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박희준
주연 : 정준, 홍경인, 여현수, 이원종, 김사랑
개봉 : 2002년 10월 11일
그녀는 요즘 너무 바쁘고 힘이 듭니다. 일에 지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때면 제가 무언가 힘이 되어 주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저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힘내라는 말밖에...
그녀가 일에 지쳐 전화를 했던 지난 월요일. 저는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 늦은 시간까지 저녁 식사 조차 못하고 일에 대한 스트레스때문에 수척해진 그녀는 절보고 밝게 웃으며 '나 햄버거 먹고 싶어.'라고 말합니다. 좀더 좋은 것을 사주고 싶었는데... 그녀도 제 주머니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듯 합니다. 그녀에게 얼마나 미안하던지...
다음날, '나 일하기 싫어'라며 다른 날보다 더 지친 목소리로 전화를 한 그녀. 전 그녀에게 오늘은 일찍 퇴근하고 재미있는 영화 한편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할일이 많다고 투덜거리던 그녀도 결국 그러한 제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과연 어떤 영화가 좋을까? 그녀의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확 풀어줄 유쾌한 영화... 하지만 그런 영화는 쉽게 찾아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때 제가 발견한 것은 '남자짠 살리기 운동'이라는 이상한 제목의 기사였습니다. 그 기사엔 배급의 열세 탓에 많은 스크린을 잡지 못하고 그나마 상영 극장에서도 지난 주말동안 오전에만 상영되고 황금 시간대인 저녁 상영회 때는 다른 영화로 대체 상영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던 [남자 태어나다]라는 영화에 대한 네티즌들의 영화 살리기 운동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는 [남자 태어나다]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내용도 뻔해 보였고, 출연 배우들도 그리 매력적이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천사몽]이라는 최악의 영화를 만들었던 박희준 감독의 두번째 작품이라는 것이 제 관심에서 벗어난 중요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네티즌들이 영화 살리기 운동을 벌이는 작품인 만큼 최소한 [천사몽]같은 어이없는 영화는 아닐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제가 신뢰하는 몇몇 네트즌 영화 평론가들이 극찬을 한 작품이었기에 아주 조심스럽게 전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그날 그녀에게 [남자 태어나다]라는 영화와, 제 오랜 자작 소설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는 고등학교때의 일기장 두권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녀는 나의 이 보잘것 없는 선물에 너무나 기뻐하며 좋아했습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았던 제 일기장에 쓰여있는 소설을 정신없이 읽다가 지하철을 한 정거장 지나서 내렸다더군요. 정말... 착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
[남자 태어나다]는 마이도라는 작은 섬에서 대성(정준), 만구(홍경인), 해삼(여현수)을 권투 특기생으로 대학에 보내기 위해 벌어지는 작은 소동을 다루고 있는 영화입니다.
일단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어 보입니다. 얼뜨기 주인공들이 한가지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실수하고, 결국은 이루어 낸다는 것은 코미디 영화에서 가장 흔한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입니다.
예를 들어 [울랄라 시스터즈]도 그러했습니다. [울랄라 시스터즈]는 라라 클럽을 지키기 위해 은자(이미숙), 혜영(김민), 경애(김현수), 미옥(김원희)이 '울랄라 시스터즈'라는 기상천외한 댄스 그룹을 결성하면서 벌어지는 소동극을 그린 코미디 였습니다. 이러한 스토리 라인은 [울랄라 시스터즈]뿐만이 아닙니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경우는 첫사랑의 여인 봉자(한채영)를 구하기 위해 디스코 왕이 되어야 하는 해적(이정진)의 눈물겨운 소동극이 주요 내용이었고, 최근에 개봉된 [YMCA 야구단]도 이와 같은 맥락을 지낸 코미디 영화입니다.
이러한 코미디 영화들은 한결같이 주인공들에게 이루기 어려운 과제를 내주고 그들이 이 과제를 이루기 위해 실수 연발 하는 장면을 보여 줌으로써 웃음을 유발시키고,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과제를 이루어 냈을때에는 감동을 준비해 놓습니다. 이렇게 웃음과 감동이 동시에 공존할 수 있으니 이런 식의 코미디 영화는 계속 재생산되고, 어느 정도 재미를 갖추고 있으니 관객들은 약간의 상황 설정만 바꾼 이러한 영화들을 보고, 웃으며, 눈물을 흘려 줍니다.
그러한 면에서 [남자 태어나다]는 그야말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영화입니다. 대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섬마을 청년 세명을 앉혀놓고 '권투 특기생으로 대학 가기'라는 과제를 내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권투와는 전혀 인연이 없어보이는 세명의 얼뜨기 청년들이 권투를 배우며 벌어지는 실수담들을 웃음으로 준비해놓고, 남들의 비웃음과 모든 역경을 딛고 성공을 거두었을때엔 감동을 선사하려 합니다. 분명 영화의 기본 줄거리 모양새는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이 영화는 이 모든 익숙함속에서도 틀에 박힌 감동을 배제하고, 새로운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눈물을 선사하더군요. 제겐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이런 익숙함 속에서 새로운 감동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영화들보다 좀더 현실적인 캐릭터의 구축과 함께 작은 섬마을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우리 사회의 편견을 진솔하게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속의 섬마을 세청년인 대성과 만구, 해삼이라는 캐릭터는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도시 사람들의 멸시를 받고 살아가야하는 젊은 청년들의 마음을 진솔하게 잡아냅니다.
