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2018년 영화이야기

[쓰리 빌보드] - 그동안 없었던 캐릭터가 전해준 블랙 코미디의 쾌감

쭈니-1 2018. 3. 20. 17:16



감독 : 마틴 맥도나

주연 : 프란시스 맥도먼드, 우디 해럴슨, 샘 록웰

개봉 : 2018년 3월 15일

관람 : 2018년 3월 19일

등급 : 15세 관람가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된 영화들을 하나씩 점령중이다.


현지 시간으로 지난 3월 4일에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습니다. 저는 해마다 이맘때면 극장가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한 영화들과 노미네이트된 영화들을 챙겨 보기에 바쁩니다. 제가 2, 3월 들어서 열심히 영화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놓친 영화가 많다고 투덜거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올해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한 영화들을 모두 극장에서 보겠다는 계획이 어긋났는데 앨리슨 제니가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아이, 토냐]와 의상상을 수상한 [팬텀 스레드]를 이미 극장에서 놓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된 영화들은 [팬텀 스레드]를 제외하고는 한편도 놓칠 수 없다는 기세로 챙겨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미 2017년에 [덩케르크], [겟 아웃]을 극장에서 봤고, 1월에는 [다키스트 아워]를, 2월에는 작품상 수상작인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을 봤습니다. 3월에는 [더 포스트]와 지난 월요일에 [쓰리 빌보드]를 봤고, 조만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레이디 버드]도 챙겨볼 예정입니다. 흥행성이 별로 없어 상영시간대를 맞추는 것조차 힘든 영화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매년 2, 3월이면 하는 연례행사이다보니 이젠 익숙해졌습니다.

[쓰리 빌보드]는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각본상 등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그 중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여우주연상을, 샘 록웰이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영화입니다. 솔직히 [쓰리 빌보드]는 아카데미가 아니었다면 제 관심 밖으로 밀려났을 영화입니다. 독특한 상상력을 발휘한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화적 재미가 충만한 영화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 덕분에 이렇게 제 취향이 아닌 영화들을 보게 되니 제 영화적 안목이 조금은 넓어진 것 같은 착각을 느낍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아카데미 시상식은 제게 의미가 있는 영화제일지도 모르겠네요.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수상 소감은 굉장히 인상깊었다.

[쓰리 빌보드]를 보니 영화속 밀드레드의 성격이 프란시스 맥도먼드와 닮은 듯하다.



딸을 잃은 엄마의 분노가 향하는 곳


[쓰리 빌보드]는 강간살해범에게 딸을 잃은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이야기입니다. 경찰의 수사는 7개월동안 지지부진하고, 사람들은 더이상 범인 잡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밀드레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마을 외곽의 대형 광고판에 도발적인 세개의 광고를 실습니다. 'PAPED WHILE DYING (죽으면서 강간당했다)', 'AND STILL NO ARRESTS? (그런데 아직도 못 잡았다고?)', 'HOW COME, CHIEF WILLOUGHBY? (어떻게 된 건가? 윌러비 서장)

밀드레드의 분노는 누군지 모르는 강간살해범이 아닌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에게 향해 있습니다. 문제는 윌러비 서장은 마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며, 췌장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어서 마을 사람들의 동정심까지 사고 있다는 점입니다. 윌러비는 밀드레드를 찾아와 자신도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며 하소연합니다. 하지만 밀드레드는 오히려 '당신이 계집애처럼 징징대는 동안 다른 여자가 죽어갈지도 모른다.'며 힐책합니다. 그러자 윌러비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도 밀드레드는 눈 하나 깜박 안합니다.

마을 목사가 밀드레드의 집으로 찾아와 윌러비 편을 들며 광고를 내리라고 권유하고, 마을 치과 의사는 아예 대놓고 밀드레드에게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한동안 연락조차 없던 밀드레드의 전남편 찰리까지 찾아와 밀드레드를 위협하는 상황, 하지만 밀드레드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딸을 죽인 범인을 찾을 수만 있다면 세상 모두와 싸울 준비가 되었고, 언론을 이용해여 경찰을 자극하는 것이 딸을 죽인 범인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췌장암에 걸렸다며 밀드레드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윌러비.

하지만 밀드레드는 당신이 죽기전에 광고를 해야 효과가 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밀드레드가 냉정하다고? 아니 자식을 잃은 부모는 남의 사정을 봐줄 여유가 없는 것이다. 



밀드레드 VS 딕슨


영화를 보기 전, 저는 [쓰리 빌보드]가 밀드레드와 윌러비의 대결이 영화의 주요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윌러비를 연기한 우디 해럴슨은 강한 개성을 가진 배우로 [올리버 스톤의 킬러] 등의 영화에서 광적인 캐릭터를 다수 연기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쓰리 빌보드]에서 우디 해럴슨은 깜짝 놀랄만한 연기 변신을 해냅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마을의 존경받는 경찰서장답게 밀드레드의 도발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렇기에 윌러비가 자살을 하고 난 후 밀드레드를 향한 비난은 더욱 거세지기만합니다.

윌러비는 밀드레드의 비난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윌러비의 부하 경찰관 딕슨(샘 록웰)은 다릅니다. 편협한 시선에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을 지닌 딕슨은 밀드레드가 광고판을 내릴 수 밖에 없도록 만들기 위해 악행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광고대행사인 레드 웰비(케일럽 랜드리 존스)를 찾아가 협박하고, 밀드레드의 친구를 대마초 소지 혐의로 감옥에 넣으며 밀드레드를 압박합니다. 윌러비가 살아 있을땐 폭주기관차같은 딕슨을 윌러비가 막을 수 있었지만, 윌러비가 자살한 후에는 그의 광기를 막을 사람이 사라집니다. 결국 딕슨은 레드 웰비를 2층 사무실에서 창밖으로 내다 던지고 길거리에서 폭행을 하다가 해고당합니다.

