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이종혁 주연 : 염정아, 지진희, 조승우, 성지루 개봉 : 2002년 12월 27일
제겐 아주 귀찮은 친구 녀석이 하나 있습니다. 말할땐 항상 욕을 입에 달고 살며, 돈많다고 자랑하면서도 백수인 저한테 얻어 먹으려만 들고, 게을러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어하면서도 저희 집엔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절 귀찮게 하는 녀석... 크리스마스 이브때엔 외롭다며 자기와 놀아달라고 칭얼거리는 것을 억지로 떼어놓고 청평으로 놀러갔던 저는, 지난 토요일 독감에 걸렸다며 끙끙거리는 그 녀석의 전화를 받고 그만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친구인데...'하는 마음에 그녀와의 데이트도 중단하고, 하루종일 굶었다는 그 녀석에게 삼겹살을 사주고, 혼자 자취하는 녀석의 집에서 하룻밤을 잤습니다. TV를 틀어놓아야만 잠을 잘 수 있는 녀석의 습관때문에 밤새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고, 툭하면 징그럽게 제 폼속으로 기어 들어오는 녀석을 밀쳐내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으며, 혼자 자취하기에 먹을 것이라고는 인스턴트 식품밖에 없는 녀석의 집에서 컵라면으로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일요일 아침, 그녀와의 즐거운 데이트를 위해 준비를 하는 제게 녀석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절 쳐다보더군요. 하지만 녀석때문에 그녀와의 데이트를 망치는 것은 토요일 하루로 족했기에 매몰차게 그 녀석을 외면하고 칙칙하기만 한 녀석의 집을 나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로 향했습니다. 저 멀리 서있는 그녀. 그녀를 본 순간 그 녀석과 지낸 하룻동안의 그 칙칙함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듯했습니다. 컵라면으로 아침 식사를 떼웠다는 제게 맛있는 밥을 사주고, 동생한테 뺏었다는 도서 상품권으로 제가 보고 싶었던 영화인 [H]도 보여주는 그녀. 그 순간 이 화창한 주말을 칙칙한 반지하 방에서 뒹굴거리고 있을 녀석이 쬐금 생각났지만 그래도 전 즐거웠습니다. 녀석도 어서 그 어둡고 칙칙한 생활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이처럼 즐거운 행복을 만끽해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평생 저한테 놀아달라며 칭얼거릴까봐... ^^;
[H]는 [텔미썸딩]을 이은 끔찍한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한 한국식 스릴러 영화입니다. [텔미썸딩]이 한석규와 심은하라는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난해한 스토리 구조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했다면, [H]는 그와 반대로 염정아, 지진희, 조승우라는 지명도가 낮은 배우들을 캐스팅하였지만 헐리우드의 스릴러에 익숙해진 관객을 위한 최대한의 배려를 통해 흥행 성공에 도전한 영화입니다. 우선 [H]는 스토리 구조가 헐리우드의 스릴러 걸작으로 판명받은 [양들의 침묵]과 비슷하다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아무리 헐리우드 스릴러에 익숙한 관객을 위한 최대한의 배려라고는 하지만 [양들의 침묵]의 아류작 정도로 관객에게 인식된다면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킬 스타 배우가 없는 이 영화로써는 3류 스릴러 영화로 몰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실패작입니다. 6건의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자수한 22살의 살인마 신현(조승우)은 영락없이 [양들의 침묵]의 엽기적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와 닮았습니다. 안소니 홉킨스의 자상한 미소와 조승우의 천진만한한 미소를 엽기적인 살인이라는 코드와 연결시켜 관객에게 공포감을 전달하는 것도 그렇고, 왠지 알수없는 말을 지껄이면서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감옥에 갇혀 사형일자만 기다리고 있는 신현에게서 연쇄살인 사건의 단서를 찾아야 하는 강형사(지진희)와 미현(염정아) 역시 [양들의 침묵]의 클라리스 스탈링(조디 포스터)을 닮았습니다. 창녀인 어머니의 곁에서 자라야 했던 강형사의 어린 시절에 대한 상처와 신현으로 인하여 약혼자를 잃은 미현의 아픔은 신현과의 심리 싸움에서 번번히 조롱당함으로써 [양들의 침묵]의 렉터와 스탈링의 관계에 대한 기억을 떨칠 수 없게 만듭니다. 단지 [H]에서 [양들의 침묵]과 차별화된 새로운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강형사와 미현 사이에서 완급조절을 하며 간간히 관객들을 웃기는 박형사(성지루)라는 캐릭터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영화의 캐릭터에서부터 기본적인 줄거리까지... [양들의 침묵]을 그대로 차용한 이 영화는, 그렇게함으로써 스릴러 영화로써의 재미를 스스로 잃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스릴러 영화의 가장 큰 덕목인 신선한 충격을 [양들의 침묵]에 대한 따라하기로 스스로 잃어버린 이 영화는 시종일관 엽기적인 장면들을 영화속에 배치함으로써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려 노력합니다. 이러한 엽기적인 장면 역시 [양들의 침묵]과 [텔미썸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래도 영화 초반부를 지탱하기엔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는 듯 보입니다. 