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박영훈
주연 : 이병헌, 이미연, 이얼, 박선영
개봉 : 2002년 10월 25일
24일 목요일... 사실 그날 보고 싶었던 영화는 [로드무비]였습니다. 남자와 남자간의 사랑... 한국 영화 최초로 그려지는 이 파격적인 동성애적인 사랑을 저는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와 어렵사리 약속 시간을 정하고, [로드무비]가 상영중인 것으로 확인된 대한극장으로 예매하기위해 예매사이트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분명 전날까지 [로드무비]를 상영했던 대한극장은 하룻밤 사이에 상영작을 [중독]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분명 [중독]은 그 다음날인 25일 개봉작인데... [로드무비]가 관객이 없자 흥행 기대작인 [중독]을 하루 먼저 개봉시킨 겁니다.
다른 몇몇 극장에서 [로드무비]가 상영중에 있었지만 너무 멀거나 혹은 당일 예매가 되지 않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로 [로드무비]가 보고 싶었는데...
요즘 우리 극장들... 멀티플렉스로 바뀌면서 스크린수도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저는 스크린수가 늘어나면 영화의 선택폭도 넓어지고, 작은 영화도 관객의 작은 사랑만 있으면 오랫동안 상영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제 희망사항일 뿐이었습니다.
스크린수가 많아졌지만 여전히 영화에 대한 관객의 선택폭은 좁으며, 작은 영화들은 일주일을 채우지도 못한채 그렇게 사라져만 갑니다. 그 수많은 스크린에서는 대박 영화라는 덩치가 큰 영화들이 전부 차지하고, 전국 400만이니, 500만이니, 예전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관객동원의 소식이 들려오지만 여전히 작은 영화들은 몇천을 넘기지도 못하고 관객들이 보기도 전에 사라져 버립니다.
[남자 태어나다]도 그러했고, [로드무비]도 그러합니다. 다행히 [남자 태어나다]는 사라지기 전에 볼 수 있었지만 작은 영화에대한 극장의 횡포는 이젠 이런 작은 영화들뿐만 아니라, 넓은 선택의 폭을 가지고 싶어하는 관객들에게 마저도 피해를 주는 군요.
결국 [로드무비]는 포기하고, [중독]이라는 영화를 예매했습니다.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왠지 찝찝하군요. 아무리 관객 동원이 여의치않는 영화라 할지라도 최소한 일주일간의 기회는 줘야하는 것이 아닌지하는 생각도 문득 해봅니다.
[중독]은 빙의를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이미 몇일 전에 [비밀]이라는 일본 영화를 보았기에 전 같은 빙의라는 소재에서 공통점을 지닌 [중독]과 [비밀]이 얼마나 유사할지 꽤 궁금했었습니다. 하지만 [중독]을 보고난 후 느낀 것은 '같은 소재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렇게 다른 영화가 탄생할 수 있구나'입니다.
[비밀]은 딸인 모나미(히로스에 로쿄)의 육체속에 들어간 아내인 나오코(기시모토 카요코)를 안타깝게 바라보아야만 하는 헤이스케(고바야시 가오루)의 아슬아슬한 사랑을 오히려 밝고 유쾌하게 그린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빙의라는 신비로운 현상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철저하게 가볍고 유쾌하게 영화를 로맨틱 코미디 형식으로 이끌어 나가다가 마지막에가서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이에반에 [중독]은 애초에 웃음을 철저하게 배제합니다. 시동생인 대진(이병헌)의 육체속으로 빙의된 남편 호진(이얼)의 모습에 은수(이미연)는 한없이 괴로워하며 쉽게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대진의 몸속으로 빙의된 호진의 모습에 방황하고, 아파하다가 결국은 대진을 호진으로 받아들이는 은수의 그 세밀한 감정을 잡아냅니다. 그리고 그들의 아픈 사랑을 그려나갑니다. 이렇게 슬픈 멜로 형식을 띄우던 영화는 마지막엔 스릴러적인 반전을 준비함으로써 눈물에 젖어 있던 관객의 뒤통수를 치려합니다.
