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롭 코헨
주연 : 반 디젤, 아시아 아르젠토, 사무엘 L. 잭슨
개봉 : 2002년 10월 3일
작년 미국에서 의외로 흥행에 성공을 거둔 [분노의 질주]는 그러나 우리 나라의 흥행에서는 참패를 면치 못했습니다. 물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스타의 부재가 이 영화의 국내 흥행 참패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년이 흐르고 [분노의 질주] 제작진들이 다시 모여 [트리플 - X]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트리플 - X] 역시 [분노의 질주]처럼 스타의 부재는 여전합니다. [분노의 질주]를 통해 헐리우드 새로운 액션 스타로 떠오른 반 디젤이 버티고 있지만 [분노의 질주]가 흥행 실패한 우리나라에선 거의 무명이나 마찬가지이며, 이 영화의 홍일점인 아시아 아르젠토는 [스탕달 신드룸]이란 영화로 제게 강한 인상을 남기긴 했지만 역시 그녀를 기억해 내는 사람이 극히 드물정도로 낯선 얼굴입니다. 단, 사무엘 L. 잭슨이라는 듬직한 배우가 나오긴 하지만 그역시 액션 영화와는 그리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트리플 - X]는 [분노의 질주]와 비교해서... 아니 요즘 헐리우드의 액션 영화라고 하는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서 액션의 강도 자체가 틀립니다. 끊임없이 때리고... 부수고... 폭발하고... 이 영화는 스타의 부재를 액션의 강도로 메꿔버립니다.
전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숨막히는 액션씬으로 인하여 단 한시도 숨을 제대로 쉴수가 없었으며, 영화가 끝날때쯤엔 강한 현기증 마저 일으켜야 했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 나도모르게 터져나오는 한숨...
'휴~ 드디어 숨을 쉴수 있겠구나.' ^^;
이 영화는 아주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액션을 터부어 냅니다. 강렬한 락 음악이 터져나오고 긴박하게 적으로부터 쫓기는 양복입은 한 사내... 락음악에 열광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그의 모습은 굉장히 낯설어 보입니다. 결국 그는 저격되어 죽고, 곧이어 국가보안국 요원인 깁슨스(사무엘 L. 잭슨)는 범죄자를 소탕하기 위해선 범죄자를 기용해야 한다며 역설합니다. 그리고 다시 영화는 쉼없이 젠더 케이지(반 디젤)라는 한 사내의 무모해 보이는 스턴트씬을 펼쳐보입니다.
이것이 전부 영화 시작 10분만에 터져나온 것 들입니다. 도대체 영화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영화는 관객들이 정신을 차릴 여유를 주지 않기로 작정을 한 것 같습니다. 모든 장면은 한템포 빠르게 전개되고 영화는 '오직 액션!!!'만을 외치며 앞으로 전진합니다.
케이지가 깁슨스에게 납치당하고 어느 식당에서 정신을 차렸을때 '이젠 조금 한템포 쉴려고 하는가보다'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제게 이 영화는 마치 비웃듯이 다시한번 액션을 쏟아 붓습니다.
이렇듯 끊임없이 쏟아지는 액션씬에 저는 처음엔 적응이 안되어서 저절로 눈이 감길 정도였습니다. 가까스로 감기는 눈을 뜨고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의 스타일에 익숙히진 것은 케이지가 무정부 주의자인 요르기의 음모를 밝히기위해 프라하로 도착하면서 부터입니다.
이 영화는 그제서야 관객들에게 잠시 숨을 고를 시간적 여유를 내줍니다.
제가 이 영화의 초반에 익숙히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케이지라는 독특한 캐릭터 때문입니다. 반항적이고, 불량해보이고, 선천적으로 위험을 즐기는 그는 전혀 액션 영화의 영웅으로는 어울리게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 수십년동안 헐리우드는 액션 영화의 틀을 짜아왔으며, 다른 나라의 영화들도 그런 헐리우드의 틀에 맞추어 액션 영화를 만듬으로써 액션 영화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리고 헐리우드가 짜아놓은 액션 영화의 틀중에는 말쑥하고, 터프하고, 선량하고, 정의감넘치는 영웅이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물론 액션 영화마다 어느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선을 크게 넘지 않는 선에서 영웅적인 캐릭터가 완성되었었습니다. 이 영화의 전편격인 [분노의 질주]만 보더라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불량해보이는 반 디젤이 아닌 말쑥한 폴 워커였습니다.
