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존 힐코트
주연 : 비고 모텐슨, 코디 스미스 맥피, 샤를리즈 테른
개봉 : 2010년 1월 7일
관람 : 2010년 1월 9일
등급 : 15세 이상
토요일 아침 거리는 정말 추웠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평일 밤에 영화 보기가 어려워진 저는 어쩔수 없이 토요일 아침의 늦잠을 포기하고 혼자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토요일 아침을 포기한다는 것은 제겐 가장 큰 편안함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일주일 중 유일하게 따뜻한 침대에서 온 몸이 뻐근해질 때까지 푹 잘 수 있는 날이 바로 토요일이니 그러한 편안함을 포기하고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것은 제겐 정말 큰 결심인 셈이죠.
토요일 아침 영화를 보러 가기 위해서 황금같은 금요일 저녁에도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으며, 한참 세상 모르고 자야할 시간에 눈 비비고 일어나 구피가 깰까봐 조심스럽게 세수를 하고, 옷을 두껍게 챙겨입고, 거리를 나섰습니다.
토요일 아침... 정말 춥더군요. 집에 두고 나온 침대 속의 따뜻함이 자꾸 떠올라 당장이라도 예매를 취소하고 다시 침대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더 로드]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기에 가까스로 따뜻한 편안함에 대한 욕망을 짓눌렀습니다.
토요일 아침 거리는 정말 한산했습니다. 추워서인지 거리의 풍경도 냉기가 감돌았고, 빨리 이 거리를 빠져 나가야 할것 같은 공포심마저 들더군요. 그런데 그날 본 [더 로드] 역시 그러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거닐던 거리의 풍경은 한산하고, 냉기가 돌았으며, 공포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제가 겪은 아침의 거리 풍경이 떠올라 더욱 제 마음을 춥게 만들었습니다.
2009년 2월 9일 토요일의 아침 풍경은 대략 이런 모습이었다.
정말 저런 세상이 온다면???
[더 로드]는 아마도 지금까지 제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암울한 영화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하루 아침에 잿더미가 된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무작정 남쪽으로 길을 떠납니다. 그들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남쪽으로 간다고 해서 따뜻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보장 따위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더욱 절망으로 몰아 넣는 것은 인간에 대한 무너진 신뢰입니다. 먹을 것이 사라진 곳에서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잡아 먹고, 약한 사람은 강한 사람을 피해 다녀야합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은 무조건 경계를 해야하며,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지금까지 암울한 미래를 담은 영화들은 많았습니다. 괴물에 의해서, 기계에 의해서, 혹은 외계인에 의해서, 그리고 자연재해에 의해서 피폐해진 미래의 모습을 담은 영화에서는 그래도 맞서 싸워야할 상대가 명확했고, 함께 싸울 동료가 있었으며, 승리 이후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로드]엔 그러한 모든 것이 없습니다. 누구와 싸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아닌 그 모든 사람은 적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함께 싸울 동료도 없습니다. 그저 아버지는 아들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고, 아들은 아버지만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승리 이후의 희망은 더더욱 없습니다.
황량한 거리, 폐허가 된 도시, 잔뜩 겁을 먹은채 정처없이 떠도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약탈하고 잡아먹는 사람들만이 가득 넘쳐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러한 세상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영화 속의 사람들이 이해가 되더군요. '만약 내가 저런 세상에 나혼자 던져졌다면 과연 난 자살을 하지 않고 견뎌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영화는 암울했습니다.
희망없이 두려움에 떨며 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났지 않을까?
하지만 난 아버지이다.
만약 저 혼자 [더 로드]와 같은 세상에 남게 된다면 어쩌면 전 모든 것을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영화 속의 남자(비고 모텐슨)처럼 지켜야할 사람이 있다면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희박하지만 가느다란 그 어떤 희망이 있더라도 그 희망을 빛 삼아 앞으로 전진하겠죠.
그러한 면에서 [더 로드]는 [미스트]와 비슷하면서도 정반대의 지점에 서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미스트]에서 데이빗(토마스 제인)은 안개와 함께 몰려온 정체불명의 괴물에 의해 사람들이 몰살당하자 어린 아들을 지키기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결국 모든 희망이 버리고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합니다. 희망을 버린 사람들의 섬뜩한 광기가 고스란히 느껴진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더 로드]의 남자는 아닙니다. 희망을 잃은 채 집을 나가버린 아내(샤를리즈 테른)와는 달리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과 희망을 찾아 정처없이 떠납니다. 그에게 어린 아들이 희망 그 자체이기에 결코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토요일 아침의 스산한 거리 풍경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가 [더 로드]에 더욱 공감이 되었던 것은 아들을 지키기 위한 남자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이기에, 따뜻한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아들을 위해서 편안한 죽음조차도 맘대로 선택할 수 없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면서도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영화의 후반부 남자의 그 뜨거운 눈물이 섬뜩한 분위기 속에서 한기를 느끼고 잔뜩 움추린채 영화를 보던 내 마음에도 뜨겁게 흘러 내렸습니다. 저 역시 아버지이기에 이런 세상에 혼자 남겨질 아들을 위한 그의 눈물은 그 어떤 영화의 감동스러운 장면보다도 제 마음을 뜨겁게 적셨습니다.
아버지로써 그 남자의 눈물이 공감되었다.
그래도 희망은 사람이다.
[더 로드]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약한 사람들을 약탈하고, 심지어 잡아 먹기까지 하는 그들의 모습은 인간의 가장 악한 본성을 보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 역시 사람입니다.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도 남을 생각하고 걱정해주고 챙겨주는 그 따뜻한 마음씨가 있다면 영화 속의 잿빛 세상은 다시금 따뜻한 세상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라스트는 무작정 급작스럽게 끝난 듯이 보이지만 제가 보기엔 마지막 희망의 가능성을 열어 둔채 인간의 선한 본성을 희망으로 제시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희망의 불씨가 남아 있다면 그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채 세상을 재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가느다란 희망의 불씨를 남긴 채 끝을 맺어서인지 극장 밖의 풍경은 아침의 스산함은 온데간데없이 활기찬 사람들과 따뜻한 오전의 햇살이 밝게 빛나고 있더군요. 전 잔뜩 움추렸던 어깨를 활짝 펴고 토요일을 맞이한 활기찬 사람들의 모습을 즐기며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갑자기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집에 들어와서도 어린 웅이를 꼭 안아줬고, 아직 잠에 덜 깬 구피를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바라보며 제 마음 속 희망의 불씨를 평생 간직하며 살아가기로 마음 먹어봅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죠.
[더 로드]는 그런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영화 자체는 암울하지만 이 영화가 남겨 놓은 가느다란 희망의 불씨는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제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약탈하는 악한 본성의 그들은 영화를 섬뜩하게 만들지만...
남을 걱정하고 배려하는 선한 본성의 그 녀석은 영화를 따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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