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02년 영화이야기

[007 어나더데이] - 한반도가 영화의 무대가 아니었더라면...

쭈니-1 2009. 12. 8. 15:43

 



감독 : 리 타마호리
주연 : 피어스 브로스넌, 할리 베리, 토비 스티븐슨, 릭 윤
개봉 : 2002년 12월 31일

미군의 장갑차 사건으로 격앙된 반미감정이 한반도를 무대로 북한군 장교를 악당으로 묘사한 [007 어나더데이]에 영향을 미쳐, 요즘 극장가에선 [007 어나더데이]가 최대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시민 단체들을 중심으로 [007 어나더데이] 안보기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이며, 네티즌들도 한반도 상황을 잘못 인식한 이 영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007 어나더데이]의 개봉날인 지난 12월 31일에는 종로의 서울극장에서 [품행제로]라는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데 [007 어나더데이]안보기 운동을 하시는 수십명의 시민단체 회원들이 '[007 어나더데이] 상영을 중단하라'며 서울 극장앞에서 시위를 하시더군요.
솔직히 이러한 상황에서 [007 어나더데이]에 대한 영화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제겐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영화는 그 영화 자체을 보도록 노력했었습니다. '그 영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는가'보다는, '제가 그 영화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제 나름대로 글을 썼던 겁니다. 하지만 [007 어나더데이]에 대한 영화의 이러한 외적인 상황은 지금까지 제가 추구했던 '영화에 대한 나만의 진솔한 느낌'을 방해합니다. 저 역시 대한민국의 국민이기에 미군의 장갑차 사건에 분개를 하며, 한반도 상황을 잘못 인식한 이 영화에 대해서 영화를 보기전부터 거부감을 느꼈던 겁니다. 이러한 거부감은 영화를 보기전부터 영화 자체만으로 보는 것을 방해할 뿐만아니라 영화를 보고나서 영화 이야기를 쓸때도 제 느낌보다는 남들이 제 글을 어떻게 읽을지 한번더 생각하게 되며, 영화에 대한 좋았던 느낌보다는 의식적으로 영화에 대한 나쁜 느낌만을 쓰게 되는 겁니다.  
저는 이 영화를 인터넷으로 다운받아서 이 영화가 개봉하기 며칠전에 이미 봤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네티즌들의 거부감은 역시 제게도 영향을 미쳐서 영화를 보면서도 '그래, 니네들이 얼마나 우리나라를 엉망을 표현했는지 한번 보자'라는 공격적인 자세로 영화를 봤습니다. 분명 영화속 북한군에 대한 묘사는 엉성했으며, 배우들이 우리말로 연기할땐 실소가 터져나왔습니다. 게다가 북한군을 소재로 삼았으면서도 당사자인 우리 남한을 철저히 배제한 이 영화의 전개에 상당한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007 어나더데이]는 단지 영화 그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나름대로 재미있었다는 겁니다. 전작인 [007 언리미티드]에 너무나도 실망한 나머지 '이젠 제임스 본드는 역사속으로 사라져야 한다'라고 생각했던 제게 이 영화는 '아직도 제임스 본드가 살아있구나'라는 느낌을 줬다는 겁니다. 이렇듯 영화에 대한 제 느낌이 예상외로 '재미있었다'라는 것에 모아지자 전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007 어나더데이] 재미있었다'라는 글을 올릴 용기가 제겐 없더군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영화를 본 후 영화 이야기를 쓰는 것이 제가 고등학교 이후로 거의 1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행하여 왔던 취미 생활이기에 이제와서 멈출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며, 제 나름대로의 느낌을 진솔하게 적어서 다른 분들에게 비난을 받는 것이 제 자신을 속이는 것보다 휠씬 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이야기를 쓰며 이렇게 비장한 결심을 하는 것도 처음이네요. ^^;


 

 