하지만 롭 코헨 감독은 관객들이 [분노의 질주]에 열광하는 것이 폴 워커의 말쑥함보다는 반 디젤의 불량함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그는 이러한 발견을 토대로 트리플 X라 불리우는 이기적이고 제 멋대로이며 불량하기 그지없는 젠더 케이지라는 새로운 액션 영웅을 만들어 냅겁니다.
이렇듯 케이지라는 독특한 캐릭터는 액션 영화에 대해 수십년동안 쌓아올린 제 선입견때문에 초반엔 상당히 적응하기 어려웠던 겁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래, 잘하면 독특한 액션 영웅을 만날 수 있겠는걸'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이 영화의 새로움에 점차 익숙해져 갔습니다.
하지만 롭 코헨 감독은 아직 새로운 스타일의 액션 영웅이 등장하기엔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는지 케이지가 프라하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액션을 선보이는 중반부터는 그에게 정의감 넘치는 여느 액션 영화의 영웅과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돌려 놓습니다.
단지 자유롭게 살기위해 깁슨스의 제의를 받아들였던 케이지는 예리에나(아시아 아르젠토)라는 여성을 위해 이제 그만 손을 떼고 미국으로 돌아가 자유를 즐기라는 깁슨스의 제의를 거절합니다. 영화의 후반부엔 영웅적인 정의감을 불태우며 세계를 구하기도 합니다.
이왕 새로운 액션 영웅을 제시하려면 케이지를 완벽한 새로운 스타일의 영웅으로 만들어 놓던가, 그럴 생각이 없었으면 처음부터 그를 익숙한 액션 영웅으로 그리던가... 이도 저도 아닌 케이지라는 캐릭터가 이 영화의 유일한 단점입니다.
새로운 스타일의 액션 영웅에 대한 기대감을 잊어버리고, 그냥 여느 액션 영화처럼 스토리를 무시하고, 캐릭터를 무시하고, 단지 액션만 즐기려 한다면 분명 이 영화는 꽤 괜찮은 액션 영화입니다. 정의감에 불타는 액션 영웅으로 변모한 케이지는 온갖 비현실적인 액션 장면을 연출하며 관객을 즐겁게 합니다.
물론 괜히 007 제임스 본드를 연상시키는 우스꽝스러운 특수 무기들은 갑자기 이 영화가 007의 패러디 영화가 아닌가하는 의문감이 들고, 케이지에 맞서는 악당의 대처가 상당히 허술해 보여 영화 후반부의 긴장감을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어차피 모든걸 무시하고 액션만 즐기기로 결심했다면 그 모든 단점이 별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는 '오직 액션'만을 외치며 액션의 강도를 좀처럼 늦추지 않습니다. 케이지와 예리에나의 로맨스 장면이 눈요기처럼 펼쳐질만한데도 이 영화는 달콤한 로맨스 대신 음침한 스트립 장면과 위험천만한 액션으로 영화를 메꿔버립니다. 마치 로맨스 따위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겠다는 듯...
이렇듯 '오직 액션'만을 외치며 앞으로만 전진하던 이 영화는 결국 후반부에 가서는 약간 힘이 딸려보입니다. 케이지의 강력한 맞수여야 하는 요르기는 허무하게 죽어버리고 그의 조직 역시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계를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독가스가 들어있는 폭탄을 멈추는 일... 과연 이 장면에서 케이지가 폭탄을 멈추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관객은 몇분이나 계실까요???
하지만 이렇게 결말을 뻔히 알면서도 손에 땀이 나는 것은 2시간 동안이나 끊임없이 펼쳐진 액션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머리를 텅비게 만들어 그냥 아무 생각없이 영화속에 몰두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뭐... 가끔가다가 이렇게 머릿속을 비우고 끊임없이 펼쳐지는 액션속에 빠지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하지만 이 영화가 끝나고 띵~ 해진 머리를 달래느라 꽤 많은 시간이 소비되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