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고어 버빈스키
주연 : 나오미 왓츠, 마티 핸더슨, 데이비드 도프만
개봉 : 2003년 1월 10일
공포 영화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나의 그녀... 머리 풀어헤친 귀신 나오는 공포 영화를 보고나면 그 잔상이 오랫동안 남아서 혼자 방에 있는 것 조차도 무섭다는 그녀는 그러나 공포 영화가 개봉되면 빠지지않고 모두 보고 맙니다. 도대체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왜 공포 영화를 보냐고 물으면 그녀는 씨익 웃으며 딱 한마디만 합니다. '재밌잖아.'
그런 그녀가 헐리우드판 [링]의 개봉을 그냥 넘길리가 없습니다. [링]의 개봉날짜가 다가오자 마치 기다렸던 선물을 받는 듯 흥분하며 좋아하던 그녀. 일본판 [링]은 너무나도 무서울 것 같아서 아예 보지도 못했다는 그녀는 [링]을 저녁에 보면 너무 무서워 밤에 혼자 잘수가 없다며 낮에 보자고 조르더군요. 그래서 결국 저는 황금같은 토요일 오후에 머리를 풀어헤친 서양 귀신이 TV에서 흐느적 흐느적 기어나오는 장면을 얼굴을 찌푸리며 억지로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화창한 토요일 오후에 기분나쁜 공포 영화인 [링]을 본 것보다도 더 황당한 것은 이 영화를 보고난 후의 그녀의 반응입니다. 무서운 장면이 나올때마다 제 팔에 기대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아버렸던 그녀는 영화가 끝나자 '별로 안 무섭네'라고 하더군요. 그녀의 그 한마디가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여름 시즌이 되면 걱정입니다. 여름 시즌엔 본격적으로 공포 영화들이 개봉될텐데... 그때마다 화창한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오후를 희생해가며, 기분나쁘게 생긴 귀신들을 담은 그 커다란 스크린속을 응시하고 있어야 하다니... 게다가 공포 영화보자던 그녀는 막상 영화가 시작하면 눈을 감기에 바쁘고, 영화가 끝나고나면 '안 무서웠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것을 매번 당해야 하다니... 아! 사랑이라는 것은 정말 힘든 겁니다. ^^;
1999년 여름, 무섭다는 입소문이 퍼지며 신은경이 주연한 한국판 [링]은 흥행에서 성공하고 있었지만, 전 [링]을 보기위해 극장으로 달려가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귀신나오는 영화는 끔찍히도 무서워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한국판 [링]은 비디오로 보게 되었는데 머리를 풀어헤친 배두나가 TV에서 기어나오는 장면에선 한동안 TV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을 지경으로 혼비백산했었습니다.
오리지널인 일본판 [링]을 본 것은 거의 1년정도가 흐른 뒤입니다. 한국판 [링]을 이미 본 저는 내용을 전부 알고 있었기에 별로 무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단지 한국판 [링]과 일본판 [링]을 비교하고 싶어서 별 생각없이 일본판 [링]을 본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한국판 [링]을 볼때보다 일본판 [링]을 볼때가 더 무섭더군요. 한국판 [링]을 봤을땐 마지막에 배두나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TV에서 기어나올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했기에 그 장면에 대한 충격이 컸었습니다. 하지만 일본판 [링]을 볼때는 마지막 장면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속으로 만반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에 대한 충격은 오히려 한국판 [링]보다도 컸습니다.
그리고 이제 미국판 [링]이 개봉되었습니다. 미국에선 박스오피스를 석권하며 1억달러가 넘는 흥행 수입을 올렸다는 이 영화는 일본에서마저도 흥행에 성공하였다는 군요. 하지만 솔직히 저는 미국판 [링]의 공포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생각했었습니다. 동양적 공포인 머리 풀어헤친 귀신이 서양인이라고 생각하면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웃길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링]의 오리지널 스토리가 무섭다고는 하지만 전 이미 한국과 일본판 [링]을 경험했기에 미국판 [링]은 전혀 무서울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국판 [링]을 보는 동안 제 심장은 사정없이 뛰었고,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욕구가 느끼며, 그대로 그냥 극장을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무서웠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국판 [링]을 볼때는 전혀 영화에 대한 기본 지식없이 봤기에 예상하지 못한 장면에 놀랬었고, 일본판 [링]에서는 일본 특유의 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오리지널 영화가 가지고 있는 공포에 놀랬었지만, 설마 머리풀어헤친 귀신이 어색할것만 같은 미국판 [링]에서조차 공포를 느낄줄이야...