이렇듯 [비밀]이 빙의라는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새로운 행복을 찾으려했던 헤이스케의 사랑을 로맨틱 코미디 형식으로 그려나갔다면, [중독]은 은수가 빙의라는 현상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나가다가 마지막엔 조금은 섬뜩한 반전을 준비한 로맨틱 스릴러 형식의 영화였습니다.
이렇게 코미디와 스릴러의 그 장르적인 차이만큼 [비밀]과 [중독]은 확연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영화 [중독]의 첫 느낌은 '이쁘다, 멋있다'입니다.
영화속 호진 가족의 보금자리도 이뻤고, 이병헌, 이미연, 이얼, 박선영등 등장인물들도 한결같이 순정만화의 주인공들처럼 이쁘고 멋있습니다. 호진이 만든다는 가구들도 이뻤고, 대진이 출전한다는 카레이스 경기도 멋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쁘고 멋진 화면 속에서 박영훈 감독이 준비한 것은 호진과 은수의 너무나도 행복해보이는 사랑입니다. 결혼 3년차 부부이지만 마치 신혼부부처럼 단란함을 지닌 호진과 은수는 이 이쁘고 멋진 공간 속에서 그야말로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행복한 사랑을 합니다.
하지만 박영훈 감독은 이내 본색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티없이 이쁘고 멋있는 장면들로 화면을 가득 채움으로써 호진 가족이 얼나마 행복한지를 보여주던 이 영화는 중반, 호진과 대진이 똑같은 시기에 사고를 당하면서 이 모든 이쁨과 멋짐을 슬픔으로 바꿔버립니다. 영화의 초반 이들의 사랑이, 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기에 영화 중반에 몰아닥친 불행은 더욱더 아프고 슬프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행복... 그리고 불행은 동전의 앞뒤와도 같은 사이일지도 모릅니다.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그것을 잃었을때의 아픔과 슬픔, 불행이 더욱 커지니 말입니다. 박영훈 감독은 그 사실을 잘 간파하고 있었으며, 관객의 감정선을 건드리기위해 영화 초반의 장면들을 정성스럽게 이쁘고 멋지게, 그리고 행복 가득하게 표현합니다.
이제 박영훈 감독은 호진과 대진, 그리고 은수의 행복을 산산히 부서뜨려 놓고 관객들이 가슴아파 하는 사이에 빙의라는 소재를 살포시 꺼내듭니다. 의식에서 깨어난 대진은 자신이 호진이라고 주장하고 호진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은수는 이러한 대진의 모습에 방황합니다.
이렇게 영화의 첫느낌인 '이쁘다'를 영화의 중반 자연스럽게 '슬프다'로 바뀌놓으며, 빙의라는 소재를 성공적으로 꺼내든 박영훈 감독은 이제 본격적으로 슬프고, 아프며, 미친 그리고 지독한 사랑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빙의...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낯선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간다면... 이 영화를 보며 전 잠시 이러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과연 나는 그 낯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의 차이일 것 같습니다. 과연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나의 가슴으로 느끼는 것을 믿어야 할지...
빙의라는 소재에 대해서 관객이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을법한 이러한 갈등을 이 영화는 은수라는 캐릭터를 통해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비밀]이 그러한 것들을 건너뛰고, 딸의 몸속으로 들어간 아내와의 순진한 사랑에만 집착하는 중년 남자의 모습만을 보여줘서 빙의라는 소재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면, 이 영화는 은수가 호진의 빙의를 믿지 못하고 방황하는 장면들로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함으로써 빙의라는 소재를 잘 활용합니다.
호진을 너무 사랑하지만... 대진에게서 호진의 모습을 느끼지만... 쉽사리 대진을 호진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은수의 그 가슴 아픈 갈등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 깊이 파고들고, 은수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그래서 이렇게 대진의 모습을 빌어 돌아왔지만 자신때문에 힘들어하는 은수의 모습을 보며 그냥 대진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호진의 슬픈 사랑이 제 감성을 자극시킵니다.
