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윌 글럭
주연 : 도널 글리슨, 로즈 번
더빙 : 제임스 코든, 마고 로비, 엘리자베스 데비키, 데이지 리들리
개봉 : 2018년 5월 16일
관람 : 2018년 6월 2일
등급 : 전체 관람가
애니메이션에 대한 편견은 나를 좌절시킨다.
[피터 래빗]의 북미 개봉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이 영화가 어서 빨리 국내 개봉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1902년 베아트릭스 포터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 밖을 나온 '피터 래빗'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토끼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피터 래빗'이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조합하여 영화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북미에서는 2018년 2월 9일에 개봉하여 개봉 첫주 [50가지 그림자 : 해방]에 이어 2천5백만 달러의 성적으로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했으며, 북미 1억1천5백만 달러, 월드와이드 3억4천4백만 달러라는 성공적인 흥행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피터 래빗]은 드디어 지난 5월 16일 국내에서 개봉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온가족이 함께 극장으로 달려갈 준비를 마쳤지만, 결국 그러한 계획은 좌절되었습니다. [피터 래빗]은 개봉 3주가 지났지만 가족단위 관객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현재 누적관객 36만명을 기록 중에 있지만 아쉽게도 국내 개봉은 더빙 버전으로만 개봉을 했습니다. 만약 주말에 서울 시내 극장 단 한곳이라도 자막 버전으로 상영을 했다면 저는 그곳으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피터 래빗]의 자막 버전은 우리나라에서 단 한곳도 상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피터 래빗]은 어린이 관객이 더 선호할만한 영화입니다. 그런만큼 어린이 관객을 위한 더빙 버전 상영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이제 어린이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특히 [피터 래빗]처럼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랑받아온 캐릭터를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라면 어린시절의 추억을 만끽하고픈 저와 같은 어른 관객도 충분히 배려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결국 저는 애니메이션은 어린이 관객을 위한 영화라는 편견에 휩싸인 국내 배급사를 원망하며 [피터 래빗]의 극장 관람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더빙 버전으로 안보길 정말 잘했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피터 래빗]을 자막 버전으로 지난 주말에 봤습니다. 사실 극장에서 큰 화면으로 [피터 래빗]을 봤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그럴수 없으니 아쉽더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피터 래빗]의 첫 장면에서부터 저는 "더빙 버전으로 안보길 정말 잘했다."라며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피터 래빗]의 첫 장면은 새들이 노래를 부르며 '피터 래빗'(제임스 코든)을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제가 더빙 버전 [피터 래빗]을 보지 않아 [피터 래빗]에서도 그랬는지 잘 모르지만, 대부분의 더빙 버전 애니메이션은 영화 속 노래 장면도 우리말 더빙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건 정말 최악입니다. 가끔 케이블 디즈니 채널에서 제가 좋아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방영해서 멍하니 보곤 하는데, 도중에 영화속 뮤지컬 장면이 우리말 더빙으로 처리되면 나도 모르게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며 채널을 돌리곤 합니다.
분명 [피터 래빗]은 뮤지컬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영화의 중간 중간에 새들의 노래가 삽입되어 분위기를 전환시킵니다. 그럴때마다 어색한 우리말 더빙으로 노래가 나온다면 저는 아마 영화를 보는 도중에 극장 밖으로 투어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입니다. 제발 대사는 우리말 더빙으로 하더라도 노래만큼은 원작 그대로 놔뒀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정말 재미있었다.
[피터 래빗]을 더빙 버전으로 상영한 국내 배급사에 대한 아쉬움은 여기까지만 하고, 본격적으로 [피터 래빗]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한마디로 "정말 재미있었다."입니다. 저는 지하철에서 웅이와 함께 이어폰을 한쪽 귀에 나눠 끼우며 스마트폰으로 [피터 래빗]을 봤습니다. 그런데 영화 중간 중간에 나도 모르게 활짝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영화에 너무 몰입하다가 갈아타야 하는 정류장을 지나칠뻔 하기도 했습니다.
일단 영화의 그래픽이 너무 좋았습니다. [피터 래빗]은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합성 영화입니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1988년 영화 [누가 로져 래빗을 모함했나], 살아있는 NBA의 전설 마이클 조던이 주연을 맡은 1996년 영화 [스페이스 잼] 등 저는 젊었을 때부터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합성 영화를 좋아했고, 그러한 제 취향은 [패딩턴]으로도 이어졌습니다. [피터 래빗]은 '피터 래빗'과 동물 친구들은 3D 애니메이션으로, 비(로즈 번)와 토마스 맥그리거(도널 글리슨) 등 사람은 실사로 구축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정말 살아 있는 동물들이 연기하는 것처럼 그래픽이 워낙 뛰어나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높여 줬습니다.
그리고 '피터 래빗'와 토마스 맥그리거, 그리고 비의 삼각관계도 흥미로웠습니다. 토마스 맥그리거는 그냥 못된 악당이 아니었고, '피터 래빗'은 동물 친구들을 지키기 위한 영웅도 아니었습니다. 영화의 후반부엔 비를 사이에 두고 토마스 맥그리거와 '피터 래빗'의 사랑 다툼이 벌어지는데, 그러한 영화의 전개는 제가 예상했던 [피터 래빗]과는 전혀 달라 예상 밖의 재미를 안겨줬습니다.
자연과 도시의 화해
제가 [피터 래빗]에 특히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속 '피터 래빗'과 토마스 맥그리거의 관계 덕분입니다. [패딩턴]에서는 페루에서 런던까지 온 말하는 곰 '패딩턴'(벤 위쇼)의 모험에 밀리센트(니콜 키드먼)이라는 악당을 등장시켜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영화를 이끌어갔습니다. 그것은 [패딩턴 2]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패딩턴 2]의 악당은 밀리센트에서 피닉스 뷰캐넌(휴 그랜트)로 바뀌었을 뿐입니다.이렇게 명확한 선과 악의 대결은 어린이 관객에게 재미와 교훈을 안겨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도합니다.
하지만 [피터 래빗]에는 악당이 없습니다. 영화 초반 미스터 맥그리거(샘 닐)가 전형적인 악당 역할을 할 것으로 보였는데 놀랍게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맙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미스터 맥그리거의 먼 조카뻘인 토마스 맥그리거가 채웁니다. 그런데 그는 악당이 아닙니다. 그저 도시 생활에 익숙할 뿐입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집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숲속 동물들이 악당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결국 [피터 래빗]은 '피터 래빗'으로 대표되는 자연과 토마스 맥그리거로 대표되는 도시의 대결로 진행됩니다. 그들의 전쟁은 서로에 대한 오해와 질투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 중재자 역할은 비가 하는데... 결국 비 덕분에 '피터 래빗'과 토마스 맥그리거는 서로 화해를 하며 완벽한 해피엔딩을 맞이합니다. 언젠가 웅이가 결혼을 하면 집값이 비싼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 생활을 꿈꾸는 제게 영화 초반 토마스 맥그리거의 당혹스러움이 이해가 되면서도 마지막 해피엔딩에 가슴까지 따뜻해졌습니다. [피터 래빗]은 2편 제작이 확정되었다는데 그땐 부다 자막 버전으로 극장에서 볼 수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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