예상치못한 미국판 [링]의 공포... 그 뒤에는 고어 버빈스키 감독이 있었습니다. [마우스 헌트], [멕시칸]에서 그 능력을 발휘했던 고어 버빈스키 감독은 일본판 [링]을 미국판으로 리메이크함에 있어서 오리지널 스토리엔 전혀 손상을 가하지 않으면서도 완벽하게 미국에 맞게끔 변형을 시킨 겁니다. 그러한 고어 버빈스키 감독의 재능은 영화의 여러 장면과 설정에서 발견됩니다.
영화의 오프닝씬... 전형적인 미국의 중산층 주택에서 TV를 보며 농담을 하고 있던 두명의 소녀. 그때 왠지 공포스러운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이어서 끔찍한 공포가 이 평화롭게 보이는 집을 감쌉니다. 이 인상적인 오프닝씬은 영락없이 [스크림]의 오프닝씬과 비슷합니다. 평화스럽게 보이는 중산층의 주택을 공포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것도 그러하고, 전화벨 소리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그러하며, 아무 죄없는 소녀의 이유없는 죽음 역시도 그러합니다. 고어 버빈스키 감독은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스크림]으로 대표되는 스플래셔 무비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일본판 [링]을 완벽하게 미국판 [링]으로 변형시킨 겁니다.
이러한 시도는 오프닝씬 뿐만이 아닙니다. 이 의문의 사건을 풀어나가는 레이첼(나오미 왓츠)의 어린 아들인 에이단(데이비드 도프만)에게 [식스센스]의 콜(할리 조엘 오스먼드)이 느껴지기도 하고, 레이첼이 노아(마티 헨더슨)와 함께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는 전체적인 영화의 분위기는 영락없이 헐리우드의 주류 장르인 미스테리 스릴러입니다.
이렇게 고어 버빈스키 감독은 일본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동양적인 공포로 철저하게 무장된 [링]을 [스크림], [식스센스] 등 미국에서 성공한 공포 영화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공포보다는 스릴러로 영화를 이끌어 나감으로써 헐리우드 영화다운 분위기로 전환시킨 겁니다. 이러한 고어 버빈스키 감독의 시도는 조금은 배타적인 미국 관객들에겐 익숙함을 그리고 제겐 전혀 새로운 공포를 안겨 주었던 겁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미국적인 분위기만으로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미국적인 분위기로 영화를 치장함으로써 헐리우드와 [링]의 만남은 어색할 것이라는 제 예상을 간단하게 깬 이 영화는 오리지널인 일본판 [링]의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서양적인 공포와 동양적인 공포의 완벽한 앙상블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링]의 가장 무서운 공간인 우물이 이 영화에선 어떻게 표현될지 무척 궁금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하얀 소복을 입고 우물을 기어나오는 머리 풀어헤친 귀신도 분명 어떻게든 변형되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고어 버빈스키 감독은 이러한 것들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그러면서도 [링]의 공포를 완벽하게 잡아냅니다.
왠지 미국에는 우물이 없을 것 같으며, 머리 풀어헤친 귀신이 나오면 넌센스라고 생각했던 저는 이 영화가 어떻게든 이런 동양적인 분위기를 바꾸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변화가 [링]의 공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무척이나 궁금했던 겁니다. 하지만 고어 버빈스키 감독이 바꾼 것은 헐리우드 공포 영화에서 차용된 여러 이미지와 전체적인 분위기일뿐 다른 세세한 요소는 전혀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엔 여전히 공포스러운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이 나오고, 마지막엔 그 우물에서 머리 풀어헤친 귀신이 하얀 소복을 입고 기어나옵니다. 어떻게든 이 장면을 바뀔것이라고 생각했던 제게 오히려 바뀌지않고 오리지널 그대로 풀어나가는 이 영화의 공포는 꽤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동양적인 성격이 다분한 한이 맺힌 여자 귀신이 나온다면 왠지 웃길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웃기기는 커녕 몇번이고 본 이 장면에서 또다시 공포에 빠져들고 말았던 겁니다.
헐리우드 의 공포 영화를 차용함으로써 이 영화가 헐리우드 영화임을 명확히 함과 동시에 오리지널 [링]의 공포를 그대로 차용함으로써 전혀 색다른 동양적 공포와 서양적 공포의 앙상블을 보여줬던 이 영화는 그렇게 공포 영화를 끔찍히도 무서워하는 제게는 거의 악몽과도 같은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속편이 기다려지는 것은 또 어찌된 일인지... 누군가가 왜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공포 영화를 계속 보냐고 물으면 저도 씨익 웃으며 '재밌잖아'라고 대답하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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