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은 내게 문학적 허영심이었다.
제가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 이문열의 소설은 제게 문학적 허영심과도 같았습니다. 사실 당시 저는 <깊은 밤 저편>, <게임의 여왕, <천사의 분노> 등을 쓴 미국의 추리소설가 시드니 셀던의 소설에 푹 빠져 있었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틈틈히 이문열의 <추락하는 것을 날개가 있다>, <젊은 날의 초상> 등의 소설을 읽으며 문학적 허영심을 채웠습니다. 솔직히 시드니 셀던의 소설과는 달리 이문열의 소설은 제게 재미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문열의 소설을 읽으며 스스로 '나는 문학소년이다.'라는 자부심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러나 영화에 푹 빠지며 한동안 책을 멀리하던 제게 이문열은 그저 추억 속의 이름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회사의 책장에서 이문열의 이름을 발견한 것입니다. <대륙의 한>이라는 무려 다섯권짜리 대하소설이었는데 2018년부터 다시 독서를 시작한 제게 다섯권의 소설은 도전하기엔 부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고작 한달여만에 열권의 책을 읽고나니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사춘기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한번 이문열의 소설로 제 문학적 허영심을 채우려 했던 것입니다.
백제가 중국에 진출하여 한반도의 두배나 되었던 땅을 차지했다고?
<대륙의 한>은 부제처럼 백제요서경략사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백제요서경락사는 4세기 경 백제가 중국의 요서지방을 경략해 군을 설치하고 지배했다는 설입니다. 이문열은 백제요서경략사를 토대로 근초고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백제의 제12대 왕 계왕의 아들 여광이 여러 영웅 호걸들을 모아 근초고왕에 맞서 왕위를 되찾으려 한다는 것이 1권부터 3권까지의 내용이고, 근초고왕과의 오해를 푼 여광이 중국의 요서지방으로 가서 유민들을 모아 군을 설치하고 지배하는 과정이 4권부터 5권까지의 내용입니다.
사실 여광이 근초고왕에 맞서는 내용을 담은 전반부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여광이 여러 영웅호걸들을 모으는 과정이 마치 <삼국지>처럼 흥미진진했고, 하필 여광이 맞서야 하는 것이 백제의 전성기를 연 근초고왕이라는 점에서 유비, 관우, 장비의 몰락을 담은 <삼국지>처럼 <대륙의 한> 역시 비극일 수 밖에 것이 제 흥미를 잡아 끌었습니다. 하지만 3권에서 급작스럽게 여광과 근초고왕이 서로 화해를 하며 이야기는 이문열이 하고 싶었던 백제요서경략사에 접어듭니다.
후반부에 접어들며 내용은 지루해진다.
근초고왕과 화해를 한 여광은 백제를 떠나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향합니다. 당시의 중국은 5호 16국의 시대로 수 많은 나라들이 중국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던 혼란기였습니다. 당시 요서는 모용씨의 전연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여광은 전연이 전진에게 멸망을 당하자 전진에 토항한 모용수가 요서의 새로운 강자가 될 것임을 직감하고 그의 아들 모용농을 도와 후연을 세우는데 기여합니다. 그럼으로써 요서 지방을 지배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합니다.
하지만 여광이 후연을 등에 업고 요서 지방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대륙의 한>은 후연의 전쟁사를 나열하기만 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소설의 초반에 착실하게 구축해놓은 영웅호걸 캐릭터들은 후반부에 들어서며 은근슬쩍 사라지고, 어느새 후연의 흥망성쇠에 대한 지루한 나열의 책에 가득채웁니다. 물론 여광이 후연을 등에 업고 요서 지방의 지배권을 확보했다고는 하지만 어느순간 여광의 비중마저 줄어들고 후연의 이야기가 늘어나면서 책을 읽는 제 눈도 점점 피로해져만 갔습니다.
<대륙의 한>은 미완성의 이야기?
제가 <대륙의 한>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실망한 것은 이 소설의 끝 마무리입니다. 후연은 북위에 멸망하고 북위가 5호 16국 시대를 마감시킵니다. 후연의 멸망은 여광의 자립과 직결되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백제의 요서 경략사가 펼쳐지겠다 싶은 순간 <대륙의 한>은 5권을 마지막으로 끝나버립니다. 혹시 6권이 있는데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리저리 찾아봤지만 <대륙의 한 6권> 따위는 없었습니다. 결국 이문열이 <대륙의 한>을 미완성인채로 내버려둔 것인지, 아니면 <대륙의 한> 자체가 그저 용두사미 소설인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찌되었건 거의 2주에 걸쳐 읽은 대하 소설이 이렇게 미지근하게 끝맺음을 해버리니 뭔가 허무하더군요. 그래도 한때 제 문학적 허영심을 채워주던 한국 소설계의 대가인 이문열의 소설인데... 아쉽게도 백제요서 경략사에 대해서 호기롭게 시작했으나 초라하게 끝냈다는 혹평을 면치 못할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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