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03년 영화이야기

[피아니스트] - 죽음앞에 나약하기만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

쭈니-1 2009. 12. 8. 15:45

 



감독 : 로만 폴란스키
주연 : 애드리언 브로디, 토마스 크레슈만
개봉 : 2003년 1월 1일

작년 12월... 나의 그녀가 상기된 표정으로 제게 말했습니다.
"나, 보고 싶은 영화 생겼어?"
다른 건 몰라도 보고 싶은 영화는 어떤 영화라도 모두 보여주겠다고 그녀에게 약속한 저는 그녀를 그렇게 설레이게 한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무척이나 궁금했었습니다.
"오늘 회사가다가 지하철에서 아주 잠깐 포스터만 봤는데 공포 영화인거 같아."
겁은 많으면서도 공포 영화라면 사죽을 못쓰는 그녀... 하지만 그 당시에 개봉 대기중인 공포 영화는 [고스트 쉽]밖에 없었습니다.
"아냐, [고스트 쉽]은 아니고, 파란 배경에 어느 페허같은 도시에서 남자가 서있는 포스터였는데... 그 영화 정말 무섭겠더라."
도대체 어떤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그러는 것인지... 저는 영화 사이트에 들어가서 국내 개봉 대기중인 공포 영화를 모두 뒤져봤지만 쉽게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영화란 말인가???
그에 대한 궁금증은 며칠후에 자연스럽게 풀렸습니다. 극장 한켠에 붙어있는 [피아니스트]의 포스터를 보고 이 영화라며 좋아하는 그녀... 하지만 [피아니스트]는 공포 영화가 아니고 전쟁 영화라는 제 설명에 그녀의 표정엔 실망감이 역력했습니다.
"난 전쟁 영화 싫은데... 특히 유대인 학살 나오는거..."
그렇게해서 한동안 그녀를 설레이게 했고, 절 궁금하게 했던 영화의 정체는 밝혀졌지만, 둘이 똑같이 전쟁 영화는 싫어하기에 [피아니스트]는 안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새해의 첫날인 1월 1일... 새로운 마음으로 만난 우린 마땅히 갈 곳이 없었습니다. 12월동안 너무나도 열심히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나머지 안 본 영화들도 없었고... 그래서 결국 [피아니스트]라도 보자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관객이 없을 것이라는 우리 두 사람의 생각을 비웃듯 [피아니스트]는 매진이었고, 그렇게 2003년 새해 첫 극장나들이는 물거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피아니스트]... 2002년 12월동안 날 그렇게 궁금증에 시달리게 만들더니, 2003년 첫날부터 날 물먹인 괘씸한 영화... 암튼 그런 우여곡절끝에 결국 [피아니스트]는 극장에서 보는 것을 포기하고 집에서 컴퓨터로 보게 되었습니다. ^^;


 



[피아니스트]는 전쟁 영화입니다. 아니 그렇다고해서 빗발치는 총탄속에서 주인공의 영웅적 활약상과 전쟁의 끔찍함을 표현한, 제가 싫어하는 그런 류의 전쟁 영화는 아닙니다. 이 영화가 소재로 삼고 있는 것은 2차 세계대전중에서 인류사 최대의 비극으로 알려진 '유대인 대학살'입니다. 솔직히 '유대인 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를 저는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이 봤습니다. 그 유명한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부터 시작하여, 제목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 '충격'과 '감동'이라는 선전문구와 함께 개봉되었던 수많은 영화들에서 저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독일군의 만행을 보았으며, 너무나도 비참한 유대인의 비극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렇기에 [피아니스트]는 새로울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영화인 듯 보였습니다. 그것이 이 영화에 대한 저의 첫번째 편견이었습니다.
아주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피아니스트]가 다른 '유대인 학살'을 소재로 했던 영화와는 전혀 다르다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영화들과 똑같이 독일군의 만행이 나오고, 유대인의 비극이 나오며, 그 상황속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아야했던 한 남자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다른 '유대인 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들과 비교해서 새로울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영화인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새로울 것이 없는 이 영화는 그러한 속에서도 한시도 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듭니다. [쉰들러 리스트]를 보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중의 하나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야심찬 연출에도 하품을 했으며,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며 깐느 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을 매료시켰던 로베르토 베니니의 익살에도 지겨워했던 저는 분명 '유대인 학살'은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독일군의 만행이 이해가 되지 않고, 유대인들의 비극이 너무나도 불쌍해 보였지만, 그것은 결국 지난 일이며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한 제게 [피아니스트]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영화였습니다.
다른 영화들에 비해서 [피아니스트]가 제 마음에 더욱 와닿은 것은 바로 스필만(애드리언 브로디)의 그 치열한 생존기가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입니다. 결코 [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리암 니슨)처럼 영웅적이지도 않고, [인생은 아름다워]의 귀도(로베르토 베니니)처럼 희생적이지도 않은, 너무나도 나약한 인간이었던 스필만은 오로지 살아남기위해 자신의 가족을 버리고, 그 황폐한 잿더미속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한채 버텨왔던 겁니다. 먹을 것을 찾아 잿더미를 뒤지며 겨우 찾은 통조림 하나를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듯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던 스필만의 모습에서 같은 나약한 인간에 불한 제 자신을 발견한 겁니다. 전쟁의 잿더미속에서 살아남기위해 발버둥치는 나의 끔찍한 모습이... 이렇게 [피아니스트]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소재를 뛰어넘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기위해 발버둥치는 한 나약한 인간이라는 스토리 전개를 통해 '유대인 학살'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제게도 끔찍한 리얼리즘을 안겨주었던 겁니다.