    
먼저 이 글을 읽기전 한가지 유의하셔야 할것은, 이 글은 [007 어나더데이]의 왜곡된 한반도 상황에 대한 논란에서 벗어나, 단지 수십년동안 액션 영화팬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했던 007 제임스 본드의 최신 활약상을 소재로한 영화 자체만을 생각하며 썼다는 겁니다. 이 영화가 한반도를 무대로 펼쳐지지만 않았더라면 정말 오랫만에 시원하게 터지는 액션을 아무 생각없이 즐길 수 있었을텐데... 그 점이 너무나도 아쉽네요.
일단 [007 어나더데이]의 오프닝씬은 최근에 봤던 '007 시리즈'중에서도 가장 탁월합니다. 수십년동안 세계의 극악무도한 악당을 맞이하여 그 어떤 패배도 맛보지 않았던 제임스 본드(피어스 브로스넌)가 이 영화에선 드디어 포로로 잡힌 겁니다. 천하의 제임스 본드가 포로로 잡히다니...
물론 본드는 포로로 잡히기전에 엄청난 활약을 하며 북한군 초소를 초토화시키고, 포로로 잡혔으면서도 여유만만한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그래도 말끔한 복장과 말쑥한 외모를 자랑하던 본드가 고문으로 인하여 머리를 산발한채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은 '007 시리즈'는 거의 빠뜨리지 않고 봤던 제겐 상당한 재미를 안겨 주었습니다. 솔직히 그의 활약상을 즐기면서도 그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상처하나없이 빠져나오는 본드의 모습이 조금은 식상했었습니다. 하지만 [007 어나더데이]는 처음부터 그러한 본드의 활약상에 흠집을 내며 시작함으로써 '007 시리즈'에 점점 식상함을 느끼고 있던 관객들을 붙잡습니다.
이제 그는 북한군의 테러리스트 자오(릭 윤)와 포로 교환된채 조국인 영국에 돌아가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누명과 비난뿐입니다. 살인면허까지 취소된채 이제 스스로 자신의 누명을 벗어야 하는 제임스 본드...
이렇듯 [007 어나더데이]는 제임스 본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간 후에서야 영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이 영화의 제작사인 20세기 폭스사는 요즘 관객들에게 람보식의 비현실적인 영웅은 이제 안먹힌다는 것을 눈치챘으며, 제임스 본드의 위기로 새로운 '007 시리즈'를 시작함으로써 제임스 본드에 대한 관객의 친밀도를 높히는 효과를 본 것입니다. 수십년동안 변하지 않은 영웅상을 간직하던 제임스 본드는 이제 [007 어나더데이]에서 그 스스로 변할 준비를 함으로써 앞으로 수십년은 더 활약할 준비를 마친 겁니다.


 

 

  
이제 제임스 본드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로 결심합니다. 제임스 본드의 그러한 결심과 함께 제임스 본드의 망가진 모습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다시 제임스 본드를 말끔한 영웅으로 되돌려놓고 본격적인 제임스 본드의 활약상을 전개해 나갑니다. 이때부터 이 영화는 '007 시리즈' 특유의 화려한 스케일을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제임스 본드가 활약하는 장소도 북한에서부터 시작하여, 홍콩, 쿠바, 아이슬랜드를 거쳐 다시 한반도로 돌아오는 장대한 여정입니다. 이러한 장대한 여정속에서 태양의 나라 쿠바와 얼음의 나라 아이슬랜드 로케 장면은 마치 여름과 겨울이 한 화면속에 공존하는 듯한 묘한 재미를 안겨줍니다.
특히 제가 이 영화를 보며 감탄했던 것은 아이슬랜드 로케장면입니다. 베일에 쌓인 백만장자 구스타프(토비 스티븐슨)의 그 어마어마한 얼음 궁전의 그 위용과, 스피드한 영상이 돋보였던 얼음 호수에서의 추격전은 충분히 손에 땀을 쥘만한 명장면이었습니다.
여느 '007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제임스 본드의 신무기도 신기하기만 합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투명차인데... 지금까지 제임스 본드가 몰고 다니던 역대 본드카중에서도 최고라고 자랑할만 합니다. 그 외에도 다기능 시계와 엄청난 파워의 반지등 '007 시리즈' 특유의 최신 무기에 의한 재미를 이 영화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오프닝씬에서 제임스 본드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줌으로써 40여년동안 변하지않은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에 대한 변화를 암시했던 이 영화는,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과 함께 제임스 본드를 예전의 모습으로 돌려놓음과 동시에 그의 매력을 한껏 업그레이드 시켜놓고 '007 시리즈'에 대한 영화적 재미를 그대로 재배치함으로써 '007 시리즈'에 대한 변화와 불변이라는 양극속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맞춥니다.  