대성은 단지 대학을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하고 멸시당합니다. 그가 일하는 당구장 주인은 그에게 배우지 못해 무식하다며 무시하고, 그가 사랑하는 사랑(김사랑)의 부모들은 그가 대학에 안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멸시합니다. 그가 대학에 가려는 이유는 단지 무시와 멸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대학에서 특별히 배우고 싶은 것도 없고, 그렇다고 앞으로의 꿈도 확실치 않습니다. 단지 섬마을 촌놈이라고 멸시하고 무시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을 뿐입니다.
이러한 사정은 만구와 해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 친구중에서 그래도 가수라는 미래의 꿈을 확실하게 품고 있는 만구에게 대학이라는 공간은 단지 가수의 길이 쉽게 열리는 기회의 땅에 불과합니다. 대학에 가지 않고도 가수가 될수 있다면 그는 굳이 대학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가지 않고 가수의 길을 선택하는 것보다 대학에 가서 가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더 수월하기에 그는 대학에 가기를 소망합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평생 어부로 갈아가기를 희망하는 아버지에게 벗어나기 위해 대학의 길을 선택한 해삼에게 대학이라는 공간은 마이도를 벗어날 수 있는 구실에 불과합니다. 단지 대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는 마이도라는 세상에서 벗어나 좀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겁니다.
이렇듯 이 영화는 '대학에 가서 마이도를 세상에 알려라'라는 단순한 과제에서 시작하여 단지 대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대하고, 기회를 주는 대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애를 가감없이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젊은 시절의 꿈을 펼치기 위해선 대학이라는 곳에 꼭 가야만 했던 섬마을의 세 청년을 가슴 따뜻하게 그려냅니다.
이렇듯 익숙한 형식의 코미디와 소외된 계층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담은 드라마가 공존하는 이 영화는 영화의 초반엔 코미디의 형식으로 관객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영화 후반엔 따뜻한 드라마로 틀에 박힌 감동이 아닌 진솔한 감동을 관객에게 전해 줍니다.
영화 초반의 코미디는 대부분 세청년의 권투 코치로 부임한 왕수환코치(이원종)에게서 비롯됩니다. 현역시절 7전 2승 5패라는 화려한(?) 성적에 빛나는 왕코치는 영화의 초반 부분을 거의 장악하며 관객에게 끊임없이 웃음을 전달해 줍니다. 하지만 영화가 중반으로 흐르며 이 영화는 점점 웃음보다는 감동쪽으로 저울추를 기울여 갑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도 역시 왕코치가 있습니다.
이렇듯 이 영화는 정준과 홍경인, 여현수라는 젊은 배우들의 풋풋함 외에도 이원종이라는 걸출한 조연 배우의 능력에 상당 부분 기댑니다. 젊은 시절 젊음 하나만 믿고 세상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왕코치는 결국 패자가 되어 은둔 생활을 하던 중 대성과 만구, 해삼을 가르칠 기회를 얻게 되고 그들에게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발견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처럼 사회의 패자가 되지 않도록 진심으로 염원하고 가르칩니다.
영화의 초반엔 왕코치의 그 어눌함에 웃음을 유발시키던 이 영화는 중반으로 흐를수록 어떻게든 자신의 제자들이 사회에 성공적으로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모습을통해 감동을 유발시킵니다.
물론 초반 무작정 웃기기만 했던 왕코치가 영화의 중반 갑자기 진지하게 바뀌는 장면에서 약간 느닷없어 보이지만 이원종은 그러한 느닷없음을 연기력으로 잘 커버함으로써 영화의 재미를 이끌어 냅니다. 그야말로 이원종... 당신의 능력을 보여줬습니다.
이제 영화는 후반으로 흐르고 초반의 웃음과 중반 세상으로부터 어떻게든 인정받으려 발버둥치는 세 청년의 모습에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했던 이 영화는 마지막 세 청년의 성공으로 막을 내릴 만반의 준비를 다 하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본 순간 전 마치 뒷통수를 강하게 한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예상했던 해피엔딩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성은 결코 사랑의 부모와 섬마을 촌놈이라고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으며, 만구는 가수라는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해삼 역시 마이도를 벗어나 좀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해피엔딩입니다. 왜냐하면 대성과 만구, 해삼은 자신의 꿈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방법을 배웠으며, 그 꿈을 향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엔딩 자막이 흐르는 동안 컬러도 흑백도 아닌 그레이빛 영상속에서 세상을 향해 자신의 꿈을 외쳐대던 대성과 만구, 해삼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 거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꿈을 가지고 있는 젊음은 이렇게 언제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건가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