 


  
[피아니스트]는 2002년도 깐느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입니다. 이미 2001년도 수상작인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그 이해할 수 없는 [피아니스트]를 보았던 저로써는 깐느 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은 저와는 다른 영화보는 눈을 가진 이상한 족속들로 비춰졌으며, 그러한 편견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에도 이어졌습니다. '그래, 그 잘난 사람들이 그랑프리를 수상하여 줬으니, 이 영화는 또 얼마나 심오하고, 어려우며, 재미없는 영화일까?' 그것이 이 영화에 대한 저의 두번째 편견이었습니다.
[피아니스트]는 확실히 대중적인 영화는 아닙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그리 관객에게 친절한 영화 감독도 아닐뿐더러(그의 영화중에서 재밌게 본 영화는 [차이나타운]뿐입니다.) 주연을 맡은 애드리언 브로디 역시 헐리우드 배우이기는 하지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스타급 배우는 아닙니다. '유대인 학살'이라는 소재 역시 대중적으로 먹혀들어갈 흥행성있는 소재는 분명 아닐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 영화가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를 위시한 다른 깐느 영화제의 수상작들처럼 심오하고, 어려우며, 재미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인 스필만의 살아남기위한 처절한 행동이 제게 공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예술 영화들에 대한 제 생각은 '이해할 수 없다'입니다. 최근에 보았던 깐느 영화제 수상작인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도대체 에리카(이자벨 위페르)의 그 변태적인 성적 욕망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것을 그려낸 감독의 의도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의 의미 역시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라는 것은 '재미 없다'와는 다른 의미에서 영화를 보는 제겐 상당히 기분이 나쁩니다. 마치 이런 류의 예술 영화를 보고 이해하며 감동을 받아야지만 진정한 영화광이 될 수 있는 듯한 착각은 절 상당히 곤란하게 만듭니다. '난 왜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없을까?'라는 자조섞인 푸념도 나도 모르게 하게 됩니다. 그런데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는 절 그렇게 죄절하게 했던 깐느 영화제의 그랑프리 수상작임과 동시에 '이해할 수 없다'라는 감정에서 벗어나 '재미있다'라는 감정을 전해준 몇안되는 영화인 겁니다.
내가 만약 스필만이었다면??? 전 분명 이 영화속의 스필만처럼 살아남기위해 도망치고 숨어있었을 겁니다. 다른 레지스탕스처럼 독일군을 습격하는 영웅적인 행위도 하지 못했을 것이며, 사지로 내몰린 가족들을 구하기위해 내 자신을 버리는 희생적인 행위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단지 죽음앞에 두려워하며 그렇게 꼭꼭 숨어있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영화가 공감하며 감동을 받은 이유입니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그래서 공감이 갈 수 밖에 없었던 스필만의 생존기... 이 영화는 관객들이 좋아하는 영웅이나 희생을 내세우지 않고 이렇게 진솔하게 나약하기만한 한 인간을 그려내는데 여념이 없었던 겁니다.


