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래리 워쇼스키,앤디 워쇼스키
주연 : 에밀 허쉬, 매튜 폭스, 크리스티나 리치, 수잔 서랜든, 정지훈
개봉 : 2008년 5월 8일
관람 : 2008년 5월 12일
등급 : 12세 이상
영화와 장난감의 상관관계
[호튼]을 보기 전 상영된 예고편을 보며 다른 애니메이션을 제쳐두고 [스피드 레이서]를 다음 영화로 지목했던 웅이. 이제 겨우 6살 된 녀석이 애니메이션이 아닌 12세 관람가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고 싶다고 하자 저와 구피는 꽤 많이 놀랐습니다. 구피는 [스피드 레이서]의 러닝타임이 2시간이 넘는 것 때문에 웅이가 결국 영화를 보다가 집에 가자고 조를 것이라고 우려를 했고, 저 역시 더빙이 아닌 자막을 웅이가 잘 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웅이는 너무나도 확신에 찬 표정으로 '[스피드 레이서]보고 싶어'라고 외쳤답니다.
석가탄신일까지 끼어서 3일간의 황금연휴가 있던 날, 저는 구피에게 기나긴 휴식을 주고 웅이와 함께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웅이가 그토록 [스피드 레이서]를 보고 싶어 하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웅이는 영화보다는 장난감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웅이의 계획은 이랬습니다. 아빠와 함께 영화를 보면 영화를 본 후 뭔가 영화와 관련된 기념품을 사는 것을 즐기는 제 특성상 극장 앞에서 팔고 있던 [스피드 레이서] 장난감을 사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쩐지 2시간 동안 지속된 영화 상영시간동안 웅이는 아주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영화에 집중했던 것도 아니면서 영화 보며 딴 짓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제게 마치 예쁘게 보이려고 다짐이라도 했던 것처럼 너무나도 얌전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드디어 영화가 끝나고 웅이와 저는 [스피드 레이서] 장난감 앞에 섰습니다. 웅이보다도 제가 잘 만들어진 [스피드 레이서] 장난감을 더욱 사고 싶었지만 장난감을 사면 집에서 쫓아내 버리겠다던 구피의 잔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아 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차마 발길을 떨어뜨리지 못하는 웅이를 억지로 끌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추욱 늘어진 채 '아깝다. 정말 갖고 싶은데...'라며 푸념하는 웅이의 모습을 보며 저 역시 마음속으로 푸념했답니다. '나도 정말 갖고 싶었는데...'
워쇼스키 감독에 정지훈 조연
웅이는 자동차 장난감 때문에, 저는 웅이와의 영화보기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스피드 레이서]를 봤지만 그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스피드 레이서]는 충분히 제겐 기대작이었습니다. 구피는 여자의 직감을 내세우며 '재미없을 것 같아'라며 보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지만 저는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빠져나온 워쇼스키 형제의 연출력을 확인하는 것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진출한 한국 스타 정지훈(비)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스피드 레이서]를 극장에서 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워쇼스키 형제는 [스피드 레이서]를 통해 [매트릭스 시리즈]와는 또 다른 가상공간을 만들어냈습니다. [매트릭스 시리즈]를 통해 놀라울 정도로 철학적이며 시각적으로 현란하지만 암울한 디스토피아적인 가상공간을 만들어 냈던 그들은 [스피드 레이서]에서는 비록 거대 기업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지만 [매트릭스 시리즈]의 가상공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활기차고 역동적인 원색의 만화적인 가상공간을 만들어 냈습니다.
정지훈의 할리우드 안착도 꽤 성공적으로 보입니다. 비록 주연은 아니었지만 비중 있는 조연으로 결코 극중 다른 캐릭터들과 무난하게 융화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젠 할리우드 영화에서 한국인이 나와도 그것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신기하던지... 암튼 정지훈이 한국인이기 이전에 [스피드 레이서]의 수많은 배우중의 한명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스피드 레이서]는 일단 정지훈에겐 꽤 성공적인 영화였습니다.
현란한 시각적 효과만 있다.
하지만 [스피드 레이서]를 극장에서 볼 이유를 굳이 따져야한다면 앞에서 언급한 이유 이외엔 달리 다른 이유들을 찾기가 어려워집니다. 그것이 바로 [스피드 레이서]의 안타까운 단점입니다.
많은 관객들이 [매트릭스 시리즈]에 열광을 보냈던 이유는 볼거리가 많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이면서도 단순하지 않은 철학적인 스토리 라인의 재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눈에 보이는 현란한 볼거리만으로는 천문학적인 흥행을 기대하는 것이 힘든 시대입니다.
그런 면에서 [스피드 레이서]는 단순해도 너무 단순했습니다. [매트릭스 시리즈]를 통해 복잡한 블록버스터의 절정을 보여줬던 워쇼스키 형제는 이젠 그런 복잡함에 지쳤다는 듯이 만화를 원작으로 한 [스피드 레이서]를 차기작으로 선택했고, [스피드 레이서]에서는 최대한으로 단순하게 스토리 라인을 이끌어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다음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될지 충분히 예상이 되는 와중에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몇 차례의 레이싱 장면에서도 현란한 시각 효과만 있을 뿐 드라마 같은 승부의 묘미는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권선징악적인 결말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캐릭터의 성격마저 매우 단선적인 이 영화는 2시간이 넘는 현란한 만화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현재 [스피드 레이서]는 미국에서 흥행중인 [아이언 맨]과 비교될 정도로 미지근한 흥행을 올리고 있으며, 정지훈의 출연에도 불구하고 국내 박스오피스 역시 전주에 개봉한 [아이언 맨]에 50%도 안 되는 저조한 성적으로 2위에 머물렀습니다. 단순하기로는 [아이언 맨]도 결코 뒤지지 않지만 히어로 영화에 대한 관객의 기대심리가 단순한 레이싱 영화에 앞선 모양새입니다.
잘 빠진 레이싱 카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워쇼스키 형제는 [스피드 레이서]를 만들며 뭔가 크게 착각을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미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터득한 현란한 특수효과 기술과 더불어 미끈하게 잘 빠진 레이싱카를 화면 가득 출연시키면 관객들이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을 좋아했던 관객들도 있었습니다. 웅이만 하더라도 [스피드 레이서]를 보겠다고 조른 이유가 '마하 5'가 멋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웅이는 영화보다는 '마하 5' 장난감을 더욱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스피드 레이서]는 캐릭터 장난감에서 큰 인기를 끌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미끈하게 잘 빠진 '마하 5'가 사고 싶어 근질근질할 지경이니까요.(그런데 무지 비싸더군요. 엄지 손가락만한 장난감 하나가 만원이 넘다니...) 하지만 영화 자체로는 큰 인기를 끌 수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스피드 레이서]를 본 후 집에서 웅이와 함께 픽사의 애니메이션 [카]를 봤는데 [스피드 레이서]와 비교해서 [카]의 레이싱 장면이 절대 뒤떨어지지 않더군요. 게다가 몇 번을 봐도 흡입력이 있는 스토리 라인과 마지막 레이싱 장면의 극적인 승부의 묘미까지... [카]가 오히려 [스피드 레이서]보다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만화를 원작으로 했지만 만화인 [카]보다도 영화적인 재미가 떨어지는 아이러니한 영화 [스피드 레이서]가 결국 [카]보다 좋은 것은 '마하 5'가 '라이트닝 맥퀸'보다 더 미끈하다는 것 외엔 개인적으로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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