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앤드류 니콜
주연 : 알 파치노, 레이첼 로버츠, 캐서린 키너
개봉 : 2003년 1월 17일
제게 짐 캐리의 최고의 영화는 그의 코미디적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된 [마스크]나 [덤 앤 더머]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심각한 연기에 도전한 [트루먼 쇼]였습니다. 전 이 영화를 보며 그렇게 우스꽝스럽던 짐 캐리를 보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랬고, 피터 위어 감독의 그 재능에 놀랬었습니다.
하지만 [가타카]라는 영화를 본 후 [가타카]를 연출한 앤드류 니콜 감독이 [트루먼 쇼]의 각본을 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때는 '만약 [트루먼 쇼]를 앤드류 니콜 감독이 만들었다면 더욱 재밌고, 감동적이지 않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제가 피터 위어 감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연출한 [위트니스]와 [죽은 시인의 사회]는 제게 있어서 최고의 영화중 하나이며, 이 영화들을 연출한 피터 위어 감독은 제가 좋아하는 감독들중의 한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트루먼 쇼]는 피터 위어 감독보다는 앤드류 니콜 감독에게 더욱 잘 어울렸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앤드류 니콜 감독... [트루먼 쇼]의 각본과 제작을 맡음으로써 헐리우드에 데뷰하고, [가타카]로 감독에 데뷰한 그는 [시몬]이 고작 두번째 연출 작품일 정도로 풋내기 감독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는 '고도화된 현대 문명의 비판'이라는 자신만의 메세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 무거워 보이는 메세지를 코미디로 가볍게 치장할줄도 아는 제가 보기엔 굉장히 유능한 감독입니다. 그의 그러한 재능은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미디어의 횡포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볍고 감동적으로 치장한 [트루먼 쇼]에서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트루먼 쇼] 이후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유전자 조작이라는 주제를 꺼내든 [가타카]는 [트루먼 쇼]에 비해서 너무나 무겁고 진지하여 조금은 아쉬웠지만, [시몬]을 통해 앤드류 니콜 감독은 [트루먼 쇼]에서 선보였던 자신의 재능을 다시한번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시몬]은 헐리우드 스타 시스템에 대한 앤드류 니콜 감독의 자조섞인 비판임과 동시에 스타라는 허왕된 이미지앞에서 일반인들이 얼마나 속고 있는지에 대한 우화입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헐리우드 촬영장 한 구석에서 색색가지의 사탕를 궁상맞게 구별하고 있는 빅터 타란스키(알 파치노)감독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가 캔디를 구별하는 것은 단지 주연 배우인 니콜라(위노나 라이더)가 계약서에 촬영장 어디에 가도 체리맛을 제외한 사탕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조항을 삽입시켰기 때문입니다. 타란스키는 바로 니콜라를 위해서 체리맛 사탕을 구별하고 있었던 겁니다. 곧이어 니콜라가 행차하셨다는 전갈에 부랴부랴 니콜라에게 달려가는 타란스키. 그러나 니콜라는 트레일러가 다른 배우보다 작다는 이유를 들어 계약을 파기시켜 버립니다. 니콜라의 계약 파기로 인하여 타란스키는 자신의 전처이며 영화사의 사장인 일레인(캐서린 키너)에게 해고당하고, 자신의 영화도 만들지 못할 상황에 처합니다.
조금은 과장된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앤드류 니콜 감독이 그린 헐리우드의 실상입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제작자도 감독도 아닌 관객에게 영향력이 있는 몇몇 스타이며, 그들은 영화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의 자존심에 더 집착하고, 영향력이 없는 초짜 혹은 비흥행 감독들에게 횡포를 부립니다. 영국에서 CF를 찍다가 [트루먼 쇼]라는 각본을 가지고 헐리우드로 온 초짜 감독이었던 앤드류 니콜도 어쩌면 이 영화의 타란스키와 같은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앤드류 니콜 감독은 자신의 시나리오인 [트루먼 쇼]를 직접 감독하려 했지만 짐 캐리라는 거물급 스타 배우의 캐스팅으로 제작비가 급상승하자 감독 자리를 피터 위어에게 물려주고 [가타카]에 이르러서야 겨우 감독 데뷰를 할 수 있었다니... 충분히 앤드류 니콜 감독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이렇듯 타란스키는 앤드류 니콜 감독의 분신입니다. 단편 영화로 아카데미에 두번이나 노미네이트되었던 타란스키는 연이은 흥행 실패로 흥행 배우에 기대어야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상황에 빠졌으며, 이러한 상황은 영국에서 CF계에서 이름을 날린 후 헐리우드에 진출하였으나 [트루먼 쇼]는 초짜 감독이라는 이유만으로 베테랑 감독인 피터 위어에게 빼앗기고, [가타카]의 흥행 실패로 그 입지가 좁아진 앤드류 니콜 감독의 상황으로 연결됩니다. 타란스키는 시몬(레이첼 로버츠)이라는 사이버 여배우를 통해 멋지게 재기하지만, [시몬]마저도 흥행에서 실패하여 더욱 입지가 좁아진 앤드류 니콜 감독은 이제 어떻게 할지... 이렇게 [시몬]은 바로 헐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앤드류 니콜 감독의 자조섞인 자기 자신의 자화상인 겁니다.
