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마크 포스터
주연 : 빌리 밥 손튼, 할리 베리
개봉 : 2002년 10월 25일
토요일... 오랫만에 아무런 약속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나하고 데이트하느라 밀린 회사 업무를 오늘 전부 끝내야 한다며 툴툴거리고, 영화 보기로 약속했던 친구와는 볼 영화가 없어서 (보고 싶은 영화는 이미 거의 다 본 바람에...) 약속이 깨졌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거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거리기로 마음을 굳히고 시간이 없어서 못 본 영화들이나 실컷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제일 먼저 나의 관심을 끈 영화는 할리 베리에게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안겨주어서 화제가 되었던 [몬스터 볼]이라는 영화였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제 컴퓨터의 하드에 꼭꼭 숨어있던 영화였는데 드디어 오늘 보기로 결심을 한거죠.
[몬스터 볼]을 보고나서 몇편의 영화를 더 볼려고 결심했었는데... 그런데... [몬스터 볼]을 보고나서 더 이상 아무런 영화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할리 베리와 빌리 밥 손튼의 실제같은 정사씬외에는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는데... 그런데 그러한 무관심이 오히려 제게 이 영화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몬스터 볼]... 이 무미건조한 영화는 나에게 이상한 감흥을 남겨주었으며, 절망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던 이 영화 주인공들의 잔영이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않고 절 괴롭혔습니다.
[아이 엠 샘], [중독]에 이어 [몬스터 볼]까지... 요즘 너무 슬픈 영화만 봐서 그런가 봅니다. 괜히 혼자 슬퍼지고, 쓸쓸해지고, 외로워지고... 다음엔 기필코 코미디 영화를 봐야겠습니다. 이 센티멘탈한 기분에서 벗어나려면... ^^;
[몬스터 볼]은 참 이상한 영화입니다.
누군가 제게 '[몬스터 볼]이 어땠어?'라고 묻는다면 전 서슴치않고 '응, 재미있었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면이 재미있었는데?'라고 묻는다면 전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전 이 영화에서 관객의 마음을 끌만한 그 어떤 재미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분명 이 영화는 재미없습니다. 하지만 제게 이 영화는 매력적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절 숨막히게 했던 그 무미건조함이 어느새 절 매료시켜 버렸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슬픈 멜로 영화입니다. 남편의 사형집행인과 사랑에 빠진 한 흑인 여성의 기구한 사랑을 담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어디를봐도 슬픈 멜로 영화다운 구석이 없습니다. 그것이 이 영화가 재미없는 첫번째 이유이며, 제가 이 영화에 매료된 첫번째 이유이기도 합니다.
슬픈 멜로 영화의 주인공... 두말할 필요없이 이쁘고, 매력적이며, 너무나 가슴아픈 사랑을 해야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속 슬픈 사랑의 주인공인 레티샤(할리 베리)와 행크(빌리 밥 손튼)는 이쁘지도, 매력적이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관객의 가슴을 아프게 할만큼 감성을 두드리지도 않습니다.
할리 베리... 분명 제가 알고 있는 흑인 배우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배우입니다. 그녀가 주연했던 그 수많은 영화들에서 그녀의 매력은 여지없이 발휘됩니다. 하지만 [몬스터 볼]에서는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결단코 이쁘지 않습니다. 그 납루한 옷차림에 화장끼없는 얼굴, 그녀가 연기한 레티샤는 불쌍해 보이긴해도 결코 이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레티샤라는 캐릭터는 관객이 공감할 정도의 그 어떤 면도 보여주지 못합니다. 사형을 앞둔 남편에게는 10년동안 옥바라지를 했다며 툴툴거리고, 남편이 사형당한 후에도 남편의 죽음에 슬퍼하기는 커녕 앞으로 살아갈 날을 걱정만 합니다. 게다가 하나밖에 없는 그 뚱뚱한 아들에겐 '돼지 새끼'라고 욕하며 때리기도 합니다. 아름답지도 않고 그렇다고 착하다고 할수도 없는 그 평범한 성격... 할리 베리가 연기한 레티샤는 이렇게 지금까지의 멜로 영화의 주인공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정은 빌리 밥 손튼이 연기한 행크에서 더욱 심합니다. 그래도 할리 베리는 기본적인 아름다움이라도 갖추고 있지만 빌리 밥 손튼은 도저히 멜로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개성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연기한 행크라는 캐릭터는 레티샤보다 한술 더 뜹니다. 백인 우월주의자인 그는 흑인 아이들이 자신의 사유지를 침범했다며 총으로 위협을 하고 자신과 같은 사형집행인인 아들이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그를 심하게 몰아부치고 결국 자살에 이르게 합니다. 도저히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는 캐릭터이죠.
일단 영화는 이렇게 멜로 영화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를 구축함으로써 멜로 영화로써의 재미를 스스로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동화처럼 그려진 비현실적인 멜로 영화에 지친 제겐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꽤 신선하게 비춰졌습니다. 분명 멜로 영화로써는 재미가 없는데... 전 레티샤와 행크라는 캐릭터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멜로 영화로의 재미를 스스로 저버린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너무 무미건조해서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레티샤와 행크라는 캐릭터도 무미건조하고, 할리 베리와 빌리 밥 손튼의 실제 정사 논란이 있었다는 정사씬조차도 무미건조합니다. 그리고 레티샤와 행크의 사랑 역시 무미건조합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미건조한 이 영화의 분위기... 그것이 이 영화가 재미없는 두번째 이유이며, 제가 이 영화에 매료된 두번째 이유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무미건조함으로 시작합니다. 무미건조하게 하루의 일상을 시작하는 행크를 시작으로 창녀와 무미건조한 섹스를 나누는 행크의 아들인 쏘니의 모습이 비춰집니다. 이렇게 먼저 행크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무미건조함을 먼저 설명한 영화는 곧이어 레티샤 주위의 무미건조함을 설명합니다.
