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케빈 도노반
주연 : 성룡, 제니퍼 러브 휴이트, 제이슨 이삭
개봉 : 2002년 11월 1일
어떤 영화 사이트에서 [턱시도]에 대한 글을 읽다보니 이런 글이 나오더군요.
'성룡 영화는 관객을 세 가지 종족으로 분류한다. 안티족, 비지족(비판적 지지족), 지지족. 세 종족은 영화제목이 무엇이든 입장변화가 전혀 없다.'
읽어보니 그럴듯 하더군요.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종족일까? 예전에 저는 단연 지지족이었습니다. 단지 성룡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들과 삼류 극장의 한켠에 쭈그리고 앉아 환호성을 질렀었죠. 하지만 언제부턴가 저는 점점 비판적 지지족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영화가 점점 식상하게만 느껴져서 왠만하면 그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보단 비디오로 출시되면 보곤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2년전 [상하이 눈]이라는 영화를 보고 전 거의 안티족이 되었었습니다. 그당시에 저는 [상하이 눈]을 보고나서 아주 당당하게 선언했었죠. '성룡은 이제 완전히 끝났다.'
하지만 나의 그녀는 성룡의 지지족임이 분명합니다. 제가 [턱시도]를 극장에서 볼 필요가 있겠냐며 그냥 캠버전으로 다운받은 파일을 통해 컴퓨터로 보자고 설득을 했지만 그녀는 성룡의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더군요. 주말엔 새로 개봉되는 영화들에 밀려 [턱시도]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며 회사일이 바쁜 와중에도 주중에 시간을 내어 [턱시도]를 보러가자고 저를 졸라대기 시작했습니다.
뭐... 그녀가 원한다면야 저역시 기꺼이 안티족에서 지지족으로 단번에 바꿀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힘은 대단한 것이니까요... ^^;
[턱시도]는 헐리우드에서 드디어 성룡의 진면목이 맘껏 발휘한 영화입니다. 솔직히 그의 이전 영화들인 [러시아워]나 [상하이눈]에서는 성룡의 영화라기 보다는 헐리우드 영화라는 생각이 짙게 들었었습니다.
성룡의 진면목... 그것은 바로 웃음입니다. 성룡의 액션에 담긴 웃음. 그것은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성룡, 그 만의 것입니다. 제가 성룡을 좋아했던 이유도 그의 액션에 담긴 웃음에 반해서이고, 성룡의 영화에 조금씩 실망감을 느꼈던 것도 그의 액션에 담긴 웃음이 예전만하지 못했을때 부터입니다. 결국 성룡의 힘은 현란한 액션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그만의 기술인 셈입니다. 그런데 헐리우드에서의 성룡의 모습은 그러한 웃음이 많이 둔화된 느낌이었습니다.
헐리우드에서 성룡의 최고 히트작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워]시리즈에서는 웃음의 몫은 성룡이 아닌 크리스 터커의 몫이었습니다. 과묵한 백인과 떠벌이 흑인이라는 헐리우드 특유의 버디액션 무비를 과묵한 백인 대신에 쿵후에 능한 동양인인 성룡으로 끼워맞춘 격이었죠. 그렇기에 [러시아워]는 성룡의 영화라기 보다는 헐리우드의 약간은 특이한 버디액션 무비에 가까웠습니다.
제가 성룡의 영화중에서 가장 지루하게 본 [상하이 눈]은 동양의 쿵후 영화와 서부 영화를 교묘하게 짬뽕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도 역시 웃음의 몫은 성룡보다는 어눌한 열차 강도단 두목역을 맡은 오웬 월슨이었습니다.
이렇듯 헐리우드는 성룡의 상품 가치를 웃음보다는 액션에서 찾았습니다. 성룡의 액션이 신기한 서양인들에게는 그러한 헐리우드의 성룡에 대한 시각이 어느정도 먹혔겠지만 성룡의 진정한 상품가치를 알고 있는 우리 관객에게는 실망감만 안겨 주었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턱시도]는 성룡의 상품가치가 액션에 담긴 웃음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간파한것 같습니다. [러시아워]나 [상하이 눈]처럼 성룡에게는 액션만을 떠넘기고 헐리우드 배우로 하여금 웃음을 책임지게 하는 멍청한 실수를 이 영화는 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헐리우드표 성룡 영화로는 최고의 점수를 받을만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떠벌이 크리스 터커나 어눌한 오웬 월슨를 짝으로 성룡에게 붙이는 대신에 이상한 기능으로 가득찬 괴상한 턱시도를 성룡에게 입히는 방법으로 그에게 새로운 족쇄를 채웁니다. 그것은 헐리우드가 아직은 성룡의 진정한 상품 가치를 완전히 알아채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성룡의 매력은 일단 액션속에 묻어나오는 웃음이 가장 큰 몫을 하지만 그의 액션에 담긴 현실성도 중요한 몫을 차지합니다.