딕슨이라는 캐릭터는 참 괴상합니다. 불같은 성격을 지녔지만 마마보이 기질이 다분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윌러비를 아버지처럼 따르며 그의 편지 하나에 불같은 성격을 버리기도합니다. 밀드레드와 딕슨의 대결. 뭔가 터질듯 아슬아슬하지만 윌러비라는 존재가 그들의 완충 역할을 해줍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완벽한 파트너가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밀드레드와 딕슨이 아이다호로 떠나는 장면에선 밀드레드의 딸을 죽인 범인은 결국 밝혀지지 않았지만, 밀드레드와 딕슨이 아이다호에서 벌인 활약이 은근 기대되었습니다. 굉장히 속시원한 복수극이 펼쳐질지도...


밀드레드와 딕슨은 최고의 맞수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최고의 파트너이기도하다.

개성강한 그들이 손을 잡았을 때의 시너지효과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묘한 여운으로 남는다.



최고의 연기와 함께 즐기는 블랙 코미디


네이버에서 [쓰리 빌보드]의 장르를 코미디, 범죄, 드라마로 표기했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전문 사이트인 Box Office Mojo에서는 [쓰리 빌보드]를 블랙 코미디 장르의 범주 안에 포함시켰습니다. 강간살해범에게 딸을 잃은 엄마의 분노가 어떻게 코미디 장르로 표현될 수 있는지 의아했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이해가 되더군요. 밀드레드의 당당함, 물불 안가리는 광적인 경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마보이인 딕슨의 괴상한 캐릭터, 그리고 밀드레드의 전남편 찰리의 19살 애인 페넬로페의 백치미까지... 저는 [쓰리 빌보드]를 보며 나도 모르게 세번 이상을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극장 안에 관객이 너무 없어서 제 웃음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습니다.)

밀드레드는 딸을 잃은 여느 어머니와는 달리 눈물과 오열 대신 무표정한 분노로 슬픔과 맞섭니다. 이는 분명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여성 캐릭터입니다. 할리우드에서도 미투 바람이 거센 요즘, 그렇기에 결코 꺾이지 않는 밀드레드라는 캐릭터의 등장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결국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의 물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나란히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된 우디 해럴슨과 샘 록웰의 연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광적인 경찰관 이미지와 어울리는 우디 해럴슨이 죽음을 앞둔 존경받는 경찰서장 연기를 함으로써 감동을 준것도 의외였지만, 조금은 어리숙한 이미지의 샘 록웰이 창조해낸 딕슨이라는 캐릭터는 밀드레드 만큼이나 새로웠습니다. 그렇기에 밀드레드와 딕슨이 손을 잡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묘한 쾌감까지 느껴졌습니다. 만약 밀드레드와 딕슨이 힘을 합쳐 미 전역의 성폭력범을 처단하는 내용의 액션영화가 나온다면 분명 메가히트할 것입니다. 물론 그런 영화가 나올리는 없겠지만...


백치미의 끝판왕을 보여준 페넬로페(사마라 위빙)

후반부 밀드레드가 찰리에게 '페넬로페에게 잘해.'라는 한마디에

나도 격한 공감의 미소를 지었다.

"이봐, 찰리. 고생좀 하겠지만, 그래도 페넬로페한테 잘해줘." 



내가 이래서 아카데미 영화를 포기하지 못한다.


한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은 우리나라 극장가의 흥행 보증수표였습니다. 제 기억으로 제64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양들의 침묵]은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이후 재개봉하며 관객을 불러 모았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아카데미가 스케일이 큰 영화보다는 작품성 위주로 영화를 선택하며 더이상 아카데미 작품상은 흥행과 연결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을 보기 위해 매번 애를 먹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제 취향이 아닌 영화들을 보며 색다른 재미와 쾌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쓰리 빌보드]가 정확히 그런 영화입니다. 제90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은 아카데미가 아니더라도 아마 극장에서 봤을 것입니다. 수중 생명체와 인간 여성의 사랑이라니...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괴상한 상상력은 언제나 매력적이니까요. 하지만 [쓰리 빌보드]는 아마도 다운로드로라도 안봤을 영화입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나니 이 영화를 안봤으면 큰일날뻔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밀드레드와 딕슨이라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도 좋았고, 딸을 잃은 엄마의 분노를 블랙 코미디로 표현한 마틴 맥도나 감독의 연출력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황홀했습니다. 알고보니 마틴 맥도나 감독은 2009년에 개봉한 [킬러들의 도시]로 감독 데뷔를 한 감독이더군요. [킬러들의 도시]도 굉장히 인상갚었는데 또 한명의 천재 감독이 나타난 것같습니다. 암튼 이래저래 [쓰리 빌보드]는 전혀 기대하지 못한 보석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영화였습니다. 그러고보니 아직 남아 있는 아카데미 영화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레이디 버드]가 더욱 기대가 됩니다.


드레드는 강간살해범에게 딸을 잃엇지만 결코 울지 않는다.

딕슨은 미국 최강의 편협한 미치광이 경찰이지만 밀드레드를 용서한다.

페넬로페는 너무 비현실적으로 멍청해 웃음이 나오지만

 '분노는 더 큰 분노를 야기할 뿐이다'라는 영화를 관통하는 명언을 남긴다.

아! 정말 이 영화, 결코 예상하지 못한 쾌감을 아무때나 마구 관객에게 무심코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