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화노트/1998년 영화노트

어딕션(The Addiction) ★★★★

쭈니-1 2010. 1. 1. 17:16

 

 

 

날짜 : 1998년 9월 18일
감독 : 아벨 페라라
주연 : 릴리 테일러, 크리스토퍼 워큰, 아나벨라 시오라

 

 

'나를 사로 잡는 것은 우리 모두가 관여한 악과 폭력의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의 피 속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뱀파이어 장르는 이것을 표현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다.'
아벨 페라라의 95년작 [어딕션]은 그의 짧은 한마디로 모두 설명되는 영화이다. 아벨 페라라는 뱀파이어 영화라는 장르 속에서 악과 폭력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으며 흑백으로 펼쳐지는 이 기이한 뱀파이어 영화 속에서 관객은 당혹감을 맛볼 수 있다.
영화는 1969년 미군이 베트남 전에서 마이 라이 마을주민 모두가 베트콩과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마을 주민 모두를 말살시킨 마이 라이 대학살 사건을 슬라이드 화면으로 보여주며 시작한다. 뉴욕대 철학과 대학원생인 캐슬린(릴리 테일러)은 인간이 저지른 그러한 만행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국가 차원에서 저질러졌던 만행들이 개인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동료들에게 반문한다. 그러나 곧이어 그녀는 카사노바(아나벨라 시오라)라는 낯선 여인에 의해 목덜미를 물리게 되고 뱀파이어가 된다. 그녀는 남의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다. 그것은 곧 타인의 희생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아벨 페라라 감독은 캐슬린의 인간적 고뇌에 카메라를 들이 댄다. 부랑자의 손에 바늘을 꽂고 피를 충당하던 캐슬린은 점차 지도 교수와 대학원 동료 또는 흑인 건달을 유혹하여 욕망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그러다 그녀는 페이나(크리스토퍼 워큰)라는 뱀파이어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뱀파이어의 법칙을 배우게 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캐슬린의 박사 학위 취득 파티때 동료 뱀파이어들을 초대하여 벌이는 피의 축제이다. 이 장면은 영화가 시작하며 보여 주었던 인간의 만행과 교차되고 결국 캐슬린은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만행을 저지르는 당사자가 되고 만다. 그리고 그녀는 죽음을 통해 구원받는다.
애초에 이것은 뱀파잉 영화가 아니다. 아벨 페라라는 뱀파이어 장르를 선택했지만 장르의 법칙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는 듯 하다. 흑백 화면을 통해 보여지는 검은 피의 이미지는 마치 악의 근원을 보는 듯 하며, 바늘을 통해 피를 뽑는 행위는 에이즈와 마약 시대에 대한 감독의 통쾌한 패러디이다.
이 영화는 개인이 저지르고 있는 악에 대한 이야기이며 개인이 처해있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캐슬린을 뱀파이어로 만든 카사노바는 그녀를 물기 전 '꺼지라고 해봐. 사라져 줄테니.'라고 기회를 준다. 하지만 캐슬린은 미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 장면을 보고 국가 권력의 공인된 폭력을 개인의 잘못으로 전가되는 것에 분개하지만 그녀가 맞닿은 일상의 폭력에 대해서는 살려달라는 말뿐 저항하지 못한다. 그것은 다른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벨 페라라 감독은 '왜 우리가 현실 속에 처한 악과 폭력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가?'라고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자신이 처한 악과 폭력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한 우리 모두 악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악의 가해자이기도 하며, 국가가 자행하고 있는 그 모든 만행들을 두려움 속에 또는 무관심 속에 묵과함으로써 공범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캐슬린에 의해 구체화 된다. 캐슬린은 카사노바에게 물림으로써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만 고통을 버리기 위해 다른 무고한 이들을 물음으로써 악의 가해자가 된다. 카사노바가 자신에게 하려했던 폭력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그녀는 결국 대학살의 가해자가 된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이 영화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대단위의 만행과 개인이 벌이는 폭력이 근본적으로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벨 페라라에 의하면 자신이 저지른 악에 대해 구원 받는 길은 죽음 뿐이며, 자신이 당하고 있는 폭력에 대해 피할 길은 죽음 뿐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캐슬린이 선택했던 죽음과도 같이 암울하다. 

 


 

2010년 오늘의 이야기

 

2009년 안에 1998년 영화 노트를 마감하려 했는데 결국 2010년으로 넘어가 버렸군요. [어딕션]을 빼고 열 편 정도 남았으니 열심히 업뎃하면 1월 안에 끝낼 듯 하네요.

암튼 [어딕션]은 뱀파이어 영화이긴 하지만 일반 뱀파이어 영화와는 달리 심각한 내용을 담은 영화입니다. 마치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연상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