연기에 남우주연상을 보따리로 싸매고 안겨줄 것이라는 확신이 드네요.

 

여주조연상에 나란히 노미네이트된 베라 파미가와 안나 켄드릭 역시 정말 뛰어났습니다. 이번 여우조연상은 [프레셔스]의 모니크가 거의 100% 가져가는 분위기였기에 아쉬움은 덜하지만 베라 파미가의 중후한 멋과 안나 켄드릭의 상쾌함이 더해져 이 둘의 조합만으로도 색다른 재미가 느껴졌습니다.

특히 나탈리가 남자친구와의 이별하고 호텔에서 우는 장면은 영화를 보던 제게도 갑작스러운 미소를 안겨줬는데 만약 제 옆에 그녀가 서있다면 '괜찮아. 더 좋은 남자를 만날꺼야.'라고 위로하며 안아주고 싶은 충동에 참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인 디 에어]는 너무 잔잔하여 지루한 영화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가볍지만 그렇다고 결코 경박하지 않은 성찰과 훌륭한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어우러져 영화를 보는 내내 절 행복하게 만들었던 영화였습니다.

 

 다른건 몰라도 이반 라이트먼 감독이 아들 하나는 잘 키운 것 같다.

코미디 영화에 능한 아버지와는 달리

제이슨 라이트먼은 진지한 드라마를 아기자기하게 꾸밀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