쓰레기 매립장에서 발견된 10대 소녀와 그녀의 뱃속에서 강제로 척출된 태아의 시체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곧이어 버스안에서 발견된 만삭의 임산부 시체를 통해 그 엽기적인 장면의 힘을 빌어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에 성공을 거둡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아무리 엽기적인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한 스릴러 영화라고는 하지만 엽기적인 장면만으로 영화를 이끌어 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일단 영화의 초반을 엽기적인 장면을 통해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면 이어서 논리적인 추리와 충격적인 반전으로 관객을 계속 영화속으로 몰아 넣어야 합니다. 하지만 [H]는 그런 뒷힘이 부족해 보입니다. 신현과 강형사, 미현의 심리 게임은 [양들의 침묵]의 심리 게임과 같은 관객을 압도하는 그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단지 신현을 연기한 조승우의 그 매력적인 미소만이 기억에 남을 뿐입니다. ([와니와 준하], [후이유]를 통해 멜로 영화에서의 조승우라는 배우에 매력을 느낀 저로써는 스릴러 영화에서의 조승우는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꽤 흥미진진한 발견이었습니다.) 영화의 중반부를 지탱해야할 미현의 논리적인 수사도 관객의 입장에서 보기엔 그리 논리적이지 못합니다. 신현의 사주로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이 영화는 관객을 뛰어넣는 그 어떤 면도 보여주지 못합니다. 28일 간격으로 벌어진다는 연쇄살인 사건속에서 형사들은 마치 다음 사건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일뿐이며,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들은 신현의 주변인물들로 너무나도 쉽게 관객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마도 스릴러 영화에 대한 경험의 부족으로 인한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의 미숙으로 비춰지는데... [텔미썸딩]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한국적 스릴러 영화의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고 생각하며 [텔미썸딩]의 뒤를 이을 스릴러 영화를 기대했던 저에겐 이러한 [H]의 [텔미썸딩]을 뛰어넘지 못한 미숙함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비록 [양들의 침묵]을 따라한 흔적이 역력히 보이긴 하지만 엽기적인 장면들을 연속으로 보여주며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 영화는 미지근한 추리 장면들을 통해 중반 이후의 영화적 힘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마지막 히든 카드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스릴러 영화의 최고 재미인 마지막 반전입니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이 영화의 제목인 'H'가 사건 해결의 실마리라는 정보를 끊임없이 매스컴에 공개함으로써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이 영화는 결국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서야 'H'의 의미를 관객에게 알려줍니다. 저도 이 영화를 보는 내내 'H'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나름대로 추리를 하며 머리를 굴려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마지막 반전이 무엇인지 영화의 중반부에 이미 눈치를 챘음에도 불구하고 'H'의 비밀을 풀지 못해 영화의 마지막까지 영화속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제 예상대로 너무나도 뻔한 마지막 반전이 드러나고 'H'의 비밀이 밝혀질때 전 충격에 빠져야 했습니다. 너무 허무맹랑해서... 도대체 그런 식으로 'H'가 사건 해결의 실마리라면, 알파벳을 비롯한 한글의 자음 모음, 이 세상 모든 문자들도 사건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겁니다. 'H'라는 간결한 제목을 통해 이것이 사건의 실마리라는 말도 안되는 정보를 흘려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 이 영화의 마케팅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만, 'H'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결국 [H]는 관객과의 지능 게임은 물론이고, 스릴러 영화의 재미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개인적으로 상당히 실망스러운 영화였습니다. 스릴러 영화에 익숙하지 못한 나의 그녀 역시 이 영화의 마지막 반전을 눈채챘을 정도이니, 이 영화가 관객과의 지능 게임에서 얼마나 처참한 패배를 거두었는지 알만합니다. 스릴러 영화만큼이나 어려운 장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영화 상업의 독보적인 존재인 헐리우드에서조차 제 뒤통수를 내리치는 매력적인 스릴러 영화를 만나보기 힘든 것을 보면...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 영화가 이렇게 헐리우드에서조차 어렵다는 스릴러 영화의 걸작을 내놓은 날이 올 것이라 전 믿습니다. 그땐 [H]의 실패도 하나의 초석이 될지도 모릅니다. 어서 빨리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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