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02년 영화이야기

[본 아이덴티티] - 지적인 분위기, 세련된 영상, 그리고 복고적인 액션.

쭈니-1 2009. 12. 8. 15:22

 



감독 : 더그 라이먼
주연 : 맷 데이먼, 프랭카 포텐트
개봉 : 2002년 10월 18일

'나, 정동진에서 해돋이보고 싶어.'
지금까지 정동진에 한번도 가 본적이 없다는 그녀는 어느날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동진의 해돋이... 솔직히 저로써는 정동진의 해돋이라고 해서 별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소망을 짓밟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 내가 기차표 예매해 놓을께.'
정동진으로의 무박 여행... 그녀와 나는 인터넷 여행 동호회에서 만난 사이이지만 단 둘만의 여행은 처음이었기에 무척이나 떨렸습니다. 하지만 정동진에서의 멋진 추억을 만들기 위해 정동진에 대한 인터넷 사이트도 뒤지고, 철도청 사이트에 들어가 기차표 예매도 하고 만반의 준비를 다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정동진으로의 출발 당일날인 금요일... 저녁에 그녀와 만나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영화를 보고, 기차 시간에 맞춰 청량리 기차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청량리역 광장의 시계탑엔 내일 비 올 확률이 30%라는 불길한 글자가 쓰여 있었지만 저는 그래도 비 안올 확률이 더 높다며 그녀를 안심시키며 기차에 올랐습니다.
7시간동안 새벽을 관통하는 기차 여행... 그녀는 나의 어깨에 기대어 새근새근 잠이 들었고 저는 그녀의 천사같은 잠든 모습을 보며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정동진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동진 기차역에서 내린 우릴 반기는 것은 해돋이가 아니고 거친 바람과 차디찬 빗방울이었습니다. 정동진 해변가에서 해돋이를 보고, 모래시계공원도 거닐고, 따뜻한 커피와 함께 멋진 아침 식사도 하고 싶었는데... 그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우린 비에 흠뻑 젖어 안절부절 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냥 그렇게 정동진 해돋이도 못본채 비만 흠뻑 맞고 강릉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예정보다 빨리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너무나 아쉬워하는 그녀에게 '나중에 또 오자'며 달랬지만 하늘이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하지만 그래도 멋진 여행이었습니다. 비록 정동진 해돋이도 보지 못하고, 비만 쫄딱 맞은채 감기에 걸려 서울로 돌아왔지만 그래도 그녀가 제 곁에 있어줬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번 정동진으로의 여행은 제게 너무나도 멋있었답니다. ^^;
정동진을 갔다온 다음날 그녀, 그리고 친구들과 [본 아이덴티티]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녀와 저는 정동진에서 얻어온 감기기운때문에 힘들기는 했지만 이 황금같은 휴일을 감기기운때문에 집에만 처박혀 있을 수는 없었기에 화끈한 액션으로 감기기운을 떨치자는 생각으로 [본 아이덴티티]를 보게 된겁니다.


 

 