성룡은 특수효과라는 것을 쓰지 않으며 모든 액션을 스스로 해냅니다. 다른 홍콩의 액션 영웅처럼 총알이 절대 떨어지지않는 총을 한없이 쏴대는 것도 아니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장풍을 쏘아대지도 않습니다. 비장한 표정으로 수많은 적들과 싸우면서 자신은 단 한대도 맞지 않는 개폼 액션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액션의 전부는 악당과 치고 받고 싸우며 얻어터지기도 하고 도망다니기도 하는 그러한 것들 입니다. 어찌보면 상당히 코믹하기도 하고, 현란해 보이기도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액션인겁니다. 이렇듯 성룡의 액션 영화에서만 맛볼수 있는 독특한 재미, 그것은 그의 액션은 카메라를 통한 관객 속이기가 아닌 상당히 현실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턱시도라는 괴상망측한 것을 성룡에게 입힘으로써 성룡 스스로 그의 액션의 현실성을 잃게 만듭니다. 턱시도를 입지 않더라도 그의 액션만으로도 충분히 이 영화속의 액션을 이끌어 낼 수 있었을텐데... 이 영화는 굳이 성룡에게 턱시도를 입힙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영화는 미국 관객들이 좋아하는 SF 영화의 틀을 저예산으로 갖추는 효과를 누렸지만 성룡의 현실적인 액션을 보고 싶어하는 국내의 관객들에게는 성룡 스스로가 '나의 액션은 특수효과의 힘을 빌린것이다'라는 폭탄 선언을 하게 만든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룡과 특수효과... 그것은 분명 성룡과 비장미만큼이나 안어울리는 것입니다. 결국 이 영화는 성룡의 액션에 웃음을 되찾아주는 대신에 현실성을 빼앗아 버린 겁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턱시도는 크리스 터커와 오웬 월슨만큼은 아닐지라도 성룡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결정적인 역활을 하는 악영향만 끼칩니다.
이렇듯 [턱시도]는 성룡의 액션에 웃음을 되찾아주는 탁월한 선택을 함과 동시에 성룡의 액션에 현실성을 잃게 하는 최악의 선택을 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러시아워]나 [상하이 눈]과 비교해서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커다란 장점중의 하나... 그것은 재키걸의 부활입니다.
본드걸과 맞먹는 파워를 과시한다는 재키걸은 성룡의 영화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재미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성룡이 헐리우드로 건너간 후 점잖은 척 하며 우중충한 남자 파트너를 거느리고 다니느라 그의 영화에 빼놓을 수 없는 재미인 재키걸은 은근슬쩍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턱시도]가 바로 이러한 재키걸을 되살려 놓은 겁니다.
이 영화의 재키걸은 이미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일을 알고 있다]와 [하트 브레이커스]라는 영화를 통해 헐리우드의 신세대 스타로 뜨고 있는 제니퍼 러브 휴이트입니다. 개인적으로 제니퍼 러브 휴이트를 좋아하는 제 입장에서 그녀가 맡은 델 블레인이라는 초보 첩보원역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지만 성룡의 팬입장에서 본다면 제니퍼 러브 휴이트에게 재키걸을 맡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 제니퍼 러브 휴이트는 최대한 섹시미를 강조하며 헐리우드로 건너와 더욱 막강해진(?) 재키걸의 위력을 한껏 과시합니다.
솔직히 홍콩에서의 재키걸의 매력은 단지 악당에게 붙잡히고 성룡에게 도움을 청하는 역활에 만족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제니퍼 러브 휴이트가 맡은 재키걸은 여기에 한가지 기능을 더 장착합니다. 그것이 바로 섹시미입니다. 가슴이 아슬아슬하게 노출된 파티복을 시종일관 입고 다니며 관객에게 아슬아슬한 눈요기거리를 제시하는 제니퍼 러브 휴이트는 섹시함과 귀여움까지 갖춤으로써 역대 재키걸중에서 최고라는 찬사를 들을만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설정은 액션 영화를 오랫동안 만들며 관객이 좋아하는 요소를 구석구석 꿰고있는 헐리우드 제작진의 수완일지도 모릅니다. 암튼 확실한 것은 재키걸이라는 성룡 영화의 재미만큼은 홍콩에서보다 휠씬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
물론 아직 성룡의 전성기 시절의 영화적 재미를 이 영화가 모두 되찾은 것은 아닙니다. 아직 헐리우드에서의 성룡의 모습에는 불만이 많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영화들이 점차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는 겁니다. 웃음은 다른 배우에게 맡기고 성룡은 단지 무뚝뚝한 쿵후맨으로써의 활약을 했던 다른 영화들에 비해 [턱시도]는 예전의 성룡 영화와 그나마 닮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을 해야하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헐리우드에서 처음부터 자신의 색깔을 되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테니까요. 점차 나아지는 헐리우드에서의 성룡의 모습을 기대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