 



전쟁의 포화속에서도 피아노 치는 것을 멈출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스필만의 고귀한 예술가적인 모습은 점차 살아남기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바뀌고, 가족을 구하기위해 노력했던 스필만의 희생적인 행위는 우연히 찾아온 생존의 행운앞에서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겁쟁이로 바뀝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스필만을 욕할 수 없습니다. 마치 심심풀이로 유대인을 총으로 쏴 죽이는 독일군의 그 악마적인 모습속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던 겁니다. 마실 물이 없어 구정물을 마셔야 하고, 통조림 하나가 이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었던 스필만의 그 처절한 생존기.
영화의 후반 숨어있다가 독일군 장교인 호센필드(토마스 크레슈만)에게 들켜 마지막 연주일지도 모르는 피아노 연주를 하는 그의 그 모습에서 음악에 대한 문외한인 제가 스필만의 그 처절한 생명력을 느낀 것은 아마도 이 영화가 그만큼 진솔했다는 의미일겁니다. 그 수많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아 마지막 혼을 담아서 연주하는 피아노의 선율속에서 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를 들은 겁니다.
모든 건물이 부셔져버린 폐허속에서 홀로 서있는 스필만... 공포 영화보다도 더욱 공포스러운 그 상황속에서 결코 살아남으려는 의지만은 버리지 않았던 이 나약했던 예술가는 그렇게 전쟁 영화를 싫어하며, 예술 영화를 미워했던 저의 편견을 부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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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피의꿈
와우~이번엔 정말 잘썼다...^^ 근데 또 끝마무리가 너무 서둘러 매듭지어진 것 같아.
'피아니스트'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든다.
난 깐뜨니 뭐 그런거랑 별루 안친해서 보고싶지 않았는데 너의 글을 읽고 나니까 웬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반면에...
가끔 쭈니가 재미있다는 게 다른사람들은 별루 재미없는게 좀 있어서....ㅋㅋㅋ 좀 걱정되기도 하고....
 2003/01/10   
쭈니 오랜만에 들어보는 칭찬인걸... 근데 역시 마무리는 좀... 사실 오늘 아침에 썼는데 너무 배가 고팠거든. 그렇다고 이 글을 마무리하기전엔 밥이 안먹힐것 같아서... ^^
내가 재미있다는 영화가 다른 사람들에겐 별로 재미없다고???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일꺼야. ^^
오늘 이 영화 줄테니 한번 봐봐.
 2003/01/10   
아랑
영화볼려고 집에 있는 컴터 업글했어요. 거금 15만원정도 투자^^;
근데 다운받을 영화가 없네.. 이거 재밌겠다!
 2003/01/11   
쭈니 오호~ 15만원이나 들어서 업그레이드를...
이젠 아랑님도 컴으로 대부분의 영화를 보시겠군요.
추카추카~
 2003/01/11   
dori
저도 이 영화 정말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집에 굴러 다니기에
아무 생각없이 봤습니다. 유태인 어쩌고 했으면 보지도 않았을
테지만 그냥 시작해서 봤는데, 스필만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서
눈을 뗄 수가 없더군요. 제 사촌동생에게도 권했더니 재미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다른사람들은 다 재미없다고 하더군요.. --;;
그래도 저는 나름대로 재미있는 영화로 기억합니다.
피아니스트 중간쯤 막막한 현실속에 쫒기는 신세가 된
스필만이 예전의 아는 여자분에게 도움을 받아 그녀의 집에
하루 머물게 되었을때 스필만의 그런 지옥같은 현실속에서
맞는 평화로운 아침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장면이었죠. 지옥같은 날들을 보내지만,
그 아침은는 너무 평온하여 스필만이 살아있다는 것을,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장면이 아닌가 합니다.
그때 문틈 사이로 들려오던 첼로 연주를 잊을 수가 없네요. 그후로 저는 무반주 첼로 협주곡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피아니스트는, 스필만의 생존기가 숨막히게 진행되는
영화였지만, 간간히 들을 수 있는 피아노 연주와 음악들이 영화의 답답함을 잔잔히 달래주면서 영화의 재미를 더해주어
저에게도 이런 장르의 영화에 대한 편견을 조금은 달아나게 해준
의미있는 영화였습니다. 쭈니님께서 좋게 평가하셔서 그나마
정말 다행입니다. 전 이영화가 재미있는 제가 이상한 줄로
알았답니다. *^^*
 2005/10/20   
쭈니 그럴리가요. 이 영화를 재미없게 보신 분들도 계시군요. ^^ 저 역시 유태인 소재의 전쟁 영화는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이 영화는 정말 재미있었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와 필적할만한 감동의 대작이라는 생각이... ^^  2005/10/20   
브로디는 뭘해도 멋있습니다.. 그냥반..
음악이란 소재.. 참 좋아합니다.. 정말.. 사람을 움직이게 합니다..
 2009/01/02   
쭈니 브로디는 뭘해도 멋있습니다.... 맞습니다. ^^
음악이라는 소재는 관객의 마음을 일단 절반 이상은 따고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
 2009/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