  
[본 아이덴티티]는 맷 데이먼을 정면으로 내세운 액션 영화입니다. 요즘처럼 관객들이 '좀 더 자극적인 액션'을 원하는 시대에 맷 데이먼이라는 착하게만 보이는 배우를 액션 스타로 등극시키다니... 솔직히 영화를 보기전만해도 조금은 의아했습니다. 과연 이 영화가 성공할 수 있을까? 맷 데이먼은 새로운 연기 변신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느낀 것은 한마디로 '재미있었다'입니다.
[트리플 X]처럼 단 한순간도 눈을 땔수없는 폭발적인 액션이 쉼없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 미국 만세를 부르짓는 헐리우드 영웅이 번뜩이는 카리스마를 휘날리며 종횡무진 활약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긴장감을 적절히 조절한 액션씬과 아름다운 유럽을 배경으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첩보원 제이슨 본(맷 데이먼)과 모험심 강한 여성 마리 크로이쳐(프랭카 포텐트)의 위험한 사랑이야기라는 드라마를 강조한 스토리 전개는 꽤 흥미진진했습니다.
사실 예전같으면 [본 아이덴티티]는 평범한 액션 영화로 여겨졌을 겁니다. 평범한 액션과 이러한 영화에 항상 존재하는 위험한 사랑이야기... 하지만 요즘의 액션 영화들이 너무 단순한 자극으로만 흘러가고, 저도 그러한 액션 영화에 물들어 있었기에, 자극을 줄이고 드라마를 강조한 [본 아이덴티티]에게 반가운 옛 친구를 만난듯한 좋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본 아이덴티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복고적이면서도 감각적이고, 긴장감을 적절하게 조절한 액션씬입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본 아이덴티티]의 액션씬을 보고 있노라면 요즘 액션 영화와 비교해서 약해도 너무 약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스파이 영화라면 필연적으로 등장해야 할 것 같은 최첨단 무기도 없으며, 온 도시를 날려버릴 거대한 폭발씬도 없습니다. 게다가 머리가 아플정도로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총격씬도 이 영화엔 없습니다. 마치 요즘 액션 영화에서 꼭 등장하는 장면들은 일부러 뺀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이 영화의 액션은 낯설고 조용합니다.
하지만 조용한 액션만으로도 이 영화는 긴장감을 잘 잡아냅니다. 특히 제이슨 본을 없애기 위해 파견된 유럽의 일급 킬러들과 제이슨 본이 벌이는 액션은 요즘 액션 영화와 비교한다면 무지 얌전하고 조용하지만 결코 긴장감만은 다른 액션과 뒤지지않을 정도로 잘 짜여져 있습니다.
전 제이슨 본과 킬러들의 일대일 대결 장면에서 이젠 멸종되어버린 서부 영화속 총잡이들의 일대일 대결을 보는 것 같아 너무 좋았습니다. 특히 두번째 킬러와의 대결 장면... 제게 그 장면은 그 어떤 액션 영화의 긴박한 액션씬보다도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그런 최고의 장면이었습니다.    
[본 아이덴티티]는 이런 복고적인 액션씬들을 유럽의 그 수려한 멋진 관광 도시속에서 감각적으로 그려나갔으며, 전 긴장감을 늦춰서는 안되는 액션 영화를 보면서도 유럽의 멋진 광경에 감탄하고, 서부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복고 액션씬에 감동하며,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의 이런 감각적이면서도 복고적인 액션씬을 감상하다보면 제이슨 본과 마리의 위험한 사랑이 펼쳐 집니다.
솔직히 액션 영화에서 이런 식의 사랑이야기는 흔하디 흔합니다. 하지만 제가 [본 아이덴티티]의 드라마에만 특별한 점수를 주는 것은 이 영화가 액션씬을 최대한으로 자제하고 제이슨과 마리의 사랑 이야기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좀더 진솔하게 그리려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마리라는 캐릭터는 007의 본드걸처럼 한번 스치고 지나가는 그런 양념같은 캐릭터로 묻힐 수도 있었습니다. 분명 제이슨 본이 세계의 위기를 구하는 영웅이었다면 마리는 그런 영웅에게 한번 스치고 지나가는 금발의 여인일 수 밖에 없었겠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그따위 영웅담이 아닙니다. 제이슨 본은 영웅이 되기 보단 한 사람의 사람으로써 정당한 인생을 살길 원했고, 제이슨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준 인물이 바로 태어나서 처음 사랑을 느낀 여인인 마리라는 것은 이 영화의 중요한 키포인트입니다.
소위 지구의 평화(?)를 위해 미국의 앞길을 방해하는 인물을 냉혈하게 제거해야 하는 제이슨이 그런 임무보다는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삶을 쟁취하기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하는 장면은 지구의 평화라는 허무맹랑한 임무를 짊어졌던 다른 액션 영웅과는 다른 인간미가 느껴집니다.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인간미때문이며, 제이슨에게 이러한 인간미를 돌려준 인물이 마리라는 여성이기에 전 마리와 제이슨의 러브 스토리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은겁니다. 이젠 액션 영웅들도 초인적이기 보다는 이런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


 

 

  
하지만 이 영화에서도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가 세련되고 정감있는 액션 영화는 될 수 있었지만, 뛰어난 액션 스릴러가 될 수는 없었다는 겁니다.
분명 제이슨은 기억 상실증에 걸렸고, 관객들은 제이슨에게 감정이입되어 제이슨과 같은 입장에서 제이슨의 정체 밝히기기에 몰두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제이슨의 정체는 영화의 초반 관객에게 너무 일찍 밝혀집니다. 그렇기에 영화속 제이슨은 자신의 기억을 찾기위해 방황하지만, 이미 제이슨의 잃어버린 기억을 눈치챈 관객들은 제이슨과의 감정이입을 풀고 제 3자의 입장에서 제이슨의 모험만을 보게 되는 겁니다.
차라리 좀더 제이슨의 정체를 늦게 관객에게 오픈함으로써 관객과 제이슨의 감정이입을 길게 끌고 갔다면 정말 뛰어난 액션 스릴러가 될 수도 있었는데...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남더군요.
게다가 영화의 후반 제이슨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이유가 너무 억지는 아닌지... 겨우 어린 아이때문에 그런 막중한 임무를 맡고 그 준비를 철저하게 했던 제이슨이 어처구니없이 임무를 실패하다니... 조금 납득이 안되더군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아이덴티티]는 요즘처럼 보고나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요란한 액션 영화들 속에서도 꽤 신선한 재미를 갖춘 액션 영화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마리의 곁으로 돌아간 제이슨의 그 미소가 지구를 위기에서 구출한 다른 액션 영웅의 미소보다도 더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제이슨에게서 인간미를 느꼈기 때문일겁니다. ^^


 

  

다정이

좋은 지적이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동감이 가는 부분이 참 많네요...
 2002/10/24   

쭈니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다정이님도 [본 아이덴티티]를 재미있게 보셨나보군요.
하긴 요즘처럼 과격한 액션이 판을 치는 세상에 보기 드문 액션영화이긴 하죠. ^^
 2002/10/24    

안녕하세요^^
구피님 블로그에서 감상평 보고 찾아왔습니다.
제이슨의 임무실패는 첫임무에서의 고통이 이어진건가요? 저도 아이덴티티를 봤을때 쭈니님과 같은 아쉬움이 남았었거든요.
 2005/12/11   

쭈니

거의 두달만에 발견한 덧글이군요.
구피의 블로그가 이런 인연까지 만들어주다니... ^^
 2006/02/15    

돼찌훈

글쓰는 솜씨가 아주 대단하시네요 !!  2009/01/24   

쭈니

감사합니다. 돼찌훈님... ^^  2009/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