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정초신
주연 : 이범수, 김선아
개봉 : 2002년 11월 6일
"내일 빼빼로 안줄꺼야?"
11월 10일 저녁에 걸려온 그녀의 전화... 이게 도대체 뭔말이여. 왠 빼빼로???
그렇습니다. 전 11월 11일이 빼빼로를 주고 받는 빼빼로 데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쩔수없이 그녀에게 내일 빼빼로를 주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걱정이 되더군요. 모두들 아시겠지만 몇백원에 불과한 초코렛이 발렌타이 데이만 되면 몇천원 심지어는 몇만원으로 변합니다. 화이트 데이의 사탕 역시 그러합니다. 분명 빼빼로도 이미 몇만원으로 둔갑하여 있을텐데... 그렇다고 슈퍼마켓에 가서 2백원짜리 빼빼로 하나 달랑 사가지고 갈수도 없고... 할수없이 저금통의 돈을 모조리 털어서 그 다음날 친구네 집이 운영하는 팬시점으로 갔습니다.
"형, 빼빼로 있어?"
"어떻하냐? 다 팔리고 이거만 남았다."
빼빼로로 가득했다는 진열대는 텅비어 있었고 달랑 몇개만 남아있었습니다.
"비싼건 다 팔리고 싼것만 남았는데... 어쩌지?"
순간 마음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어쩔수없지 뭐. 싼거라도 사가야지."
최소한 만원정도는 깨질줄 알았는데... 내 예상가격보다 휠씬 밑도는 빼빼로를 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빼빼로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천사같은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도저히 그 싸구려 빼빼로만 들고 그녀를 만나러 갈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닮은 이쁜 강아지 인형도 하나 사들고 그녀를 만나러 갔습니다.
약속시간이 되자 저 멀리서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제게 달려옵니다. 일단 그녀와 롯데리아에 들어가 빼빼로를 줬습니다. 예상대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 그래서 비장의 무기인 인형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집니다.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녀는 기분이 좋았는지 갑자기 영화 보러 가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근처의 작은 극장에서 [몽정기]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겨우 인형하나에 감동하는 그녀... 암튼 저는 행복합니다. 그나저나 다가오는 그녀 생일과 크리스마스를 위해 돈을 모아야 겠습니다. 그때는 정말 근사한 선물을 사줘야할텐데... 휴~ 가난한 쭈니... -.-;
어떤 분이 그러시더군요. '[몽정기]는 절대 여자친구와 보러가지 말아라. 영화가 끝나면 여자친구가 당신을 짐승 취급할것이다.' 하지만 그 충고가 오히려 그녀의 호기심을 발동시켰습니다. 며칠전부터 [몽정기]보러가자고 조르는 그녀... 영화 보기전엔 약간 걱정이 되더군요. 정말로 이 영화보고나서 그녀가 절 짐승 취급할까봐... 그런데 제 경우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녀는 학창시절 선생님을 짝사랑하던 그때를 떠올리며 맘껏 웃었고, 저도 사춘기 시절의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서 맘껏 웃었습니다. 한마디로 [몽정기]는 그녀와 제겐 한바탕 즐거운 추억 여행으로 안내하는 길잡이같은 영화였습니다.
[몽정기]는 모두들 아시겠지만 남자라면 누구나 겪었을법한 몽정을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여자라면 '몽정이 뭐야?'라며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남자에게 있어서 몽정은 여자의 첫생리만큼이나 은밀하고 당혹스러운 경험입니다. 그런데 정초신 감독은 바로 이러한 은밀하고 낯뜨거운 사춘기 시절의 경험을 과감하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소재가 이렇게 과감하고 직설적이지만 영화는 오히려 따뜻하고 푸근합니다. 그것은 정초신 감독이 몽정을 통해 낯뜨거운 섹스 코미디 영화로 이 영화를 완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옛 시절을 회상하며 그리워하게끔하는 가슴 따뜻한 코미디로 이 영화를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의 사춘기 시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이 영화의 주인공들인 동형 일당의 그 진솔한 모습과 진짜 나의 중학교 시절 노총각 선생님을 연상시키는 이범수의 그 놀라운 연기, 그리고 사춘기 시절 누구나 한번쯤 짝사랑했을법한 교생 선생님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낸 김선아의 연기 변신... 이 모든 것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몽정기]는 진솔하면서도 가슴 따뜻한 사춘기 시절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놀라운 코미디 영화가 되었습니다.
우선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이 제겐 아주 절묘했습니다. 88 서울 올림픽의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던 1988년이 이 영화의 시대 배경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1988년은 바로 제가 한창 사춘기에 접어들어 몽정을 경험했던 그때와 일치합니다. 88 서울 올림픽을 보며 체조 선수의 그 아슬아슬한 묘기에 밤새 잠을 못자고 마음 설레였던 그때. 바로 이 영화는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이 나의 몽정기와 맞아떨어지자 이 영화는 의외의 리얼리티를 제게 선사합니다. 영화속 동현은 완벽하게 나 자신이 됩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동현과의 감정이입에 성공한 저는 영화속의 에피소드들에 빠져 지금은 잊고 있었던 10년도 더 지나버린 중학교 시절로 들어가 지금은 연락이 끊긴 그 시절 친구들과 한바탕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전날 밤의 몽정의 경험을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특정 단어에 호들갑을 떨고, 도색 잡지를 보며 신기해 하고, 롤러 스케이트장에서 여자 아이들을 꼬시겠다며 타지도 못하던 롤러 스케이트에 몸을 맡겼던 그때.
