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프랑소와 트뤼포
주연 : 잔느 모로, 오스카 베르너, 앙리 세르
프랑소와 트뤼포. 59년 [400번의 구타]로 데뷔한후 82년 [일요일에는 서둘러라]까지 단지 20편의 영화를 만들었으나 프랑스 누벨바그의 기수중 가장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감독.
어느나라건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나라 역시 예술영화라면 극장주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스타도 나오지 않고, 자극적인 소토리가 없는 우렵이나 그 밖의 영화들은 그렇기에 관객에게 소개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채 사라져 가고 우리 관객들은 헐리우드의 잘 다듬어진 상업영화에 길들여진채 영화가 예술이라는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영화광들의 현실이다. 비평가들에게 극찬을 받은 예술영화를 보려면 번거롭게 시네마코프를 찾아야하고 그러한 열성조차 없으면 예술영화를 접할 기회는 거의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의 61년작 [쥴 앤 짐]이 소극장이긴 하지만 시내 중심 극장에서 개봉되어 비디오로까지 출시된 것은 큰 시건중 하나이다. 그 동안 말로만 듣던 명작 [쥴 앤 짐]을 대형화면에서, 그리고 극장에서 놓친 관객이라면 비디오로 여러번 반복해서 볼 수 있으니 시네마코프를 번거롭게 드나들던 영화광에게는 분명 반가운 소식이리라. 그것을 계기로 그동안 우리가 놓친 과거 명작들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진정 바란다.
이제 영화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이 영화에 대해서 말하기전에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나 역시 헐리우드의 상업영화에 길들여진 불쌍한 영화광이며 시네마코프를 찾아다니며 예술영화들을 감상하기엔 너무 게으른 탓에 예술영화들이 너무나도 낯설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고아들의 교과서적 작품인 [쥴 앤 짐]은 나에게 낯설게 다가왔고 감히 난 거장의 걸작에 대해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을 여기에 기술하겠다.
이 영화는 1차 세계대전의 파리가 배경이다. 그곳에서 프랑스인 짐(알리 세르)과 독일인 쥴(오스카 베르너)는 각별한 우정을 쌓아가고 이 두사람의 우정에 까트린느(잔느 모로)가 끼어들며 영화는 시작된다.
쥴은 까트린느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짐 역시 까트린느를 사랑하지만 쥴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감춘다. 이 이상한 삼각관계는 1차 대전이 시작되고 줄과 까트린느가 결혼하며 끝나는 듯하지만 사실 영화는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영화 초반 까트린느라는 캐릭터는 분명 매력적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남장을 하고 쥴, 짐과 달리기를 하는 장면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으며 잔느 모로의 연기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 중반이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짐은 쥴의 집에 방문한다. 짐은 쥴과 까트린느가 행복할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않다. 줄과 까트린느 사이엔 딸이 있지만 까트린느는 쥴에게 만족하지 않고 잇으며 이미 이혼한 상태였다. 쥴은 까트린느를 영원히 자신의 곁에 두고 싶은 마음에 짐에게 까트린느와 결혼하라고 당부한다. 쥴의 소원대로 짐과 까트린느의 사랑은 시작되지만 까트린느의 변덕스러운 성격때문에 짐은 결국 까트린느의 곁을 떠나버린다.
솔직히 이 영화의 재미는 까트린느에게 달려있었다. 영화초반 그녀는 이미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중반이 되어갈수록 까트린느라는 캐릭터는 점점 관객의 호감을 잃어간다. 그녀는 아무 이유없이(최소한 내가 보기엔) 불쌍한 쥴의 사랑을 외면하며 그를 괴롭혔으며 짐과의 사랑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변덕으로 일관한다. 쥴과 짐은 까트린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영화 제목이 [쥴 앤 짐]인데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까트린느이다. 그러한 주인공이 이유없는 변덕으로 인해 관객의 환심을 배신한 것이다.
영화후반 까트린느는 짐을 차에 태우고 절벽으로 떨어짐으로써 스스로 짐과 함께 목숨을 끊는다. 왜??? 물론 이 영화는 헐리우드의 상업영화처럼 스토리만 쫓아가면 안된다. 영화속에 감추어져잇는 메세지를 읽어야 한다. 그러나 예술영화를 접해보지 못한 나로써는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며 까트린느의 행동이 이상하기만 하다.
1997년 8월 16일
IP Address : 211.176.4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