니콜라의 계약 파기로 자신의 영화를 만들지 못할 위기에 빠진 타란스키. 그런 그에게 행크라는 한 남자가 남긴 CD-ROM이 배달됩니다. 놀랍게도 그 CD-ROM에는 너무나도 완벽한 사이버 여배우 시몬이 담겨져 있는데...
이제 영화 [시몬]은 '초짜 감독이 헐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우화를 뛰어넘어 본격적으로 스타의 허황된 이미지에 의해서 열광하고 관객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담아냅니다.
얼마전 [파이널 환타지]라는 애니메이션에서 사람보다 더욱 사람같은 사이버 배우들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개봉으로 영화 관계자들은 '이제 배우가 필요없어지는 세상이 온다'라고 확신하기도 했지만 관객들은 [파이널 환타지]를 철저하게 외면함으로써 그들이 원하는 것이 가짜 배우인 사이버 배우가 아닌 살아 숨쉬는 진짜 스타 배우들이라는 의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그것은 일반 관객들이 얼마나 스타의 허황된 이미지를 동경하고, 숭배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아무리 컴퓨터 기술이 발달하였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사이버 배우가 허황된 이미지로 치장한 스타를 넘을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한 셈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몬]에서의 타란스키의 사기극은 관객에게 공감을 받습니다. 시몬이 사이버 배우가 아닌 진짜 배우라고 속이는 그는 일반 관객들에게 있어서 스타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그러한 무지한 관객이 없다면 자신의 영화도 결코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사기극을 벌일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고보면 앤드류 니콜 감독의 영화들은 모두 끊임없이 서로를 속이고, 서로에게 속임을 당합니다.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 버뱅크(짐 캐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속고 있었으며, [가타카]에서 열성 유전자를 지닌 제롬 머로우(에단 호크)는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우성 유전자만이 가질 수 있는 우주 비행사의 꿈을 이루었고, [시몬]에서 타란스키는 세상 사람들에게 시몬이 진짜 배우라고 속이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앤드류 니콜 감독의 영화에 빠지지 않는 사기극은 영화의 재미를 높여 줍니다. [트루먼 쇼]에서는 감동을 안겨주었으며, [가타카]에서는 스릴을 안겨주었고, [시몬]에서는 웃음을 안겨 줍니다. 시몬이 사이버 여배우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벌이는 타란스키의 그 처절한 사투는 알 파치노의 그 탱한 눈과 더불어 도저히 웃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재미를 안겨줍니다.
알 파치노의 어울릴것 같지않은 코믹 연기를 감상하는 동안 영화는 후반으로 흐르고 타란스키는 자신이 벌여놓은 사기극에 빠져 오히려 자기 자신의 자아를 잊고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화보다는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시몬에게 더 환호성을 보내고, 자신의 예술 세계인 영화에만 열중했던 타란스키는 점점 영화를 잊고 시몬을 좀더 멋지게 꾸미는 일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일레인에게 '내가 시몬을 창조했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타란스키. 하지만 일레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시몬이 당신을 창조한거예요'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영화를 만들기위해 창조한 시몬에게 오히려 지배당하는 타란스키는 시몬에게 벗어나기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그것은 모두 헛된 노력에 불과합니다. 시몬의 이미지를 망가뜨리기도 하고 TV프로에서 사회적인 파장을 있을 발언을 서슴치않고해도 오히려 사람들은 시몬에게 열광하기만 합니다.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앤드류 니콜 감독은 스타의 허왕된 이미지에 맹목적으로 열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풍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맹목적인 열광에 기대어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는 자신의 딱한 처지를 푸념하듯이 털어놓습니다. 아무리 시몬에게서 벗어나려해도 벗어날 수 없는 타란스키의 비애처럼... 영화의 후반으로 가면 앤드류 니콜 감독은 절망에 빠진 듯이 발랄하던 영화의 분위기를 한없이 다운시킵니다.
결국 시몬에 의해서 다시 재기에 성공하는 타란스키... 마치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는 헐리우드의 제작관행에 적응하고 따르겠다는 앤드류 니콜 감독의 항복선언같아서 조금은 마음이 편치 않지만 그래도 초짜 감독이었던 앤드류 니콜이 '이젠 헐리우드에 적응됐다'라고 자신있게 외치는 것만 같아서 기쁩니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시몬에게 반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타란스키의 그 탱한 눈에 반했듯이 헐리우드 스타 시스템에 맞서 자신의 영화 세계를 힘겹게 구축하고 있는 앤드류 니콜 감독에게도 반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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