 

 


그러나 역시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는 본드걸의 대변화입니다.
이미 '007 시리즈'의 18편인 [007 네버 다이]에서 중국측 미녀 첩보원인 웨이린(양자경)을 통해 여성적이며, 수동적이고, 섹시한 이미지의 본드걸을 제임스 본드와 맞먹는 액션 영웅으로 탈바꿈시켰지만, [007 어나더데이]는 여기에 한술 더 뜹니다.
[몬스터 볼]이라는 영화를 통해 흑인 여자 배우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획득했던 할리 베리는 연기력과 흑인 배우 특유의 미모를 인정받은 여배우입니다. [007 어나더데이]는 이렇게 연기력과 미모를 함께 갖춘 할리 베리를 본드걸로 캐스팅했으면서도 징크스(할리 베리)라는 캐릭터에게 여전사적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웨이린이 가지고 있던 액션 영웅으로의 이미지와 기존의 본드걸이 가지고 있는 섹시한 매력이 함께 공존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발전시켰습니다.  
여기에다가 [007 언리미티드]에서 적군인지 아군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일렉트라(소피 마르소)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미란다라는 본드걸까지 만들어 놓음으로써 본드걸에 의한 영화의 재미를 업그레이드 시켰습니다.
이렇듯 [007 어나더데이]는 최근에 만들어진 '007 시리즈'중에서도 꽤 괜찮은 오락성을 지니고 있는 영화입니다. 물론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상당히 기분나쁘고, 엉성한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거의 공상과학 영화수준인 액션 영화라는 점을 인지하고, 단지 이 영화를 영화 그 자체로만 본다면, 화려한 영상과 엄청난 스펙타클 속에서 제임스 본드의 활약상을 아무 생각없이 감상하기엔 더없이 안성맞춤인 영화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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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로
인테넷의 과다한 보급(?)으로 게시판에 욕설이 난무하고, 이렇다 저렇다 남의 생각까지 막아버리는 네티켓 상실의 시대입니다. 얼마전에 개그콘써트의 말이 생각나네요. "개그는 개그일뿐 따라하지 말자"던가요?...^^
영화는 영화일뿐 실제는 아닐텐데... 무조건 비판만 하고 때를 지어 몰려다니니... 같은 논리로 따지면 우리영화에는 다른나라를 왜곡하고 비하하는 영화는 없었나 생각해봅니다.
쮸니님의 솔직한 평에 한표 보냅니다.
 2003/01/02   

쭈니
흑~ 감사합니다.
솔직히 예전에 제 영화이야기에 대한 욕설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냥 무시하려해도 왠지 기분이 무지 나쁘더군요.
그래서 이번 글도 많이 걱정했었습니다.
암튼 미니로님의 격려... 많은 힘이 되네요. ^^
 2003/01/02   

구피의꿈
비판하는건 좋은데 욕설은 좀 그렇다. 아이피 추적해서 따끔한 경고를 해줄까보당....감히 누구에게 욕설을-.-
아무튼 007 ....마지막 장면이 인상깊네...태국불상에...정말 이국적인 사원에....그리고 할리베리가 다이아몬드를 깔고 온몸에 뿌리고 누워있던데 안아픈지..아무리 비싼거라도...뾰족뽀족 아플텐데..난 왜 이런거만 궁금할까 몰라....
 2003/01/03   

쭈니
거기가 태국불상이었나???
일본사원이라는 말도 있던데... ^^
암튼 액션만을 생각한다면 근래 봤던 007 영화중 가장 괜찮았던 것 같아.
 2003/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