이 영화속 동현 일당의 에피소드는 단지 영화의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억지 웃음이 아니라 저의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 였습니다. 특히 특정 단어만 들으면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석구라는 캐릭터를 보면 '맞아! 정말로 그 시절에 그런 친구가 한명쯤은 있었어'라며 무릎을 칠만합니다.
사족이지만 그 시절 친구들과 자주 했던 농담 한마디...
박불관에 붙어 있는 푯말은 '보지 왜 만져'이고, 통금 시간의 표어는 '자지 왜 나와'... (설마 이 농담이 너무 야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없으시겠죠? ^^;)
그 시절 그때 저와 친구들은 이런 농담을 주고 받으며 사춘기 시절을 보냈었죠. 마치 영화속 동현 일당이 그랬던 것처럼...
이렇듯 영화의 중요한 코드인 '몽정'에 대해 가감없이 진솔하게 에피소드를 전개해 나갔던 이 영화는 사춘기 시절의 순수한 사랑을 그려나감으로써 영화를 몽정에 대한 그저 야한 섹스 코미디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맞춰줍니다.
이 영화엔 두가지 사랑이 나옵니다. 과거의 담임 선생님이었던 병철(김범수)을 짝사랑하여 그 사랑을 이루고자 병철이 근무하고 있는 학교로 교생 생활을 자처한 유리(김선아)의 사랑과 교생 선생님인 유리를 짝사랑하는 동현의 사랑. 이 두 사랑은 서로 맞물리면서 사춘기 시절의 그 순수함을 대변합니다.
이 부분에서도 이 영화는 '맞아! 그땐 그랬어.'라는 탄성을 자아낼만한 리얼리티를 획득합니다.
이 영화를 보는내내 그녀는 사춘기 시절 실제로 짝사랑했던 선생님과 이범수가 연기한 병철의 모습이 너무나도 흡사하다며 놀라워했고, 저 역시 교생 선생님을 둘러싼 동현의 그 순진한 사랑에 공감하며 정신을 영화속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짝사랑하던 남선생님도 영화속 병철처럼 수염을 까칠까칠하게 길렀고, 덥수룩한 헤어스타일에 촌스러운 옷만 입고 다녔다는 군요.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모두 너무나 터프하게만 보였다며 옛 추억에 빠져 들었습니다.
저 역시도 중학교 시절 어여쁜 교생 선생님을 보며 남몰래 짝사랑하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친구들은 거울을 가져와 교생 선생님의 치마속을 본다고 난리였지만 전 그럴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더럽힐 수 없었기에 이 영화속 동현처럼 친구들의 계획을 방해 했었죠. 하지만 결국 친구들은 교생 선생님의 치마속에 거울을 들이 댔고 교생 선생님은 울면서 교실 밖으로 뛰어 나가셨습니다. 곧이어 들어오신 무서운 담임 선생님... 그날 우리 반 전체는 혹독한 벌을 받았지만 저는 억울하다는 생각보다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교생 선생님은 괜찮으신지 그것이 더 궁금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의 그 사랑이 얼마나 귀엽고 이쁘게만 느껴지는지... [몽정기]는 바로 그러한 순수한 사랑을 잘 잡아 냄으로써 자칫 [아메리칸 파이]같은 10대 섹스 코미디로 흐를지도 모를 이 영화를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영화로 바로 잡아줍니다.
이렇듯 남자라면 모두들 겪었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몽정이라는 은밀한 경험과 어쩌면 사춘기 시절에만 할 수 있는 그런 순수한 사랑을 진솔하게 그림으로써 옛 추억을 회상하게끔 즐거운 추억 여행을 마련했던 이 영화는 유리와 동현의 그 순수한 사랑을 마무리 짓고 별안간 관객들을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채 식지않은 2002년 어느 여학교로 안내합니다.
1988년과 비교해서 너무나 낯설어 보이는 2002년의 우리 학생들의 모습... 정초신 감독은 이 마지막 장면을 통해 예기치못한 웃음을 전해주지만 그 웃음의 질은 분명 1988년의 그 순수했던 웃음과는 차원이 틀립니다. 이 영화의 이러한 마지막 장면을 보고 '정말로 요즘 여학교가 저래?'라며 그녀에게 물어보았을 만큼 2002년의 우리 학생들의 모습은 분명 1988년의 우리때의 모습과 너무나도 틀립니다.
정초신 감독은 분명 그 옛날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1988년을 훈훈한 분위기로 그렸던데 반에 2002년의 모습에선 교생 선생님에게 자신의 치마속을 살짝 보여주고 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음으로써 가슴을 살짝 내비치는 당돌한 우리 학생들의 모습을 내비치며 우리때와는 달라진 학교 풍속도를 은근히 안타까워 합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너무나 달라진 우리의 학생들의 모습... 정초신 감독은 말합니다. 정말 그 시절 그때가 그립다고...
P.S. 이 영화를 보고 그녀에게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것은 정말로 남자들은 컵라면으로 자위를 하느냐는 겁니다. 이 자리를 빌어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까지 컵라면으로 자위해본 적은 분명 없었으며 내 주위에서도 컵라면으로 자위했다는 녀석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이 영화 본 후 컵라면보며 이상한 생각하시는 여성분들... 다른건 몰라도 컵라면 자위씬은 이 영화의 오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