베이시스의 전 멤버이기도 했던 정재형의 음악도 이러한 영화의 분위기에 한 몫합니다.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중독]에 흘러나오는 그의 음악은 마치 사랑에 모든 에너지를 소모한 후 더이상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은 듯... 그렇게 애절하고, 처절하며, 슬프게 들립니다. 마치 은수를 바라보던 대진의 그 눈빛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이 영화는 빙의라는 소재를 사랑이라는 아름답지만 슬픈 감정에 적절하게 접목시킴으로써 관객의 감성을 자극시킵니다.
이렇게 이 영화가 빙의라는 소재로 관객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었는데에는 빙의라는 소재의 힘도 컸지만 이 영화의 주연 배우들의 힘 또한 컸습니다.
특히 이병헌... 이미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그의 눈빛이 얼마나 슬픈지를 뼈저리게 느꼈던 저로써는 이 영화에서의 그의 눈빛은 더욱더 애달프게만 느껴집니다. 시종일관 웃음을 잃고 아픈 사랑에... 그리고 지독한 사랑에 몸부림치는 대진의 모습과 왠지 한없이 슬프게만 느껴지는 이병헌의 눈빛이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이병헌과 비교한다면 솔직히 이미연의 연기는 제가 보기엔 조금 약한 면이 있었습니다. 특히 영화 초반 호진과의 행복한 사랑을 나누는 은수의 모습을 연기할땐 그녀의 모습에서 여지없이 아줌마의 모습이 흘러나오더군요. 하지만 그녀의 연기가 빛을 발하는 것은 영화의 후반... 모든 기쁨이 사라지고 슬픔만 남았을때 입니다. 그녀의 그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올때 제 마음이 얼마나 흔들렸는지... 역시 그녀는 이런 슬픈 멜로 연기가 잘 어울리는 듯 합니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인디안 썸머]와 [물고기 자리]에서도 그녀의 그 슬픈 눈빛과 너무나도 안타깝던 눈물이 제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었는데...
호진 역의 이얼과 대진을 끝까지 바라보는 해바라기 사랑을 펼치는 예주 역의 박선영 역시 결코 모나지 않는 연기로 이 영화를 잘 받쳐줍니다.
특히 이얼의 연기는...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던 제게 그의 출연작들을 다시 한번 살펴볼 마음이 생기게 할 정도로 매력적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박선영의 연기가 너무 평면적이고 단조로워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래도 이 슬픈 사랑이야기의 뒤를 받쳐주기엔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슬픈 느낌의 멜로 드라마에 그 역량을 발휘하던 박영훈 감독은 영화 마지막의 반전에 대해서는 미숙한 경험을 노출시킵니다.
특히 [중독]은 반전을 영화의 예고편을 통해 관객에게 노출시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릅니다. 반전이라는 것이 숨기면 숨길수록 더욱 매력적이란 것을 이 영화의 관계자들은 정녕 몰랐는지... 너무나 감각적이고 인상깊었던 그래서 더욱더 기억에 또렷이 남는 이 영화의 예고편은 이 영화의 마지막 반전을 여과없이 보여주며 영화를 보는 내내 설마설마했던 절 실망시켰습니다.
이렇게 예고편으로 마지막 반전을 살짝 노출시킨 이 영화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마지막 반전에 대한 힌트를 너무 많이 관객들앞에 오픈해 버립니다. 제 경우는 이 영화의 반전을 영화의 중반에 이미 예상해 버렸으며, 이러한 반전이 어떻게 밝혀질것인지 조차도 휜히 보였습니다.
하지만 박영훈 감독은 반전이 밝혀진 후에도 마치 관객들이 그 반전을 이해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 반전이 어떻게 된것인지 친절히 설명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이 영화의 어설픈 반전은 영화가 힘들여서 마련한 슬픈 사랑의 느낌을 반감시킵니다.
차라리 [번지점프를 하다]처럼 아무런 반전도 준비하지 않고 그저 주인공들의 슬픈 사랑에 촛점을 맞춰 나갔다면 더욱 좋았을 것을... 아니면 좀더 철저하게 반전을 숨기기라도 했더라면... 암튼 약간의 아쉬움이 남네요.
하지만 그래도 그 영화는 올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릴만한 슬프고 감각적인 멜로 영화가 되기에 충분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