이렇듯 이 영화를 전체적으로 감싸고 있는 무미건조함은 며칠전 보았던 [아이 엠 샘]에서의 따뜻함과는 대조를 이루며 관객들을 심하게 불편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제게 이러한 무미건조함은 레티샤와 행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영화속 캐릭터에 빠져들게끔 하였습니다.
먼저 행크의 일상에서의 무미건조함은 영화 중반, 그가 레티샤를 만남으로써 그의 성격이 변하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의 아버지인 벅은 전형적인 백인우월주의자이며, 남성우월주의자입니다. 행크는 벅의 영향을 받아 자신이 우월하다는 생각속에서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며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의 두꺼운 벽을 쌓아가며 외롭게 살아갑니다. 그러한 그는 자신과는 다르게 여리고 착한 아들 쏘니를 미워합니다. 쏘니가 행크에게 '날 싫어하냐?'고 물었을때 서슴치않고 '그래, 널 싫어해'라고 대답하는 행크... '난 항상 당신을 사랑했는데...'라며 그 자리에서 자살을 하는 쏘니... 이 장면은 행크 일상의 무미건조함과 그 이후의 변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결국 그가 쏘니을 싫어했던 것은 쏘니에게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따뜻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결국 쏘니의 자살은 행크에게 자기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게되고 그는 자기 일상의 무미건조함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그때 그는 레티샤를 만난 겁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성적 흥분을 맛보게 해준...
레티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생활고에 시달려야했던 그녀는 남편이 사형을 당한 후에도 남편의 죽음을 슬퍼할 여유조차 없습니다. 아들은 부성애의 부재를 초코렛과 사탕으로 메꾸며 못말리는 뚱보가 되어있었고, 살던 집에선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날 위기에 봉착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자신이 부양해야할 아들이 있으므로... 하지만 아들은 교통사고로 죽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 이 무미건조한 생활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도 지쳐있습니다. 그때 그녀는 행크를 만난겁니다. 자신의 이 무미건조하고 가난에 찌든 생활에서 구해줄수 있는...
이렇듯 이 영화의 무미건조함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숨이 막히지만... 또 그만큼 그 무미건조함속에서 숨이 막히는 일상을 살아왔던 레티샤와 행크의 마음이 제게 와닿았습니다.
멜로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와 시종일관 무미건조함을 유지하는 영화의 분위기... 이제 영화는 본격적으로 레티샤와 행크의 사랑을 그려나갑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시작된다고 해서 이 영화의 무미건조함은 바뀌지 않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행크가 레티샤에게 별을 보며 '모든 것이 잘 될꺼야'라고 말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들의 사랑이 결단코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에서 끝을 냅니다. 행크와 레티샤의 사랑을 기껏 시작해놓고 그 자리에서 막을 내립니다. 이렇듯 이 영화의 마무리는 어정쩡합니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이 영화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서둘러 끝을 맺습니다. 그것이 이 영화가 재미없는 세번째 이유이며, 제가 이 영화에 매료된 세번째 이유이기도 합니다.
행크는 레티샤와의 사랑을 위하여 단 한명뿐인 가족인 아버지를 양로원으로 보냅니다. 행크를 보며 '드디어 날 제거했구나'라고 섭섭해하는 벅... 하지만 행크에게 벅은 자신의 무미건조한 일상에 벗어나기위한... 자신에게 처음으로 성적 흥분을 안겨준 레티샤와의 사랑을 이룩하기 위한 장애물일 뿐입니다. 그에게 아버지는 더이상 필요가 없었던 거죠.
레티샤 역시 집을 잃고 갈 곳이 없어서 행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만 우연히 행크가 자신의 남편인 로렌스의 사형집행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녀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남편의 사형집행인과 사랑을 할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사랑은 여전히 불안합니다. 자신의 가족을 버리고 이룩한 행크의 사랑도, 행크의 비밀을 알아버린 레티샤의 사랑도 언제 깨질지 모를정도로 불안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영화는 끝나버립니다. 이제 겨우 관객의 감정선을 건드릴 멜로적인 요소를 찾아냈는데... 영화는 여기에서 끝나버립니다. 마치 이들의 사랑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관객 스스로의 몫이라는 듯 영화는 끝납니다.
분명 마크 포스터 감독은 이 영화가 멜로 영화가 되기를 바라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기에 남편의 사형집행인과 사랑에 빠진 여성이라는 지극히 멜로적인 소재를 가지고 무미건조한 캐릭터들의 향연으로 영화를 이끌더니, 이제 막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할때쯤 되고나니 서둘러 영화를 끝내는 것을 보면... 하지만 전 이러한 마무리가 맘에 듭니다. 아무리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화 전반적인 분위기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느닷없는 장면이 될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이루었지만 여전히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함을 안고있는채 막을 내리는 것은 어쩌면 무미건조함으로 관객에게 불편함을 안겨준 이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었을 겁니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도 한참동안 이 영화의 무미건조함에 정신을 차릴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몬스터 볼]은 재미도 없고, 불편하기만 했지만 그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무미건조함에 갇혀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행크와 레티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